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전쟁(2)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
니콜라이 황제는 조용히 서신을 덮었다.
“알렉산드르.”
자신이 존경하던 형님의 이름을 따 붙여진 이름.
알렉산드르 황태자.
“예, 아버지.”
“네가 영국에 가 보아야겠다.”
“.......예?”
차르는 단호하게 말했다.
“런던에 다녀오거라.”
“아버지, 어째서......”
“네 큰아버지도 젊은 시절, 장교들과 함께 파리에 다녀오셨다.”
그건 전쟁에서 이겨서 다녀오신 것이니 이야기가 다르지 않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알렉산드르 황태자는 입을 다물었다.
“신성동맹은 유지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라도, 네 존재감을 각국에 알려놓는 일은 미리 시작해도 부족하지 않다.”
극도로 보수주의적인 니콜라이 차르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아직도 나폴레옹을 그리워한다. 언제든 다시 전쟁을 일으킬 수 있어,”
독일의 소국들을 포함해 영국, 교황청, 오스만을 제외한 모든 유럽 국가들이 신성동맹에 가입되어 있다. 영국은 당시 법률적인 문제, 즉 왕세자의 섭정 상태라는 문제로 인해 가입하지 못했고, 교황청은 종교적 문제로 인해, 그리고 오스만 역시 신성동맹에 오스만이 가입하는 것이 모양새가 굉장히 이상하다는 문제로 인해 가입하지 않았다.
“새로 즉위한 윌리엄 4세에 대한 축하가 명분이 되겠지만, 이번 사절단의 가장 큰 목표는 영국을 신성동맹에 끌어들이는 것이 가장 큰 목표가 될 것이다.”
“영국의 제안에 대해서는 어찌 답하시겠습니까?”
“거절할 이유가 있던가? 다만 조건을 조금 더 우리 측에 유리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 하지만 굳이 무리해서 조건을 파토낼 건 없다. 아니면 그 두 가지를 굳이 분리해서 처리할 것 없이 하나로 묶어서 처리할 수도 있겠지.”
신성동맹 가맹국에 대해서 밀 관세를 인하해 준다거나,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그리고 니콜라이는 형님의 유산을 지키고 유지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
<서울이여! 일어나라!>
그들은 배신당했다.
부패하고 무능한 왕정과 귀족은 나라를 망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중국인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혈통적으로도 중국인보다는 몽골, 타타르의 후예에 가까웠고, 그들은 지배할지언정 지배당하지 않는, 지배당한다면 죽을 때까지 저항하는 자들이었다.
가톨릭 신앙을 한때 잊었던 프레스터 존의 후예이며 유대인의 잃어버린 10지파 가운데......
“아, 이건 좀 아닌가.”
나는 만년필을 빙글빙글 돌렸다.
미신을 믿지 않고 올바른 신앙을 믿는 주인공의 전우와 협력자들인 조선인, 악당들인 중국인, 그리고 얍삽한 배신자 일본인.
내가 대충 씌워놓은 프레임이다.
이유야....... 별거 없다. 중국도 싫고 일본도 싫으니까.
물론 내가 전생의 기억에 휘둘리는 건 맞지만, 그래도 뭐, 내가 국가 원수가 되어서 무지성으로 퍼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 소설에서 조선에 대해 긍정적인 묘사를 하고 중국과 일본을 욕하는 거 가지고 뭐라 하는 인간이 있겠어? 어차피 이 시대는 동양의 신비나 점술, 예언이라고 해도 믿는 시대인데 뭐.
“그래서 봉기는 성공하나요?”
“실패하지.”
나는 라일라에게 간단히 답해주었다.
“병력비는 90대 1, 중무장한 정규군과 훈련받지 못한 시민군 간의 싸움이야, 유럽 군대의 도움만을 기대해야 하는 상황인데 그 유럽 군대가 여러 사정 때문에 제대로 도움을 주지 못할 테니까. 결국 장렬하게 싸우다가 마지막 한 사람까지 전원 전사하겠지.”
묘사는 내가 과거에 읽었던 바르샤바 봉기를 제법 참조했다.
이건 100% 먹힌다.
