식량전쟁(4)
국왕의 얼굴은 기묘하게 구겨졌다.
“약혼? 알렉산드리나를?”
“그렇습니다.”
“그 망할 년이 혹시 바람이라도 불어넣었나?”
당연하지만 본인의 어린 조카딸을 지칭하는 건 아니었다.
아니, 윌리엄 4세가 이토록 경멸을 드러내는 상대는 왕실 내에서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이건 공녀님께도 좋은 일입니다.”
“말해보게.”
“일단 혼담이 오간다는 것만으로도, 그게 최종적으로 결렬될지 합의에 도달할지는 무관하게 국왕 폐하의 친권을 행사할 명분이 됩니다. 공녀님을...... 폐하 말마따나 그 망할 년의 손아귀에서 빼내 버킹엄으로 모실 수 있는 셈입니다.”
국왕이 자기 제수에게 망할 여자라고 하는 건 좋은 건 아니지만, 사실 윌리엄 4세가 평소에 가지고 있는 생각에 비해서는 대화 상대가 상대다 보니 되려 좀 자제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자신의 동생, 에드워드가 남긴 유일한 자식, 그리고 그 동생이 폐렴으로 죽은 뒤의 그 집안 사정은 윌리엄 4세로써는 두 눈 뜨고 볼 수가 없을 정도로 경멸스럽고 끔찍했다.
켄트 공작부인 빅토리아 공녀, 그리고 그녀의 내연남 존 콘로이.
할 수만 있다면 총을 가져와 그 둘을 쏴 죽여버리고 싶은 게 윌리엄 4세의 본심이었다.
제수라는 년이 후일 이 나라를 물려받을 공주를 똑바로 교육은 안 하고 자기들 입맛에 맞게 조종해 나라를 홀랑 집어삼키려 들고, 그 내연남까지 끌어들였다.
가정교사도 거절하고, 파티 초대도 거절하고, 후계자 수업도 방해하고 간섭하며 작정하고 자신을 조카딸에게서 떼어놓으려는 개수작.
그래서 러시아 사절단에서 의전 문제를 명분으로 억지로 조카딸을 그 후안무치한 계집의 손에서 떼어내어 버킹엄에서 근위대의 호위를 받게 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이제 슬슬 한계다.
“국익 역시 명확합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어차피 다음 대 이후로는 대영제국의 하노버 왕조는 그 막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러시아와 혼인 동맹을 맺어서 나쁠 것도 없지 않느냐는 의미였다.
“명백히 이 자리에서 못을 박아두겠네.”
국왕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그 아이가 싫어하는 결혼을 억지로 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네, 무슨 말인지 알겠나?”
“그 부분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좋을 듯 합니다만.... 두 분이 서로를 제법 좋게 생각하셨다는 이야기는 이미 확인된 바 있습니다.”
“나는 어린애들의 치기 어린 행동을 너무 과대해석하는 거 아닌가 싶네만.”
하지만, 명백히 매력적인 제안인 것은 많았다.
이루어지든 말든, 러시아 황태자와 영국 왕위계승권자의 약혼 논의는 명백히 국왕의 권한이고, 정치적 문제다. 그 제수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빌어쳐먹을 독일년과 그년과 붙어먹고 있는 놈팽이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조카딸에게 집적대는 일을 사전에 막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난리치기에 앞서 의회가 길길이 뛸 테니까.
의회가 방패막이가 되지 못한다면, 그는 영국 국왕에게 보장된 권한 중 하나를 발동할 수도 있었다.
모든 영국 왕족에 대한 친권.
이 상황에서 명분은 명백히 그에게 있었고, 그는 모든 미성년 영국 왕족의 양육과 재산관리를 해 당사자의 복리를 확보하도록 하기 위한 의무이자 권리를 행사해 왕비와 함께 그녀를 직접 양육할 작정이었다.
왕비 역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왕과 의견을 같이하고 있었으니까.
***
버킹엄에서 격식있기로는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의 방에는 한 어린 소녀가 있었다.
알렉산드라 빅토리아.
후일, 빅토리아 여왕이라는 이름을 받을 존재.
대영제국의 전성기의 상징이 될 여왕.
그녀는 조용히 거울을 보고 있었다.
