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125)화 (125/129)

125화

그런데 모두가 떠나가지는 않았다.

한 명만은 발을 땅바닥에 붙이고 나무토막처럼 버티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발소리가 잦아들고 근위병이 접견실 문을 닫았다. 황녀 레테이시아는 의외로 의젓했다.

“폐하, 청컨대 주변을 물려 주시길 바랍니다.”

클라이드가 손을 뿌리치자 다들 물러났다. 에디스만은 남아 있었지만 황녀는 담담한 태도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셋이 남은 자리.

갑작스럽게 레테이시아 황녀의 표정이 바뀌었다. 도도하게 치켜들었던 턱을 내리고 패배 의식에 사로잡힌 듯 바들바들 떨던 주먹도 풀었다.

“폐하.”

사석에서 만난 사이처럼 그를 부르자 음성까지 훨씬 온유해졌다.

“이제야 제 임무를 마친 것 같습니다. 그동안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임무? 시끄럽게 여론을 만든 게 임무라고? 케츠모리스 경에게 위선자의 굴레를 씌우면서?”

“저도 원치는 않았습니다만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네요.”

편안하게 웃는 황녀의 모습이 색달랐다.

“두 분의 결혼을 미리 축하합니다. 저는 결혼식에 초대되지 못하겠지만, 자손이 번성할 라그란드 황실을 마음 깊이 기원합니다.”

“갑자기 왜 이렇게 다르게 구는가?”

“애초부터 전 두 분이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하지만 체르헨을 대표한 처지로는 해야 할 일이 많았지요.”

“…….”

“폐하와 약간이라도 염문을 뿌리면 제일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야 본국으로 돌아갔을 때 제가 힘을 얻을 수 있거든요. 염문이 안 되면 친한 사이라도, 그것도 안 되면 제가 짝사랑해서 쫓아다녔다는 이야기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흠, 그래서?”

“결국 짝사랑의 시나리오가 될 수밖에 없겠네요. 돌아가기 전까지 그렇게 여론을 조성하겠습니다. 저한테 필요해서 조작한 것이긴 하지만, 양국 관계를 볼 때도 황족끼리 서로 친밀하다고 알려지면 좋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도 손해 보는 건 없으시지요.”

“맞는 말이군. 하지만 나는 그다지 조작이 필요가 없었다.”

“네, 저한테만 절실하죠.”

레테이시아 황녀가 스커트 자락을 잡았다. 무릎을 깊이 굽히고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무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제가 폐하와의 친분을 빌미로 황태자 자리를 넘겨받는다면, 이 빚은 톡톡히 갚겠습니다. 더불어 체르헨과 라그란드의 평화도 저와 폐하의 치세 기간만큼 길게 유지되리라고 장담합니다.”

“황녀는 지나치게 제멋대로군. 내 결혼에 흙탕물을 튀기고 케츠모리스 경의 명예까지 더럽히고선, 그따위로 보장도 하지 못할 소리를 남발하는가.”

“거듭 사죄드립니다만, 이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계책이었습니다. 부끄럽게도 체르헨은 이 나라만큼 건실하지 못합니다. 부황 폐하와 오라버니 황태자, 외척들……. 알력 싸움에 나라가 휘청일 지경입니다.”

황녀가 고개를 내리며 호소했다.

“저도 후계 싸움에 발을 들인 처지로서 자괴감을 안고 있습니다. 제 능력으로 당당하게 차기 황위를 노릴 쾌적한 환경이 아니거든요.”

“체르헨 황실의 치부를 모르지는 않지만, 그대의 입으로 직접 듣기는 불편하다.”

“오죽하면 이런 못난 짓까지 했겠습니까. 순전히 제 목적을 위해서였지만 폐하께 송구할 따름입니다.”

체르헨의 황태자는 큰아들이었다. 하지만 황실에서의 인기는 레테이시아가 더 높았다. 클라이드가 정보를 입수하기로도 황태자보다 황녀가 훨씬 영민하고 정치적 능력이 출중했다.

“흠……. 그래서?”

