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전쟁(3)
런던항, 영국.
런던 항에 도열한 의장대가 러시아 국가를 연주하는 가운데 러시아의 사절단이 내리고 있었다.
“외무차관은 어디 있나?”
알렉산드르 황태자가 의문스럽게 묻자, 곧장 답이 돌아왔다.
“차르께서 준비하신 선물을 내리고 계십니다. 몇 분 전에는 오셨어야 하는데.....”
그 직후, 여러 사람들이 차례차례 배에서 내렸다.
그리고 거대한 물체 하나도 느릿느릿 배에서 내려졌다.
“저게 뭐........”
“차르께서 대영제국과의 우정의 지속을 바라시며 드리는 우호의 선물입니다.”
잠시 뒤, 덮개가 벗겨졌다.
그것은 종치고는 너무 컸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바윗덩이 같았다.
높이만 쳐도 사람 넷을 쌓아올린 수준의 높이를 가진 거대한 종을 가리키며, 외무장관은 미소를 지었다.
“차르께서 대영제국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차르 종.
오래 전에 화재로 인해 추락해 깨졌지만, 황제의 명령에 의해 출발 전, 파편들을 모조리 녹인 뒤 은과 금 등을 추가로 녹여넣는 등의 절차를 거친 끝에 다시금 주조된 네 번째 차르 종이었다.
“이 종을 웨스트민스터 궁전(영국 국회의사당)의 복원에 사용해주신다면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우호 관계는 영원히 울려퍼지리라 믿습니다.”
작년, 상원의 어느 벽난로에서 관리 소홀로 인해 발생한 화재로 인해 상하원 의사당 전체가 홀랑 타버리는 초대형 사고가 있었다. 그 뒤로 재건위원회가 꾸려지기는 했지만, 아직 설계안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종탑을 설치할 때 필요할 거라면서 러시아가 선물을 하는 것도 가능했던 것이다.
영국은 언제나 동맹국이 필요한 국가였다. 해상봉쇄를 하고 돈을 지원해주면 동맹국이 적국을 대륙에서 결정적으로 패배시키는 전략은 오랫동안 대영제국이 유럽의 적국을 상대해 온 필승 전략이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자신이 그 역할을 맡아줄 테니, 좋은 관계를 유지하자고 제스쳐를 취하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영국 역시 러시아가 이렇게 좋게좋게 가자고 하는데 그 관계를 악화시킬 하등의 이유도 없었다.
프랑스와의 관계는 자연히 불편해지겠지만, 언제 영국이 프랑스와 관계가 좋았던 적이 있긴 했던가? 아직도 나폴레옹을 그리워하는 자들이 많은 프랑스를 신뢰하는 정치인은 영국에는 없었다.
적당한 덕담을 나눈 윌리엄 4세는 곧장 자신의 곁에 있는 여성을 소개했다.
“이쪽은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 대영제국의 왕위계승서열 1순위에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누구보바도 소중한 내 조카딸이오.”
“알렉산드라 빅토리아입니다.”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입니다.”
한 살 아래의 소녀는 얼굴을 붉히며 소년에게 예를 갖추었고, 소년은 정중하게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
뭘까, 진짜 뭘까.
<러시아 외무장관 : 러시아 제국의 선물, 차르 종, 신축될 웨스트민스터 궁전의 종탑에 사용되기 위한 목적으로 선물, 영원히 두 국가의 우호를 울리게 될 것>
차르 종, 차르 종은 나도 들어 봤다. 세계에서 가장 큰 종이잖아. 그리고 한 번도 울린 적 없다는 이야기도 들었던 거 같은데.
근데 그게 빅 벤에 달린다고? 돌겠네 진짜.
‘....... 나 때문인가.’
아니, 정정해야겠다. 나 때문이다. 아니면 이런 미친 상황이 될 리가 없잖아.
***
“차르께서는..... 황태자 전하?”
“아, 음, 공사, 뭐라고 했나?”
“아까 전부터 묘하게..... 좀 정신이 빠져 계시는군요.”
