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옆에 앉은 에디스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참관만 해야 했다. 황녀를 비롯해 접견을 신청한 자는 그녀가 위선을 부린다고 여긴 탓이었다.
에디스는 최근까지 여러 사람에게 강조해 왔다. 결혼한 적이 없으며 납치되어 바다 너머로 다녀온 것뿐이라고. 지인은 다들 믿어 줬지만 풍문과 여론에 휩쓸려 이 자리까지 온 이들의 생각은 달랐다.
여기에서 그녀가 할 일은 결백한 얼굴로 자리를 지키는 것밖에 없었다.
오물을 뒤집어쓴 듯 더러운 기분으로 고개를 꼿꼿이 세우기가 힘들었다. 싸우듯이 정면을 쳐다보다가, 옆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에 돌아봤다. 클라이드가 팔걸이를 톡톡 두드려 그녀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그가 부드러운 눈웃음을 건네왔다. 뾰족하게 치솟았던 불쾌감을 알아챈 것이다. 깨알 같은 배려에 에디스는 굳었던 얼굴 근육을 조금 풀었다.
클라이드가 사람들을 향해 단호히 말했다.
“첫 번째 증인은 경을 납치했던 배의 선장이다.”
선장이 어리바리한 모습으로 접견실에 들어왔다. 선장은 안내해 온 시종은 항해일지와 각종 계약서를 들고 있었다.
“네가 경을 배로 데려간 날짜가 언제인가?”
“9월 3일입니다.”
좌중이 소란스러워졌다. 거짓된 증언일 수 있다는 목소리가 컸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 뒀던 덕분에 클라이드는 선뜻 받아쳤다.
“일리 있다. 가난한 자는 매수되기 쉽지. 이 항해일지도 죄다 지어냈을 수 있어. 하지만…….”
손가락을 까딱여 몇 장의 서류를 황녀에게 전해 줬다.
“케츠모리스 경이 발행한 어음이다. 어음 발행일은 9월 6일. 남쪽의 새튼 항구에 있는 금고에 맡겨진 날도 9월 6일. 이거면 경이 배를 타고 떠났다는 증거로 충분하지 않나?”
황녀가 어음을 손에 쥐고 정지했다. 얼음장 같은 분위기의 접견실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어떤 이가 황녀를 기웃거렸다. 어음 내용을 확인하려는 행동이었다.
“돌려 가면서 확인해도 좋다. 황녀는 다 봤으면 옆으로 넘겨라.”
시종이 트레이로 받친 서류들이 차례차례 다른 사람에게로 향했다. 탄원서를 내며 강하게 에디스를 비난했던 이들은 내용을 확인한 후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거의 상황이 끝나는가 싶었는데, 문득 황녀가 바닥을 보고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어음을 미리 써서 보냈을 수도 있습니다. 어음이 새튼 항구에 접수됐다고 해서 그곳에 케츠모리스 경이 왔다는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억지스러운 가정이었다. 하지만 황녀는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만약에 항구에 갔었다고 하더라도, 다시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와 10월 8일에 그레이브즈 전 공작과 만나 결혼식을 올렸을 수도 있습니다. 날짜가 충분하니까요.”
“음, 황녀가 정 그런 식으로 추측한다면.”
클라이드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음과 거래 명세서, 선장과의 계약서를 먼저 공개한 건 이중적인 의도가 깔려 있었다. 에디스가 끌려가던 당시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칫솔이나 머리빗 같은 생필품까지 사야 했다는 건 그녀가 몸만 덜렁 잡혀 갔다는 의미였다. 구매목록만으로도 굉장히 긴박한 느낌이 풍겼다.
의사들과 의료품에 거액을 지출한 명세서는 그 와중에도 남을 도우려고 애썼다는 표시였다. 황후로서의 덕성을 알리는 데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다음으로 클라이드가 부른 증인은 사령관 에스톤이었다.
작위를 가지고 황실의 품위에 어울리면서 이 상황을 증명할 만한 자였다. 에스톤은 자신이 흙과 지평선에서 보고 겪은 점을 낱낱이 설명했다.
다음 순서로 에디스를 호위했던 사람들이 중앙에 나섰다. 닉슨을 비롯한 근위병들이 자신의 경험을 밝혔다.
이제 보다 결정적인 증거를 내밀 차례였다.
“10월 8일은 마침 전쟁 기록이 남아 있더군. 페릴랜드‧체르헨 연합군과 우리 군이 테이폴스 협곡에서 맞붙었다. 그때 페이튼이 직접 출전했다가 말이 총에 맞아 낙마했지.”
시종이 전쟁 기록에 대한 자료를 보길 원하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확인시켰다.
“아, 그런데 페이튼이 낙마한 건 전쟁 기록에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직접 봤거든. 설마 황제의 말도 거짓이라고 할 텐가?”
“…….”
“테이폴스 협곡은 바다에서 멀다. 제일 가까운 항구까지 마차로 보름은 족히 걸리지. 황녀의 가정대로 따라 볼까? 케츠모리스 경이 새튼 항구까지 내려가 항해용 여행용품을 잔뜩 사고, 구태여 다시 북상해서 테이폴스 협곡으로 돌아가 페이튼을 만났다?”
“…….”
“그래, 정신 나간 짓이긴 하지만 말도 안 되게 우겨 보자고.”
입이 얼어붙은 황녀 앞에서 클라이드가 손가락을 까딱했다.
이번에는 총시종장이 직접 트레이를 들었다. 위에는 피 묻은 종이 한 장이 올려져 있었다. 에디스가 노예 저항운동을 벌이면서 쓴 문서였다.