“귀국 후 저는 분명히 지명도가 많이 올라갈 겁니다. 라그란드 황제와 친분이 깊다는 건 아주 중요한 장점이거든요. 이 기회를 살려 황위를 이어받는다면, 라그란드의 우방으로서 성실히 역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그다지 그대가 체르헨 차기 황제가 되길 바라지도 않는다. 오히려 기회주의적인 행동이 거슬리기만 하지.”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조만간 심사숙고해서 폐하의 심기를 풀어 드릴 만한 조건을 내어놓겠습니다.”

용서를 구하며 황녀는 무릎이 바닥에 닿도록 깊이 숙였다.

“또한, 제 아버지가 폐하의 결혼과 관련해서 불편한 사태를 만들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마 아버지는 계속 이의를 제기하고 싶으시겠지만, 제가 이번 접견을 설명하면서 막아 보려고 합니다.”

체르헨 황제는 이번에 결혼 증명서 사본을 클라이드가 아닌 레테이시아 황녀에게 보냈다.

그 속셈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제 나라 땅덩어리를 먹어 버린 클라이드를 어떻게든 흠집 잡고 싶을 테지. 그걸 황녀가 막아 준다면 아마도 제법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묵묵히 듣고만 있던 에디스가 오랜 침묵을 깼다.

“저와 관련해서는 황녀의 입장을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예정된 결혼에 대해서는 매우 불쾌하군요.”

“경에게도 심심한 양해를 구하고 싶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이제 와서 황녀님께 좋은 낯을 보이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내가 저지른 건 수습하겠네.”

에디스는 괜찮다는 겸양의 말을 끝내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와 어쩌겠는가. 이미 지나간 일인걸. 황녀가 순순히 물러나겠다고 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처음부터 황녀의 인상이 범상치 않아 보이더라니. 에디스조차도 깜빡 속아 버렸다.

클라이드가 에디스의 손을 끌어다가 잡았다. 늘 하던 행동이었다. 그러면서 시선은 서늘하게 황녀를 노려봤다.

“그대에게 할 일이 남았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맞습니다, 폐하. 제가 귀국하면 아마 다시는 폐하를 뵐 수 없을 듯한데, 있을 때 최대한 친선을 맺어 둬야지요. 즐거운 경험이라고 하긴 어려워도 양국 간의 미래에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라그란드에는 그다지 필요 없는 친선이라고 그가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황녀는 여전히 친해지려는 뜻을 담은 미소를 지었다.

“돌아가는 날까지 저는 폐하를 짝사랑하다가 실패한 척 행동하겠습니다.”

“이제부턴 에디스한테 만들어졌던 악소문을 모두 거둬들이는 거겠지?”

“물론이지요. 그리고 먼 훗날 제가 체르헨의 황좌에 오른다면 이번 일을 종종 떠들겠습니다. 라그란드 황제를 마음에 뒀다가 차인 적이 있다는 식으로 재미나게요. 어떻습니까. 폐하께도 나쁘지 않지요?”

“그대는 독특한 방식으로 친분을 과시하는군.”

“저도 두 분 사이에 끼어들 마음은 없거든요.”

황녀는 물러가기 전의 인사도 지극히 정중했다. 마지막으로 에디스와 눈길을 마주치더니, 사과하려는 듯 턱을 조금 내렸다.

* * *

“이걸 화를 낼 수도 없고.”

에디스가 이마를 짚었다.

“화내도 돼. 황녀가 에디스를 이용해 먹은 거잖아. 후계 경쟁에 유리해지려고 말이야.”

“하지만 먼 미래를 내다봐야지요. 황녀가 나중에 체르헨 황제가 될 때를 위해 얼굴 붉히는 일은 없어야 하잖아요. 게다가 머지않아 돌아갈 사람인데.”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감싼 클라이드가 위로하듯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총으로 저격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큰소리 내면서 성질부리면 뭐 어때서?”

“그건 좀.”

“아까는 네가 너무 물렀어. 더 세게 나가도 돼.”

“기분을 드러내기가 조심스러워서요.”

황녀 앞에서 에디스는 불쾌했다는 말 한마디만으로 끝냈다. 나머지는 마음에 쌓아 둔 채 넘어갔다. 각자의 위신을 해치지 않고 양국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클라이드는 둘만 남은 접견실의 창을 열었다. 산들바람이 불어와 피부에 기분 좋게 착 감겼다.