거울에 잠시 손을 올린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녀님. 국왕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그 말에 소녀,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는 거울에서 시선을 떼고 몸을 돌렸다.
“알렉산드리나.”
“국왕 폐하.”
“하하,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다. 평소처럼 큰아버지라 불러주지 않겠느냐.”
“버킹엄 궁에서요?”
“듣는 사람도 없다. 네 어머니도, 그리고 그 작자도.”
윌리엄 4세의 목소리에서는 숨기려 했지만 숨길 수 없는 진한 경멸이 뚝뚝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들이 뭐라 떠들든, 너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정말요?”
“뭐 그것도 어느 정도지만...... 그래도 그렇게 팍팍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예.”
“흠, 아무튼........ 실컷 그렇게 떠들어 놓고 이야기하기는 좀 묵직한 주제이기는 하다만....”
국왕은 자신의 조카에게 말했다.
“내각에서 네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나왔단다.”
“....... 결혼이요?”
“아직은 조금 이르니 약혼이지.”
“..........”
“내가 미리 말해두마, 이 큰아버지는, 네가 싫다는 결혼을 하게 놔둘 생각이 없단다.”
특히 첫사랑이라면.
그 말은 입안에서만 읆조렸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이자 저주.
그 마법의 이름은 연모의 마음, 다시 말해 사랑이다.
생리적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만인의 축복을 받아 마땅한 아름다운 이야기.
풋풋한 연심이 묻어나는 첫사랑의 열병.
처음이기에 서툴고, 처음이기에 두렵고, 처음이기에 어렵고, 처음이기에 제어할 수 없다.
그런 마음을, 삿된 욕망 따위로, 그 잡것들의 권력욕 따위로 망쳐버리게 둘쏘냐.
“혹여, 마음에 둔 사람이 있느냐?”
“저.........”
우물쭈물하는 조카딸을 본 윌리엄 4세는 조금 아차 싶었는지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 내가 조금 성급했다.”
어린애에게 갑자기 평생 함께할 사람을 골라보라고 하면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하지만 너무 늦지 않게 답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구나.”
그 늦는다는 게 언제를 의미하는 걸까.
사실 그 시점은 그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명확했다. 너무나도 명확했다.
‘나는 죽지 않는다.’
윌리엄 4세는 중얼거렸다.
저 아이가 성인이 되는 그 순간까지, 신께서 나를 살게 해주시기를, 그녀가 법적 성인이 되는 날까지 살게 해주어, 그 살쾡이 같은 년과 지저분한 길고양이 같은 놈이 내 조카의 왕위에 간섭할 여지조차 남겨놓지 못하기를.
‘나는 죽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만일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녀의 약혼자가 힘이 되어주기를.
“........ 큰아버지?”
그의 눈빛이 무서웠는지, 주춤하는 빅토리아를 본 윌리엄 4세는 애써 웃음지었다.
“빅토리아, 가자꾸나, 오늘은 러시아 측과 회담이 있을 예정이다. 너 역시 경험을 쌓아야지, 아무것도 할 필요 없지만, 이 큰아버지가 어떻게 일하는지 잘 봐두거라, 그 분위기에 익숙해지는 것도 제법 중요하거든.”
“어? 그럼......”
“알렉산드르 황태자도 올 예정이니, 네가 나가도 문제는 없단다, 미래의 군주들끼리 안면을 익혀두어도 좋겠지.”
그러자 환하게 웃는 소녀를 본 윌리엄 4세는 뭉클한 마음으로 미소지었다.
‘사랑한다, 내 조카딸이며, 동시에 이 나라를 물려받을 후계자, 네 앞길을 가로막을 장애물이 있다면.’
윌리엄 4세는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내가 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최대한 부숴버리겠다. 누가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어떻게든.’
그가 가진 모든 힘을 다 사용해서라도.
***
“황금여명회 이야기가 신문에도 나왔네요.”
“...........”
명백히 내 실수다.
이 시대 인간들, 비밀결사 같은 거에 환장하는 시대라는 걸 잠시 망각하고 말았어.
물론 이 비밀결사들은 주연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비중이 있다. 특히 황금여명회는 주인공의 조력자들로써 많은 도움을 준다.
