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129)화 (129/129)

외전 4화

선두에 선 근위대가 구령에 맞춰 말 옆구리를 찼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열을 지은 근위대와 황제 내외가 탄 마차가 출발했다. 그 뒤로 서열이 높은 귀족의 마차와 근위대가 따라 움직였다.

궁 정문을 나서자마자 꽃잎이 휘날렸다.

광장을 가득 메운 인파가 황제의 결혼을 축하하며 각자 모아 온 꽃을 뿌렸다. 길이 온통 하얗고 붉은 꽃잎으로 가득했다.

에디스는 조금 당황스러워 보였다. 자신에 대한 관심이 이만한 줄 예상치 못했나 보다.

사람들이 황제를 보러 온 게 아니라 멋있고 자비로운 황후를 보러 온 것임을 클라이드는 알고 있었다. 제가 그녀에게 목매고 있는 만큼 다른 이도 그녀의 가치를 알아보는 게 당연했다.

“손 흔들어 줘.”

“아, 맞아.”

그녀가 하얀 장갑을 낀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길가에 늘어서 있던 시민들이 한꺼번에 와아, 하는 환호를 터뜨렸다. 뒷줄에서 앞으로 밀고 나오려 하는 바람에 열이 흐트러졌다. 경찰들은 넘쳐나는 인파를 통제하느라고 분주히 움직였다.

황궁 앞 광장이 제일 붐볐지만 그 이후로도 꾸준히 길가에 사람이 늘어서서 마차에 꽃을 뿌려 댔다. 이 도시에 사는 시민이 이렇게 많았던가 새삼 놀라울 지경이었다.

길이 제법 멀었다. 도시를 돌아 퍼레이드를 벌이는 게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시청을 지날 때까지는 미소 짓는 표정도 유지하고 손도 꾸준히 흔들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입가가 뻣뻣하게 굳었다.

클라이드는 구태여 애쓰지 않고 평소의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와 이따금 손만 흔들었다. 반면에 에디스는 억지로 뺨을 밀어 올리며 최선을 다했다. 푸들푸들 떨리는 눈가가 그에게 훤히 보였다.

“그렇게 힘들이지 않아도 돼.”

“사람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기가 영 쉽지 않네요.”

“어떻게 몇 시간 동안 웃기만 하겠어. 무리하지 말고 얼굴 풀어.”

“그래도요.”

코스를 거의 다 돌아 마지막으로 재래시장을 돌 때쯤에는 에디스의 얼굴이 인형처럼 변했다. 반달 모양의 눈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듯했고 얼굴색은 피로에 지쳐 창백하게 질렸다.

안쓰러움에 못 이겨 혀를 찬 그가 에디스의 볼을 가볍게 쥐었다.

“입꼬리 내리라니까.”

“거의 다 왔어요.”

그녀는 괜한 데서 승부욕에 불타는 듯했다.

황제의 마차 앞과 뒤에 길게 근위대가 호위하는 가운데, 선두를 달리는 기수는 벌써 황궁 앞 광장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클라이드는 제 옆의 굳은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서 시가행진이 끝나기를 바라는 한편으로 그녀가 고집 좀 꺾었으면 싶은 마음이 들었다.

참다못해 결국 창백하게 떨리는 뺨을 양손으로 감쌌다.

“앗.”

당황한 에디스가 움찔 어깨를 떨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잠깐만.”

고개를 제 쪽으로 돌리게 한 다음 눈가를 살금살금 만져 줬다. 굳은 턱도 풀어지도록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돌렸다.

그때 주변에서 커다란 함성이 터졌다.

도시의 어디에서도 만나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환호였다. 우와아아! 외치는 소리와 함께 휘파람과 박수 세례가 쏟아졌다.

시가행진을 시작할 때 광장에 있던 인파가 아직도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황궁으로 돌아가는 장면까지 구경하려고 기다린 눈치였다. 아까보다 도리어 불어난 게 아닌가 싶은 인원이 서로 어깨를 밀치며 황제의 마차를 보고 있었다.