바깥을 내다보니 접견을 마친 사람들이 아직 궁 근처에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거나 가까운 정원을 걷는 이가 많았다.

“에디스, 너는 이제 황후야.”

“……그렇죠.”

“저 사람들 위에 서야 하는 거라고. 절대 너를 낮추면 안 돼. 얕보여서도 안 되고.”

“얕보이지 않도록 할게요.”

“분노해야 할 때는 터뜨리는 게 좋아. 심지어 별로 화나지 않을 때라도 말이지. 그래야 아랫사람이 널 알아모셔.”

아직은 레테이시아 황녀가 윗사람이다. 하지만 조만간 식을 치르면 에디스가 더 높은 지위에 오른다.

자신보다 낮은 사람에게 이용당하면 안 되겠지. 만만하게 보여서도 곤란하고.

“나 화내는 거 잘 못 하는데.”

“그러니까 걱정돼서 하는 말이잖아. 세게 못 나갈까 봐.”

“알았어요. 세게 말하는 연습을 좀 해야겠네요.”

그녀의 콧잔등에 살가운 감촉의 손가락이 톡 닿았다. 동그란 코끝을 살랑거리는 움직임으로 건드렸다.

간지러워서 얼굴을 찡긋거리자 클라이드는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멍하니 바라봤다.

다감한 손길은 뺨으로 흘렀다. 완만한 선을 그리며 느릿느릿 쓸어내리는 스킨십과 함께 그의 고개가 차츰 아래로 내려왔다.

“나한테 연습해 봐.”

“네?”

“한번 해 봐. 나한테 기분 나빴던 거 떠올리면서 화내.”

그녀의 입 끄트머리에 몰랑한 입술이 눌렸다. 가까이에서 본 클라이드의 표정이 재미있게 변화하고 있었다. 길게 내려온 속눈썹 사이에서 황금안이 반짝거렸다.

“화내 봐.”

기대하는 게 분명했다. 재촉과 함께 그가 에디스의 턱 끝을 살며시 만졌다.

“갑자기 화는 안 나는데요.”

“어떤 때는 일부러 분위기 잡는 행동도 필요해. 에디스. 해 줘.”

기가 막혀. 에디스는 푸훗, 웃음을 터뜨렸다.

“별걸 다 해 달래. 나 화내는 거 보고 싶어요?”

“응.”

“왜요?”

“여태껏 본 적 없잖아. 갑자기 보고 싶어졌어. 네가 화내는 얼굴을 상상하니까 더 보고 싶네.”

채근하느라고 그가 에디스의 어깨에 두른 손을 살살 흔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입맞춤하는 클라이드의 얼굴에 대고 느닷없이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연기를 하려 해도 분위기가 잡혀야 말이지.

개구쟁이처럼 휜 눈꼬리는 끝내주게 잘생겼고 에디스에게 닿았다가 떨어진 입술은 주름이 거의 없이 팽팽했다. 얼른 해 보라며 턱에서 까딱이는 손가락마저 조각품처럼 가닥가닥 길었다.

“생각났어. 나 화나는 거 있어요.”

에디스는 열심히 눈썹에 힘을 줬다.

“뭔데?”

노력 중인데 클라이드는 왜 웃는 거야. 저기요, 협조 좀요.

그런데 화를 내려면 이렇게 끌어안고 쫍쫍거리는 도중에 성질을 부릴 수가 없다.

그녀는 자신에게 깊이 숨겨져 있던 배우로서의 재능을 끌어올려 설정을 짜 봤다. 구체적으로 연기에 도전한 경험이라면 유치원 때의 유령 놀이가 있다. 유령이 되어 본 적도 있으니 화내는 것도 가능하겠지.

클라이드를 퍽 밀쳤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그가 어깨를 휘청였다.

에디스는 반걸음 물러나며 턱을 치켜들었다. 한참 위를 올려다봐야 하니 눈동자는 저절로 삼백안이 되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분위기가 잡힐까? 아, 팔짱을 끼자.