압도적인 적, 그것도 악랄한 적에 맞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 한 사람까지 중과부적임을 알면서도 오지 않을 희망 하나를 믿고 자발적으로 남아서 맞서 싸우다가 마지막 한 사람까지 조국을, 민족을 위해 순교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먹하는 스토리 아닌가? 애산 전투가 그랬고, 테모르필레 전투가 그랬고, 콘스탄티노플 함락이 그랬고, 코소보 전투가 그랬다.
실제로 일어나면 민족적 성지가 만들어지고 항전 의지를 불태우는 재료가 되고, 외국인들조차도 그들의 용기를 칭찬하고는 하니까.
그러니 안 써먹을 이유가 없다. 나는 엄연히 대중소설 작가니까.
그때, 라일라가 입을 열었다.
“도련님, 그런데 그 소식은 들으셨어요?”
“무슨 소식?”
“러시아 황태자를 위시한 러시아 대표단이 조만간 런던을 방문한다는데요.”
“음....... 러시아 황태자가 14살 아니었나?”
“13살이요.”
“그러면 그냥 친선이네.”
황태자가 친선을 위해 외국 수도를 방문한다, 유럽에서는 별로 드물지도 않은 일이다.
어차피 피가 워낙 많이 섞여서 몇 다리 건너면 다 친척이기도 하고, 당장 황태자끼리 절친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들었는데.
“러시아는 그래도 유럽에서 좀 겉도는 면이 있지, 그래서 황태자를 외국 물 좀 먹게 하려는 거, 이상할 것도 없어. 애초에 저들이 대제라고 하는 표트르 1세도 황태자가 아니라 차르가 된 뒤에도 그러고 다녔으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원고에 시선을 돌렸다.
“잘나가는 소설 하나를 대가로 내 평판을 완벽하게 조져버린다면, 그건 막대한 손해겠지?”
“당연하죠.”
“그래서 새 소설을 써서 그 평판을 메꿨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그 소설이 이 결과를 낳은 걸까?”
“설마요.”
아냐, 거의 99%다.
다른 이유가 없는걸.
<프랑스-스페인, 지브롤터 반환 요구 본격화! 루이필리프 ‘지브롤터는 스페인의 정당한 영토’ 망언 파동!>
<프랑스-스페인 동맹에 맞선 영-러 동맹 추진의 필요성.... 독일인들의 선택은 어디로?>
<익명을 요구한 고위 관료 : 루이필리프의 야심이 전쟁의 구름을 유럽 대륙에 드리운다!>
“안 되겠다.”
“예?”
“빌어먹을, 정계에 나가든가 해야지, 못해먹겠다고.”
대체 상황이 어떻게 튀는 건지도 이해를 못하겠다.
물론, 정계에 내가 나가고 싶다고 해서 바로 진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21세기 한국 같으면 내가 정당을 하나 창설해도 뭐 선거운동도 할 수 있고 이것저것 다 가능하다. 연예인들도, 사업가들도 정치할 수 있다. 당연히 유명 작가도 가능하다.
문제는, 지금은 19세기 영국이라는 거다.
물론, 물론 정치에 참여할 수는 있지만, 그 방식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미개했다.
투표권은 극히 제한되어 있고, 여자들은 투표권이 없는 건 거의 당연하고, 빈민들도 ‘당연히’ 투표권이 없다.
투표권은 ‘세금을 어느 정도 내는 이’만 가질 수 있기에.
무산자는 참정권 자체가 없는 셈이다.
귀족? 남자 귀족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상원의원, 그러니까 귀족원 의원이 될 권리가 있지만, 나는 아니다.
내가 자작이라 불리지만 그건 내 어머니가 백작이라 그런 거고, 영국은 귀족가의 자식도 작위를 물려받지 않는다면 평민 취급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윈스턴 처칠이다.
처칠은 공작가의 인물로, 한때 1순위 후계자였었지만 서민원에 들어가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처칠이 법적으로는 평민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말보로 공작이 요절해서 처칠이 공작위를 물려받았다면 당연히 총리직은 물건너갔겠지.
내가 영국에서 뭔가 따로 작위를 받는다면 모를까, 사실 아서 코난 도일도 기사작위를 받았으니 불가능하지야 않겠다만......
하지만 그게 아닌 내가 정치에 나가려면 하원, 그러니까 서민원밖에 길이 없다. 일단 영국 법상 작위가 없으니 일단 평민이고, 평민은 서민원에만 들어갈 수 있으니까. 어머니가 아직 정정하시기도 하고.