“으음, 그래.”
황태자는 발그레한 얼굴을 휙휙 저었다.
“아니, 아니네.”
“뭐가 아닙니까.”
“공사가 걱정해주지 않아도 되네, 그냥 내가 좀..... 정말 별거 아니네.”
공사는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황태자에게 꼬치꼬치 캐물을 생각은 딱히 하지 않았다.
“아무튼, 오늘 저녁 있을 무도회에서 비공식 회담이 있을 겁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실무를 맡으신 게 아니지만, 그래도 경험을 쌓는 차원에서 함께하시면 되겠습니다.”
“알겠네.”
그렇게 말한 알렉산드르는 조용히 입 안에서 한 이름을 굴렸다.
‘알렉산드리나.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
***
“총리.”
“...... 나폴레옹 전쟁.”
대영제국의 현직 총리 찰스 그레이 백작은 한숨을 쉬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지 20년도 되지 않았네.”
담배 연기가 허허로이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프랑스인들은 또 다른 전쟁을 꿈꾸는가.”
맞은 편에 앉아 있던 토리당의 당수, 아서 웰즐리 공작은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현재에도, 과거에도, 미래에도, 최고의 전략가 한 명을 꼽으라면 바로 나폴레옹일 것이오. 그와 맞서서, 그를 꺾어내었다는 건.... 내 인생 최고의 영광이었지.”
“공작님. 회상하실 때가 아닙니다.”
찰스 그레이 백작은 노장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공작님은 나폴레옹을 꺾은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 워털루 전투가 벌어져 나폴레옹이 몰락하기까지 대영제국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러야 했는지도 너무나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
웰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 잔 다르크 이후 영국에게 가장 두려움을 주었던 존재가 있다면 바로 그였겠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세계 최고가 있다면 그였으리라.
나폴레옹.
그 군사적 천재에게 웰즐리는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워털루에서 승리한 뒤, 누군가가 웰즐리에게 물었다.
당신이 나폴레옹을 이겼으니, 당신은 나폴레옹보다 한 수 위가 아닌가.
그때 웰즐리는 분노했다.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가장 위대한 군사 지휘관이 있다면 단 한 사람, 나폴레옹뿐일 거라고.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다른 나폴레옹이 움직이고 있네. 루이필리프는 지난번의 벨기에 침략에 더해 노골적으로 지브롤터를 탐내고 있다는 말이네.”
물론 상대가 나폴레옹만큼이나 뛰어난 군사적 천재일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만에 하나 진짜 그렇다면 정말 신이 프랑스를 편애하는 게 아닌가 의심해봐야 할 지경이니까. 가뜩이나 프랑스 땅이 신이 가장 컨디션이 좋을 때 창조한 땅 아니냐는 농담이 있을 지경인데 그런 땅에서 나폴레옹 수준의 군사적 천재들이 줄줄이 튀어나온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루이필리프의 능력이 그 정도가 된다면.
웰즐리는 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대륙봉쇄령이 대륙 국가들만 고통스럽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아니다, 대륙봉쇄령은 대영제국을 실제로 거의 말려 죽일 뻔했다.
대영제국이 지브롤터를 잃으면 어떻게 되는가.
수에즈 운하는 아직 없지만, 일단 지중해의 제해권에 치명타를 입는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지중해의 제해권을 상실한다는 이야기는, 대영제국이 유럽에 개입할 가장 강력한 수단을 상실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결코 간단하게 볼 수 없다.
“나 외에도 넬슨 제독이 나폴레옹을 막아내었지, 그의 말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자고.”
웰즐리는 몸을 곧추세우고 물었다.
“잉글랜드는, 우리 모두가 의무를 다하게 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총리.”
나폴레옹 전쟁의 영웅이자 야당 당수의 눈에는 워털루 전투와, 그 전선에 서기까지 거쳐야 했던 수많은 전장이 비치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대영제국의 총리가 그에 답했다.
“지금 당장 개전을 할 수는 없습니다. 잉글랜드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어요. 다행히도 저들도 준비가 되지 않은 건 마찬가지로 보입니다.”