자신의 양팔을 엇갈려 방어적인 자세를 취한 다음, 말머리를 고르고 골랐다. 화내려면 세게 나가야지. 따라서 말투도 세게.

“야, 클라이드.”

쿨럭…….

클라이드가 사레들렸다.

주먹으로 입을 막고 한참이나 기침을 터뜨렸다. 콜록거릴 때마다 얼굴을 찡그리는데 왜 눈가는 웃고 있는 것 같지?

“응, 뭣 때문에 내 에디스가 기분 나빴을까?”

얼굴이 조금 붉어진 그가 고개를 들었다.

“나 말야. 아침 일찍 일어나는 거 싫어.”

입 밖으로 꺼내고 나니 철없는 어린애의 어리광 같았다.

클라이드가 치아를 꽉 깨무는 티가 났다. 입술도 유난히 단단히 다물렸다. 웃지 마. 웃지 말라고.

하지만 이건 자신이 오랫동안 품어 온 불만이었다. 아침잠은 되도록 넉넉히, 하루 일과에 지장이 없는 수준에서 최대한 늦게까지 자야 정상이 아닌가. 동이 틀 무렵부터 부산을 떠는 성실 황태자, 지금은 성실 황제가 된 그의 생활 패턴은 자신과 맞지 않다.

“나 원래 잠이 많아.”

“알고 있어.”

“게다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스타일이야. 늦잠 자고 싶어!”

마음속의 분노를 끌어모아 으르렁거렸다. 제 나름으로는 포효를 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큰소리 내는 것도 해 본 사람이나 잘하지 에디스한테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자그마하게 종알거리면 잘 어울리는 음성을 크게 돋우니 앵알앵알 소리가 떨렸다. 결정적으로 별로 위협적이지 못했다.

126화(完)

화내는 연습을 정말로 하긴 해야겠네. 황녀의 경우처럼 나중에 저를 이용하려는 자가 나타났을 때 무르게 넘어가면 안 되잖아.

그에게 세게 보이려고 애쓰며 절정의 연기를 펼쳤다.

“클라이드, 앞으로는 나 깨우지 마. 알았어?”

“응, 미안.”

너무 수월하게 대꾸해서 도리어 깜짝 놀랐다. 매일 아침 건강이 어쩌니저쩌니 떠들어 대며 필사적으로 에디스를 운동시키는 사람이 웬일이래.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흘겨봤다.

“진짜지?”

그가 그녀의 직각으로 꺾인 팔꿈치를 슬금슬금 만졌다. 연기하는 자세가 재미있나 보다. 기어코 클라이드의 입에서 크큭, 작은 웃음이 터졌다.

“시간을 옮기지 뭐. 어렵지 않아.”

“언제로?”

“네가 골라.”

“그럼 저녁밥 먹은 후……는 안 되겠고.”

이 세계는 깜깜하면 운동을 못 한다. 야외 승마장과 사격장을 환히 비추는 조명 따위는 없으니까.

“오후.”

가장 업무를 활발히 할 시간이 오후다. 하루하루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사를 돌봐야 하고, 쇄도하는 접견 신청을 고르고 골라 대신들도 만나야 한다.

“……도 안 되겠구나. 그러면 오전……은 국정 회의가 있고 점심나절……에는 집무실.”

팔짱 낀 에디스의 손목이 꿈틀거렸다. 속으로는 망했다는 생각만 했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것을. 빡빡하게 돌아가는 황제의 일상에서 몸 관리에 시간을 쪼개려면 새벽밖에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에디스가 잘 알았다.

“차라리 게으르게 살래.”

“그럴까? 난 상관없어. 같이 늦잠 자지 뭐.”

“그, 그럴까?”

“느긋하게 일어나서 꼭 필요한 국사만 처리하는 여유로운 삶. 나도 그런 걸 꿈꿔 왔어.”

문득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이른 나이에 큰 업적을 다 이루고 여유롭게 나라를 다스리는 클라이드와 자신을.

삼시 세끼 풍성하게 차려 먹는 건 원래 황족의 습성이다. 아침부터 스테이크가 등장한다. 한 끼 식사에 두 시간씩 걸리고 사이사이 티 타임도 아주 길다.