당연하지만 서민원에 들어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세상이 돈과 인맥이라고 하는데, 진짜 그렇다.
그리고 나는 그쪽에 인맥이 하나도 없었다. 돈이야 소설 팔아서 제법 있지만.
내 행동이 역사를 바꿨다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아야겠는데, 알 길이 없다.
신문기사들은 부정확하고 과장되어 있다. 오보도 적지 않다.
그리고 그게 ‘유일한’ 통로다.
뭐 21세기라면 인터넷이라도 뒤져 가면서 팩트체크를 시도라도 해 보겠는데, 그게 아니란 거다.
그러니까 적어도 의회의 의원이면 영국 정부가 아는 만큼은 정보를 받지 않겠는가.
“에휴, 내가 뭐 정치 명문가랑 결혼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어렵지.”
“..... 결혼이요.”
라일라가 약간 뜸을 들이고 말했다.
“그래, 어머니가 좋은 혼처 알아보신다고 열심히 뛰고 계시지. 그래도 우리 집안에 돈이 있고, 명목상이지만 작위도 있으니 그럭저럭 괜찮은 가문과 혼담이 오갈 수 있을 거야.”
정식 귀족 가문은 좀 어렵고 아마 부르주아 중에서도 제법 상류층?
‘미국 쪽이라면 진짜 큰 부자 가문과 혼약을 맺을 수도 있긴 하겠지만 그쪽은 어머니가 신경도 안 쓰시겠지.’
미국은 아직 신대륙의 촌놈 나라일 뿐이다.
그리고 미국인들 스스로도 그걸 알고 있어서, 조만간 찾아올 도금 시대가 되면 어떻게든 유럽의 귀족과 혼약을 맺는 걸 바랐다.
그래서 유럽의 가난한 귀족가 영애가 벼락부자가 된 미국의 재벌집 아들에게 팔려가다시피 결혼하는 경우가 제법 있었던 것이다.
‘물론 도금 시대가 오려면 아직 남았고, 무엇보다 어머니는 많이 신실하신 것만 빼면 전형적인 프랑스 귀족이야, 집에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아무리 영지를 잃고 타향살이하는 신세라도 신대륙의 촌놈들 사이에서 며느리를 찾는 건 자존심이 허락 안 하겠지.’
마음 같아서는 백작급과 혼약을 맺고 싶어 하시겠지만, 아쉬운 입장이니만큼 남작급이나 의회의 의석이나 주지사 자리 정도를 꿰찬 유력 부르주아 집안을 알아보고 계시겠지.
“하지만 저번에 마음에 둔 여자에 대해 물어보시지 않으셨어요?”
“그건 그냥 하시는 소리야. 진심이 아니시지, 어머니는 원칙상 자기가 숙이는 게 맞는 상대가 아니라면 상대가 얼마나 강하든 간에 굽히느니 부러지는 인간상이신지라.”
한마디로 원칙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반드시 원칙을 택하고, 본인 생각에 불합리한 일에 굽히지 않는다는 거다.
“한 마디로 돈이 궁한 백작가와 영지를 새로 사줄 만큼 돈이 많은 평민 중에 택하라면 백작가를 택하실 분이시란 거지.”
“하지만 부르주아는 평민 아닌가요?”
“부르주아는 사실상 준귀족이니까. 어머니도 여기 영국에서 사신 게 몇십 년인데 부르주아가 귀족이나 다름없는 대접을 받는 거에 적응하셨겠지.”
사실 그래도 부르주아가 귀족보다 아래 취급을 받는 건 사실이지만, 영국의 부르주아는 유럽 대륙의 어지간한 남작이나 촌동네 백작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리고 영국의 남작들은 영 구질구질한 대륙 남작들과는 다르게 오히려 어지간한 대륙 백작급의 위세를 자랑했다.
영국과 유럽 대륙의 체계의 괴리가 빚어낸 현상이었다.
“기사 작위만 해도 유럽에서는 세습되는 게 상식이지만 여기서는 아니잖아, 그런 셈이지.”
“....... 그렇군요.”
기분 탓인가.
라일라의 목소리가 조금쯤 침울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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