아직 나폴레옹 시절 전 유럽에 맞서 혼자 전쟁을 벌인 피해가 채 회복되지도 않았다.
한 세대가 채 지나지도 않은 지금, 나폴레옹도 사라진 지금, 원한은 생생하지만 상처도 아직 아물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을 준비해야 함은 명확하네.”
함대를 모으고, 군대를 준비하고. 자금을 비축하고. 동맹을 찾고.
“별개의 이야기가 될지, 아니면 아닐지는 모르는 이야기네, 그냥 내 헛소리라 생각하고 듣게나.”
“경청하겠네.”
“우리는 지금 내일 일어날 전쟁을 대비하는가.”
“아니지.”
“내년? 아무튼, 우리는 모르네, 명확한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런 점에서 독일 연방은 동맹 상대로 큰 가치가 없다는 게 내 의견이네, 내부 구성국들 개개도 마찬가지. 내부 사정 때문에 적절한 때에 군사지원을 해줄 수 없다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우리가 사전에 계획해서 선제공격을 가하는 게 아닌 이상은 의미가 없다는 거군.”
“전쟁이 일어난 뒤에 합류한다면 몰라도 대계를 같이 볼 동맹으로써는 손색이 있다, 이 정도로 해 두지. 오스트리아 연방이 어떻게 프로이센과 타협해서 독일 연방을 잘 조율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게 되겠는가.”
“될 리가.”
프로이센이나 오스트리아 제국을 미리 끌어들여 놓는다? 프로이센을 아군으로 놔뒀다가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 붙거나 반대 상황이 일어난다면? 지난 나폴레옹 전쟁 때는 나폴레옹이 자기 군재만 믿고 외교를 소홀히 했다지만 루이필리프도 그럴 거란 보장이 있는가?
“내가 루이필리프라면 반드시 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 중 하나는 아군으로 끌어들일 걸세, 우리가 선을 댄 곳의 반대쪽을 반드시 잡겠지.”
신성동맹은 그리스 독립 전쟁 이후로 간판만 걸려 있을 뿐 사실상 와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신성동맹이라는 이름에 아직도 집착하고 있는 것은 러시아의 니콜라이 차르 혼자뿐이었다.
어찌되었든 간에, 대영제국은 절대, 무슨 수를 써도 두 국가를 모두 만족시킬 수 없다.
그에 비해 프랑스는 선택의 폭이 넓다.
“자기들이 이기면 프로이센이든 오스트리아든 독일 연방에서의 패권을 확실하게 잡게 해줄 거라는 약속 하나만으로 독일 연방의 쌍두가 서로에게 총을 겨누게 만들기는 충분하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순 없어.”
수성을 해야 하는 자와 공격을 해야 하는 자의 입장 차이다. 공격자보다 지키는 자는 훨씬 많은 비용과 시간, 자원과 인력을 투자해야만 한다. 열 포졸이 한 도둑 못 막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가.
물론 그게 도둑을 맞은 열 포졸의 변명거리가 될 수는 없다. 도둑이 들었다면 당연히 임무 실패에 대한 책임은 철저하게 져야만 한다. 방어가 공격보다 훨씬 어렵다느니 하면서 경계에 실패한 군인이 변명을 늘어놓는다면 당장 군법재판으로 목을 대롱대롱 매달아줘야 한다는 게 웰즐리의 지론이었다.
작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절대 용서할 수 없으니.
“그렇다면 역시 답은 하나뿐이군.”
총리도, 웰즐리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뜻은 통했다.
“어쩌시겠습니까?”
“국왕 폐하를 알현해야겠네.”
“국왕 폐하만 설득해서 될 일은 아닙니다. 의회 상하원에서도 승인을 받아야죠, 전례가 적은 일이니만큼.......”
“드물었지만 전혀 없지는 않고, 그 중 하나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만큼 법리적으로 딱히 문제도 없지, 그거면 충분하네, 아니, 충분하고도 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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