먹고 노는 데 지치면 가끔 서류를 훑어보고 마지막 장에 사인한다. 제국은 안정되어서 누구도 게으른 황제 내외를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도리어 태평성대를 찬양하기에 바쁘다.

그렇게 십 년이 흐른다면?

클라이드는 후덕한 체격이 되어 버리겠지. 자신도 오동통한 아줌마로 바뀔 수밖에.

살찌는 건 세월에 따라 받아들여야 할 부분도 있겠지만, 그러다가 지병이라도 얻으면 어쩌지?

황제는 단명했던 경우가 정말 많다.

보통들 일찌감치 병에 걸려 죽곤 한다. 그 병의 대부분이 먹기만 하고 몸은 움직이지 않으며 스트레스를 만빵 받아서 생기는 거다. 바로 성인병.

“안 돼!”

“왜 안 돼? 이미 공언한 적도 있잖아. 2년간은 무조건 놀겠다고.”

“나는 클라이드를 먼저 떠나보낼 수 없어.”

“뭔 소리야. 내가 어딜 가?”

“하여튼 안 돼. 넌 장수해야 해.”

더 이상 참지 못한 클라이드가 성큼 다가왔다. 그물을 던지는 어부처럼 냅다 두 팔을 벌려 덮치려 했다.

하지만 아직 화내기 연습은 끝나지 않았다.

에디스가 그의 겨드랑이 아래로 쏙 빠져나갔다. 거의 다 도망가기 직전, 재빠른 추격에 붙잡혔다. 클라이드가 허리를 붙잡아 번쩍 들자 그녀의 발끝이 커다란 구두 위에서 대롱대롱 흔들렸다.

“넌 내가 일찍 죽을까 봐 되게 겁나나 봐?”

“겁나고말고.”

“이렇게 튼튼한데도?”

힘이 넘치는 팔뚝으로 그녀를 훨씬 높이 들었다. 훌렁 들었다가 받아 낸 다음에도 바닥에 내려놓지 않았다.

“그래도 겁나. 넌 흉터도 많잖아. 젊을 때 고생하면 늙어서 티가 난대. 골병든다더라.”

“흉터는 에디스도 있지. 그거 보고 내가 얼마나 기겁했는지.”

“난 하나뿐인걸.”

“나중에 총상 후유증이 어떻게 올지 너무 걱정돼.”

“말 돌리지 말고. 넌 꼭 오래 살아야 한다니까. 내가 먼저 죽을 때 옆에서 손 붙잡아 주는 사람이 너였으면 좋겠어.”

클라이드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휘어 올라간 입가에 환희가 가득했다. 그 속에는 에디스를 향한 열정도 넉넉히 담겨 있었다.

“약속해.”

“나 농담 아님.”

“응, 진심이라는 거 알아. 기필코 너보다 오래 살게.”

에디스가 내려 달라는 표시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허리를 받친 팔은 풀리지 않고 대신에 다른 데로 옮겨졌다.

황좌 앞에 이르러 그녀의 키가 훌쩍 커졌다. 앗, 하는 사이에 높이 들려서 의자 쿠션에 올라섰다.

반질반질한 구두가 진한 적색의 벨벳 의자 쿠션을 밟았다. 실내에서만 조금 신은 새 구두라서 더러움이 묻지는 않았지만, 황좌에 올라섰다는 상황 자체가 굉장히 특별했다.

그런데 정작 황좌의 주인은 아무 감흥이 없었다.

한참 높이에 선 그녀를 올려다보며 감정의 포만감을 가득 내뿜었다.

“하지만 에디스, 너 혼자 두고 새벽에 나다닐 수는 없어.”

에디스는 뜨끔했다. 마침 그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그렇게는 안 되나?”

“우리는 같이 있어야 하잖아. 별이 아직 멀어지지 않았어. 할 수 있는 한 인력을 많이 만들어야 해.”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클라이드는 심각한 분리불안 증세를 보이는 중이고, 자신도 역시 늘 마음 한구석에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별 너머로 돌아가게 될까 봐 걱정이었다.