길가에서 발을 구르는 아이들이 요란하게 외쳤다.

키스—

“클라이드, 이 손 좀.”

그녀가 울상이 된 입술을 삐죽거렸다.

남편이자 황제의 다정한 손길을 멋대로 뿌리치지 못한 채였다. 손 흔드는 것도 잊고 미소 짓던 표정도 버렸다. 클라이드의 손에 감긴 에디스의 아담한 뺨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위신을 지켜야 하는데.

황제로서의 위엄을 세워야 하는데 그녀가 너무나 꽃같이 어여뻤다.

어쩔 줄 모르고 주변을 흘끔거리는 눈동자도 곱고, 토라진 듯 톡 튀어나온 입 모양도 좋았다.

클라이드의 손끝이 그 입술을 훑었다.

“뭐 어때서 그래.”

“클라이드.”

“다들 바라고 있을 텐데. 무엇보다 내가 원하고.”

옆에 누가 지나가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의 시야는 에디스만으로 가득했다.

마구 흔들리는 눈동자가 이젠 저를 향했다. 손안으로 느껴지는 뺨의 따끈한 온도가 만족스러웠다.

클라이드는 마차 기둥을 장식한 휘장을 끌어당겼다. 반투명의 얇은 천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휘장 안에서 그는 에디스의 입술을 머금었다.

마차 옆을 지나치는 시민들이 얼마나 발을 구르며 난리 치는지도, 우레와 같은 환호가 하늘을 찌르는지도 듣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보드라운 감촉과 꽃내음 가득한 오메가 향기에 흠뻑 취했다.

입술을 붙였다가 떼고 동그란 눈망울을 들여다봤다.

그녀도 제게 몰두해 있음에 안도했다.

곧이어 어깨를 감싸면서 턱을 살며시 내렸다.

영혼까지 홀려 버리는 입맞춤의 순간이었다.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오로지 더 많은 스킨십과 교감만이 필요했다. 끌어안은 팔을 풀고 싶지 않았다.

다시 입술이 겹쳐질 때는 더 깊은 곳을 탐색했다. 그녀가 눈을 감는 걸 알아채며 휘장을 고쳐 썼다.

어느덧 황궁 벽돌 블록의 평평한 진동음과 함께 환호성이 등 뒤로 멀어졌다.

* * *

해가 진 저녁, 클라이드는 아까 오갔던 회랑을 다시 걸었다.

황제 궁에서 황후궁까지 가는 길이 멀지는 않아도, 이런 식이라면 상당한 에너지 낭비일 것 같았다. 에디스를 만나러 얼마나 자주 왕복하게 될지 떠올려 보니 이대로는 곤란할 듯싶었다.

그래도 황후의 지위는 지켜야 했다.

예전처럼 그녀를 제 방에서 살게 할 수는 없었다. 에디스가 황후궁을 차지하는 건 당연한 권리이다. 그곳을 더 잘 꾸며 줄 계획이 가득한데 황제궁으로 오라고 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내가 여기에서 살까?’

에디스를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영 안 되는 일만도 아니다. 소모적으로 오락가락하느니 한 군데에 정착하는 편이 낫겠지.

연을 맺은 첫날이니만큼 황후에 침실 앞에서 시종을 시켜 정중히 고했다. 그다음에는 곧장 사람들을 물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방에 그녀가 없었다.

없다.

순간 클라이드는 심장이 철렁했다. 무작정 놀라면 안 된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마음이 따르지 못했다.

만에 하나 그녀가 별 너머로 돌아가더라도 다른 영혼의 에디스가 돌아올 테니, 사람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덜컥거리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에디스?”

