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128)화 (128/129)

외전 3화

“에디스.”

절반쯤 돌아 버린 클라이드는 그녀 외에 뵈는 게 없었다. 시간이 다 되어 조급하게 인기척을 내는 시종이라든가, 그레이트 홀에서 기다릴 수천 명의 하객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의 목덜미를 세게 당기며 게게 풀린 눈으로 헛소리를 지껄였다.

“내 황후님. 우리 그만 침실로 갈까?”

정오의 환한 햇살이 비치는 다이닝 룸에서 그는 홀로 몸 아래쪽의 욕구를 이기지 못했다. 그녀에게 몸을 비벼 댔다. 알파 페로몬을 의식적으로 흘리며 그녀가 제게 넘어오기를 바랐다.

“하.”

여린 탄식이 듣기 좋았다.

“우리 어제 따로 잤잖아. 너무 심했어.”

법도에 따른다면 황실에서 아내와 남편 될 자는 몇 달간 만나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걸 줄이고 줄여 하루로 정했다. 역사가와 관습론자의 거센 반발에 못 이겨 지난밤은 에디스와 따로 자야 했다.

물론 한숨도 못 잤다. 황후궁에 깃들어 있을 에디스를 그리며 창밖만 내다봤다. 그런 자신이 전혀 한심하지 않았다. 너무 당연한 행동이었다.

“응? 에디스.”

“하객들은 어쩌고요.”

“저희끼리 알아서 즐기겠지. 오늘만 결혼인가. 앞으로 엿새나 남았으니 하례는 천천히 받아도 돼.”

고개를 숙인 그녀가 클라이드의 가슴에 간지러운 웃음 바람을 흘렸다.

에디스는 싫다 하지 않았다. 화장이 예복에 묻을까 봐 조심할 뿐, 보드랍게 자신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기분 좋게. 가슴이 마구 뛰게…….

“나도 그러고 싶어요.”

은은하게 오메가 향이 풍겼다.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저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향이었다.

진심으로 당장 그녀를 안고 싶지만.

“밤까지는 왜 이렇게 한참 남았지?”

폐부를 모조리 꺼낼 만큼 깊은 탄식을 흘리며 그녀를 놓아줘야 했다.

잠시 후, 여상하게 고개를 내리는 에디스에게서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겉으로는 아무 차이가 없고 막연한 느낌일 뿐이었다.

그래서 일단은 모르는 척했다.

그녀는 음료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분위기도 똑같았고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뭐가 자신의 육감을 건드린 건지 되새겨 봐도,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왜?”

클라이드는 빤히 그녀를 쳐다보다가 툭 던지듯 물었다.

“뭐가 왜예요?”

“에디스, 지금 뭐 있지?”

에디스가 동그란 눈매를 이리저리 굴렸다. 황당해하며 입술을 작게 오므렸다.

저러다가 작두 타겠네. 이해하지 못할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그녀는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어떻게 알았어요? 진짜 용해요.”

“그냥 육감이야.”

“그런 육감이 생길 수 있다니, 완전 신기해.”

아까 본 주사위가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꼼지락거리면서, 뭘 궁리하는 건지 얼굴을 잠깐 굳혔다.

점쟁이처럼 맞히는 건 자신 없는데, 에디스는 이번에도 비슷한 시도를 하려는 듯했다.

“한번 맞혀 볼래요?”

종달새처럼 지저귀며 양손을 모으고 그 속으로 주사위를 흔들었다.

“실망할 텐데.”

“이번엔 아닐걸요.”

그녀가 맑게 웃었다. 무슨 근거에 의해서인지 왠지 자신 있는 말투였다.

“눈 감아 봐요.”

“응.”

“아냐, 뒤돌아 있어요.”

“안 봐. 절대로.”

“그래도요. 얼른 고개 돌려요.”

클라이드는 내심 그녀의 바람대로 주사위를 맞히고 싶었다.

잠깐의 여유를 틈타 이런 놀이를 하는 순간 자체가 가슴 벅찬데, 거기에 정답까지 맞히면 에디스가 더 좋아하지 않을까.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린 채 잠시 기다렸다. 귀 뒤에서 사각거리며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됐어요.”