시간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과제를 안고 우리는 치열하게 사랑해야 한다. 그것만이 이곳에 남을 유일한 길이다.

클라이드에게 혼자 다니라고 권하지 못했다.

그래 봤자 소용없을 것이다. 제 곁에서 잠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을 테지.

고개를 치켜든 그에게서 이마가 훤칠하게 드러났다. 에디스는 결이 좋은 머리칼을 손끝으로 살그머니 매만졌다.

그가 뿌듯하게 입술을 좌우로 늘렸다.

“늦잠 자면서도 오래 살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

“어떻게?”

“정신력으로.”

말도 안 돼. 정신력으로 성인병도 이기고 암도 극복하면서 백 살까지 살 건가? 그게 쉽게 되면 세상에 아플 사람 하나도 없겠네.

에디스는 짙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안 될 줄 알면서도 그냥 한번 덤볐던 거다. 일과를 빠삭하게 꿰는 자신이 모를 수 없는 부분이었다. 황제 내외가 복부 비만이 되지 않을 유일한 방법은 새벽을 활용하는 것뿐이다.

“클라이드, 너.”

“응.”

“사람 꼼짝 못 하게 하는 재주 있는 거 알지?”

“글쎄 잘.”

클라이드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신하에게는 엄한 군주의 모습을 보이지만 에디스에게만은 늘 나긋나긋하게 대해서다. 속뜻을 못 알아듣는 건지 선명한 눈동자를 깜빡였다.

아마 그는 반성하고 있을지 모른다. 제게 못되게 군 적이 있나 떠올려 보고, 좀 더 잘하려고 애쓰려 하겠지.

“에휴, 걍 하던 대로 하자. 대신에 딱 10분만 늦게 일어나기.”

결국 그녀는 포기하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어. 알면서 덤빈 제가 잘못이지.

“에디스가 원한다면.”

그가 고개를 둥글게 흔들었다. 이마에 에디스의 손이 얹혀 있어서 셀프 쓰다듬기를 한 것이다. 나 잘했어? 올려다보는 눈이 큼지막하게 뜨여 그녀에게 묻는 듯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도 쓰담쓰담해 줬다.

“너 정말, 사기꾼이야.”

투덜거림에는 온기가 잔뜩 배어 있었다.

어차피 그녀도 이젠 운동이 몸에 배어 예전보다는 힘들지 않았다. 사격과 승마를 그만두게 된다면 아쉽기도 할 거다.

쓰다듬다가 새끼손가락이 구부러졌다. 그가 고개를 돌려 손가락 끝을 입술로 잠깐 물었다가 놨다.

“편하게 불리니까 너무 좋다. 너, 야, 이렇게 들으니 막 간지러워.”

“발끈해야 맞지 않나? 누가 감히 너한테 그렇게 부르겠어.”

“해 줘. 에디스한테만은 꼭 듣고 싶어.”

화를 내는 자세를 만들려는데 클라이드가 너무 좋아할 때부터 알아봤다.

“변태.”

말 내리는 것도 모자라 이젠 야자까지 해 달라고 난리다. 그럼 변태 황제 맞지.

“그것도 좋다.”

숲에서 새로 딴 꿀의 향기가 풍기기 시작했다. 알파 페로몬이다.

아직 주기가 오려면 멀었는데, 그는 일부러 페로몬을 내뿜고 있었다. 대낮에 접견실에서 황좌에 에디스를 올려 두고 유혹하는 알파다.

이제 에디스는 페로몬을 제어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완전한 우성 오메가로 클라이드에게만 자신의 향을 드러내곤 했다.

알파 페로몬에 반응한 자신도 오메가의 페로몬을 슬며시 흘렸다.

그가 황좌에 앉은 후 무릎에 그녀를 앉혔다. 목덜미에 코를 대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소리 없는 호흡과 함께 내어놓는 말이 몽롱한 느낌으로 풀려 있었다.

“얼른 결혼하고 싶어.”

저도 같은 마음이라는 표현으로 에디스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달콤한 향이 비강을 찔렀다.

영원히 취해도 좋을 내 알파의 향이었다.

완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