일종의 사상가, 학자 등등의 비밀결사로. 프리메이슨의 박애 정신을 넘어 적극 혁명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떨어져나왔다가 너무 오래 전에 갈라져 완전히 색채가 달라져 버린 세력, 이전에 해체된 일루미나티와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신론자들이자 헤르메스학을 기반으로 한 신비주의자 단체..... 주인공과는 거래 관계고, 주인공의 반대 세력과도 어느 정도 거래를 하기는 하지만, 나중에는 주인공과 쌓은 친분 때문에 원래 넘겨줘서는 안 되는 상대에 대한 정보를 비밀리에, 무상으로 제공해주기도 한다.
프리메이슨은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진 단체로, 그 존재가 대중에 알려진 단체이며, 21세기 당시의 형태로 변한 것만 따져도 100여 년 전의 일이다. 당장 프랑스 혁명에 참여한 게 프리메이슨이고, 프리메이슨의 일부 분파는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몰락하는 순간까지 나폴레옹에게 충성했다.
그런데 황금여명회는 역사적으로 있었던 단체지만, 아직은 없다.
그래서 나는 프리메이슨은 언급 수준으로, 황금여명회가 프리메이슨에서 갈라져나온 이들이 모태가 되어 세워졌다는 수준으로 넘겼고, 황금여명회에게는 어느 정도의 비중을 두어 작중에 등장시켰다.
거기에 음모론 한 스푼 던져서 이들은 전 유럽과 아시아까지 걸친 인적자원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고, 작중에서 서울 봉기군이 이들을 통해 무기를 비밀리에 유통하기도 한다.
물론, 이건 다 설정이다, 내 소설 속 설정이라고.
근데 어느 중2병 걸린 인간들이 그걸 진짜 창설하고 앉은 모양이다.
빌어먹게도.
그 소리를 들은 직후 정신줄이 너무 날아가서 대뇌 피질에서 아주 조각모음을 해야 했다.
덕분에 나는 어떤 결사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변명을 해야 했던 건 덤이고.....
“....... 세상에 할 짓 없는 인간이 참 많아.”
나는 황금여명회 특집 기사가 나온 신문을 집어던졌다.
하지만 머리가 많이 복잡했다.
‘진짜 내가 뭐라도 해야 하나?’
이 세계관이 소설이라면 나도 나름 주인공이겠지, 과거로 온 환생자가 주인공이지 설마 엑스트라겠냐.
그럼 내가 적극적으로 역사를 바꾸려고 들어도 완전히 망해버리지는 않는다는 거 아닐까? 진짜 망해버리면 작가가 5700자짜리 상하차 드립을 받을 테니까?
전혀, 하등 근거 없는 망상이었지만 왜인지 그럴듯해 보였다.
‘정치에 뛰어든다...... 되려나.’
역사를 바꾼다고 한번 가정해보자.
그러면 당연히 세상을 가장 능동적이고, 예측 가능한 범위에서 바꿀 수 있는 건 정치판이다.
하지만 수상이라고 해서 영국의 모든 일을 맘대로 할 수는 없다. 영국 국왕도 그건 안 된다.
그렇다고 설마 영국에서 공산 혁명을 일으켜 적기를 버킹엄 궁전에 내걸 일은 없을 거 아닌가. 애초에 내가 뭔가 독재를 한다고 해서 스탈린이나 히틀러마냥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놓을 능력도 없다.
그래도, 정치라는 길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정치인의 길이라.........’
의원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출세다.
그리고 이 시대는 아직 인맥의 시대다.
‘정치인과 혼맥을 맺는다거나 하면 뭐, 확실히 의원직에 도전하는 게 불가능은 아니지, 지역 의회 의원이든 아니면 영사든 간에 적당히 경력을 쌓다가 의원직에 도전하는 걸로 해 보면.......’
이 시대에는 외교관조차도 낙하산 인사고, 그게 당연한 시대다. 유럽 고위층들은 죄다 인맥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렇게 생각해보면 도리어 수많은 인맥을 이리저리 끌어다 쓸 수 있는 낙하산이 더 뛰어날 수 있다는 것이 우습게도 현실이니까.
“내가 정치를 한다고 하시면, 어머니가 좋아하실까?”
“장담컨대 이 인맥 저 인맥 다 끌어다가 앞길 깔아주실걸요.”
“........”
나는 잠시 천장 무늬를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조금 더 생각을 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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