자신의 음성이 공포에 질려 있지 않길 빌며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우선 차분히 찾아봐야지. 스스로 진정하려고 애쓰며 창백해진 턱을 당겼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허둥거리다가 에디스와 만나게 되면 한심한 꼴을 보이게 될 거다. 몸에서 피가 싹 빠져나가는 기분을 애써 누르며 평상시처럼 움직였다.

침대 휘장을 들춰 보고, 파티션 너머도 기웃거려 봤다.

순서대로 방을 돌아 문 열린 발코니로 향했다.

절반쯤 가려진 커튼이 밤바람을 받아 살랑거렸다. 만월에 가까운 달의 빛이 테라스 대리석을 우윳빛으로 물들였다.

커튼 너머로 하늘거리는 백금발 머리칼을 발견했다.

“에디스, 거기 있었군.”

당황했던 기분을 그녀에게 들키지 않았던 것에 안도하며, 클라이드는 커튼을 젖히고 성큼 바깥으로 나섰다.

다음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멈춰서서 발끝을 세웠다.

에디스는 잠들어 있었다.

난간에 팔을 걸치고 제법 안정적인 자세로 엎드린 채였다. 실내에서 끌어온 듯한 의자는 쿠션이 푹신해서 테라스 전용의 딱딱한 철제 의자보다 편해 보였다.

살금살금 다가간 그는 조용히 허리를 숙였다.

고른 숨소리가 평화롭게 들렸다. 낮의 일상을 전투적으로 해내는 에디스는 밤에도 늘 숙면을 취하곤 했다.

“잘 자니까 예쁘다.”

달빛을 받아 그녀의 머리칼이 후광처럼 밝은 테두리를 만들었다.

깨지 않도록 한 가닥만 살짝 손에 쥐었다. 씻고 나서 약간 물기가 남은 머리칼이 그의 손가락에 부드럽게 휘감겼다.

오늘은 특히 피곤했겠지.

새벽부터 단장하느라 장시간 고생하고, 식을 올린 후에는 연회에까지 참석해야 했다.

자신이 입었던 황제의 예복도 묵직하고 거북했지만, 그런 불평을 도저히 할 수 없을 만큼 황후의 예복은 어마어마하게 무거웠다. 그런 복장으로 종일 이어지는 행사에 자리를 지켜야 했으니 지치는 게 당연하다.

그녀가 원하는 스몰 웨딩을 할 걸 그랬나. 결혼식을 준비하는 동안 종종 후회했는데, 이렇게 곤히 자는 모습을 보니 역시 자신의 욕심이 너무 컸던 듯했다.

실눈을 뜬 그녀가 저를 말갛게 바라봤다.

“클라이드.”

목이 멜 것 같아 침부터 삼켰다.

“힘들었지?”

부스스 일어나는 사랑스러운 얼굴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일생 한 번 하는 건데요, 뭐.”

“이만 쉬자. 네 눈에 졸음이 막 떨어지네.”

클라이드는 가뿐하게 그녀를 안아 들었다. 먹는 건 다 어디로 가나 싶게 가벼운 체중으로 에디스가 느른하게 몸을 맡겨 왔다.

조심히 침대에 눕힐 때, 생동감 있는 은방울꽃 내음이 풍겼다.

에디스의 오메가 향이었다.

분위기에 취해 저절로 흘리는 듯했다. 아무런 내색도 없이 그녀가 클라이드의 손가락 하나를 아기처럼 쥐며 눈을 감았다.

저도 알파 페로몬을 조금씩 뿜어 화답했다.

그녀를 자극하지 않을 만큼만.

“으응……. 이렇게 자 버리면 안 되는데.”

꼬물거리며 파고드는 에디스를 반겨 안았다.

오늘은 얌전히 재우지만,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우리의 2세를 만들 계획에 착수해야지. 오메가 페로몬을 맡고도 욕망을 견디는 건 이번뿐이 될 거다.

“내일을 기대해.”

내일, 또 그다음 내일을 계속 기대한다.

외전 완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