에디스를 중심으로 펼쳐진 시야에 주먹 두 개가 다가왔다. 기대감을 한껏 품은 눈동자가 그 뒤로 반짝였다.

“주사위가 어느 손에 있을까요?”

“이것도 카드 맞히기와 다를 게 없잖아.”

“글쎄 맞혀 봐요.”

“음…….”

겉으로 봐서는 당최 어디에 주사위가 숨겨져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순전히 감에 의지해 하나를 골랐다.

“왼손?”

에디스가 왼쪽 손을 펼쳤다. 주사위가 손바닥 위에서 떼구루루 굴렀다.

“운이 좋았네.”

“한 번 더 해요. 어느 손?”

“이번에는 오른손.”

“정답.”

연속 두 번을 맞힌 게 의심스러운지 그녀는 눈꼬리를 세우고 흘겨봤다. 다음에는 등 뒤로 주사위를 접었다. 손을 보여 주지도 않고 ‘어느 손?’을 외쳤다.

“오른손.”

“와, 굉장해.”

열 번쯤 접어서 한 번 틀렸다. 이쯤 되자 클라이드도 자신의 능력을 다시 보게 됐다.

“왜 이렇게 잘 맞히지? 놀라운걸.”

“이건 랜덤이 아니라 내 손으로 쥐는 거니까요.”

“에디스의 손?”

“어느 손에 쥘지 결정을 내가 하잖아요. 무작위 카드와는 다르죠.”

“그래서 잘 맞히는 건가.”

에디스의 의지에 따른 거라서 주사위를 든 손을 확률 높게 맞힐 수 있는 걸까. 잘할 수 있을 거라던 그녀의 추측이 딱 들어맞았다.

“자, 마지막으로 가요. 이번엔 어느 손?”

비장한 말투와 함께 에디스가 두 주먹을 내밀었다.

클라이드는 자그마한 주먹을 흐뭇한 눈으로 응시했다. 어느 쪽을 고를까. 기필코 맞혀서 그녀를 기쁘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마음이 흐르는 곳이 없었다. 양쪽 다 그저 그랬다.

“안 고르고 싶은걸.”

“왜요?”

“잘 모르겠어.”

제 턱을 긁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아무거나 골라도 되는 놀이에 불과했고, 틀려도 괜찮은 건데.

기대에 찬 눈빛을 반짝이는 에디스를 위해서라면 어느 것 하나를 골라야 했다. 하지만 왠지 느낌이 이전과는 달랐다.

“둘 다 아닌 것 같아.”

“…….”

“여기에 주사위가 없는 것 같아.”

“우와, 우와, 우와!”

놀란 에디스의 입이 우물처럼 벌어졌다.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쩍 벌어진 제 입을 손으로 막았다.

펼친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에 숨겼는데. 진짜 대박.”

주사위는 그녀의 등 뒤에서 나왔다. 뒤로 손을 돌려 접는 동안 슬쩍 숨긴 모양이었다. 에디스는 거의 방방 뛰다시피 하며 흥분했고, 그 역시 상당히 놀랐다.

“클라이드 대단해요.”

“생각보다 더 내 육감이 강한 모양이야.”

“멋져. 마법 같아요. 나중에는 정말 마법도 쓰게 될까요?”

상상으로만 가능한 발상에 클라이드는 툭, 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가.”

에디스는 되는대로 얘기를 지어냈다. 동화 속에서 나올 법한 장면을 끄집어내어 명랑하게 떠들어 댔다. 상큼한 입술과 약간 흥분한 뺨이 보기 좋았다.

“어마어마한 인력이 작용해서 클라이드의 몸에서 마력이 막 뿜어져 나오는 거죠. 별을 이기는 힘이 알고 보니까 당신 속에 숨겨져 있었던 거야. 그게 나를 만나서 각성하고……. 으응, 그다음에는…….”

쫑알쫑알 읊어 대는 그녀의 목소리를 영원히 가질 수만 있다면, 마법사뿐만 아니라 뭐든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 *

오후의 행사는 시가행진이었다.

라그란드 제국 전체를 통틀어 황제의 결혼에 맞는 시혜가 있었다. 성 단위로 대규모 물자가 내려졌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황후를 맞이하는 축복을 내렸다. 작은 마을까지도 이 소식이 전해질 수 있도록 철저히 안배했다.

수도 글레스터 시도 마찬가지였다. 부유한 상공인이든 가난한 일용직 노동자든 모두가 황제가 내린 음식을 받아먹고 선물을 챙겼다.

황제와 황후를 보기를 열망하는 목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그 염원을 모른 척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기대에 부응해 대대적인 거리 퍼레이드를 기획했다.

이것도 에디스에게 왈라왈라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음식 나눔 행사라면 몰라도 영양가 없는 전시행정은 생략하자는 얘기였다. 우기고 우겨 시가행진을 확정 지으면서도 클라이드는 유능한 황후를 끝내주게 잘 맞이했다는 생각을 했다.

몸단장을 새로이 한 에디스를 황후궁 앞에서 맞이했다.

그는 사방이 트인 거대한 퍼레이드 마차에서 내려 그녀의 손을 잡았다.

“더 예뻐졌네.”

“아까랑 똑같은데요.”

“입술 색이 달라졌고, 관을 다시 썼군. 멀리서 선명하게 보이도록 눈매로 강조했나?”

“와, 눈썰미.”

키득거리는 에디스의 웃음을 아무도 듣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마음 같아선 시가행진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점심 식사에서 에디스에게 지면 안 되는 거였는데, 왜 마음이 약해져선.

낮을 밤으로 바꾸면 이딴 행사를 거치지 않고 그녀를 안을 수 있을까.

언제나 제 편이지 않았던 별과 우주는 이런 마음을 받아들여 줄 턱이 없겠지.

“갈까?”

꽃으로 가득한 마차에 에디스를 고이 모셨다.

훨씬 싱그러운 미소를 짓는 그녀를 넋 놓고 바라봤다. 에디스가 그의 코끝을 톡톡 두드릴 때까지.

“어느 코스로 돌지 이젠 좀 알고 싶어요.”

혼례 절차를 되도록 알리지 않은 덕분에 그녀는 행렬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다. 이제야 알려 주는 기분이 왠지 승리자처럼 뿌듯했다.

“황궁 정문에서부터 시청까지.”

“호오, 적당하네요.”

“그리고 시청에서 다시 단풍나무 거리를 거쳐, 대지의 언덕을 올랐다가 꼭대기를 넘어 서부 빈민촌까지. 그리고 빙 돌아서 북쪽의 깊은 호숫가도 들러야 해.”

“자, 잠깐.”

“긴장하지 마. 거기가 끝이야. 깊은 호숫가에서 재래시장을 돌아 황궁으로 돌아올 거니까.”

싸한 눈초리로 흘기는 에디스를 못 본 척했다.

클라이드는 황제 내외를 영접하기를 원하는 도시의 각 구역으로부터 강한 탄원을 받았다. 이리 정리하고 저리 추려 내어 남긴 코스가 이 정도였다. 여기까지가 제 한계였다.

시가행진을 준비하며 새삼스럽게 에디스의 인기를 깨닫기도 했다. 도시의 서민에게는 황제보다 황후가 더 주목받는 게 아닐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가 기껍다가도, 에디스가 너무 무거운 짐을 질까 봐 걱정됐다.

작게 한숨을 흘리는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이제 와 코스를 변경할 수는 없겠죠?”

“당연히 안 되지. 시민들이 죄다 나와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하아…….”

너무 사랑스러워서, 근위대와 몇몇 하객이 지켜보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출 뻔했다. 고개를 내리려다가 그녀의 식겁한 표정을 보고 간신히 멈췄다.

“클라이드.”

“아무도 안 봤어.”

흐뭇하게 눈을 접는 여러 주변인을 에디스가 보지 못하도록 제 어깨로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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