“페이튼이 반란을 일으킨 날 내가 작성한 교지다. 놈의 지위를 삭탈하고 신대륙의 영지도 몰수한다는 내용이지. 그리고 그 땅의 새로운 주인을 케츠모리스 공작으로 정했다.”
“…….”
“공작에게 영지를 하사한 다음, 이 교지를 신대륙으로 향하는 배에 보내려고 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전달하러 항구에 들렀다가 끌려가 버린 것이다. 공작은 교지를 몰래 숨긴 채 그곳에서 혼자 투쟁했다지.”
그는 지난 일에 약간의 살을 붙여 설명했다.
교지를 에디스가 직접 작성했던 일은 비밀에 부쳐야 했다. 아직 결혼 전이라 황후의 자격도 없으니, 원칙대로라면 임의로 황태자의 인장을 써서는 안 되는 거였다.
이 자리에서 교지를 공개하면서, 겸사겸사 말 못 할 비밀을 말끔히 감추는 기회도 마련할 수 있었다.
거의 포기한 얼굴의 황녀가 꺼져 들어가는 말투로 물었다.
“폐하의 교지가 신대륙까지 다녀왔다고 해도, 그것으로 케츠모리스 공작이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의미는 되지 않습니다.”
“아직 내 얘기는 끝나지 않았다, 황녀.”
용의주도한 미소를 띤 클라이드가 황녀를 면박 줬다.
“내 뜻이 흙과 지평선에 공표된 날은 12월 15일이다. 케츠모리스 경이 10월 8일에 테이폴스 협곡에서 결혼식을 올렸다면 절대로 대양을 건너 도착할 수 없는 날짜다.”
“…….”
“그대들이 선장의 말을 믿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니, 다른 이에게 확인해 보겠다. 알페르 자작?”
“예, 폐하.”
알페르 자작의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대의 주력 사업이 무역업이지?”
“옙.”
“전쟁이 벌어진 협곡에서 흙과 지평선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리나?”
가장 눈에 띄게 황녀의 편을 들었고 에디스를 탄원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자작을 콕 집어 물은 것이다. 우물우물 답하는 자작의 시선이 황녀와 에디스, 황제 사이를 바삐 오갔다.
“협곡에서 항구까지 가는 데 보름, 거기서 해류를 탈 수 있는 지점까지 남하하는 데 다시 보름……. 바다를 건너는 것만 아무리 빨라도 두 달, 늦으면 넉 달까지 걸립니다. 그러니까 합산하면 석 달 남짓은 여행해야 합니다.”
“들었지? 전쟁 한복판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적진과 아군진을 뚫고 항구까지 가서, 목적도 없이 배를 타고 신대륙까지 가더라도 절대 시일 내로는 도착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클라이드가 입꼬리를 사납게 끌어 올렸다.
“이래도 쑤군거릴 자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준비했다.”
손가락을 다각 튕기자 닫혀 있던 접견실 문이 열렸다. 눈부신 미모의 오메가 남성이 나긋나긋한 걸음걸이로 붉은 카펫에 발을 디뎠다.
그가 지날 때마다 신선한 아이리스 꽃냄새가 풍겼다. 최강의 오메가 향이었다. 홀린 듯이 뭇 사람의 시선이 그를 따랐다.
아드리안이 황제 앞에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다녀왔습니다, 폐하.”
“사업은 나중에 챙기고 내 곁을 지키라니까 부득부득 가더니.”
“송구합니다.”
“얘기는 들었겠지? 지금 그대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아드리안은 황제에게 감히 등을 돌리지 않았다. 비스듬히 서서 섬세한 얼굴선을 뽐내며 세이렌의 유혹처럼 아름다운 음성을 발했다.
“저는 방금 흙과 지평선에 다녀왔습니다.”
클라이드가 누지근하게 눈매를 좁혔다.
“지난겨울, 그러니까 12월 15일에 그곳에서는 역사에 기록될 만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우리가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지도 않았던 노예들이 케츠모리스 경의 인도로 한꺼번에 들고 일어났다고 합니다.”
“…….”
“노예에 관한 사건은 이 자리에서 논점에 어긋나니까 생략하겠습니다. 핵심은 노예들이 흙과 지평선을 뒤엎을 때 경이 선두에 섰다는 사실이지요.”
“선두에요?”
열을 지어 선 귀족 중 누군가가 물었다.
“예, 저항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노예를 이끌었습니다. 따라서 사건이 벌어지던 날에 경이 흙과 지평선이 아닌 다른 곳에 갈 수는 없습니다. 그 결과 지금 그 땅은 관리인도 없이 노예들이 스스로 땅을 일구고 있습니다. 노예가 죽지도 않아서 새 노예를 사들이는 일도 없더군요.”
접견실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황제의 면전인데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에서 쑥덕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케츠모리스 경이 거기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나중에 저와 얘기를 나누시지요. 제가 간소하게 귀국 기념 파티를 열겠습니다.”
클라이드는 한동안 기다렸다. 사람들이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며 머릿속으로 손익을 계산하는 시간을 충분히 줬다.
엄중하고 낮은 음성이 실내를 은은하게 메웠다.
“아직도 케츠모리스 경을 의심하는 자가 있는가?”
누군가가 나설 틈을 남겼다.
“그럼 페이튼이 결혼을 위조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사람은 손을 들라.”
재판정의 배심원이 사실 여부를 판단하듯이 이 자리에 모인 이에게 보편적인 시각을 요구했다.
하나둘 손을 들었다. 에디스를 잡아먹을 듯 탄원서를 올렸던 귀족들이 태세를 전환하는 순간이었다.
올라가는 손이 점차 늘었다.
종국에는 한두 명을 빼고 전부 다 클라이드의 주장에 동의하게 되었다.
“좋군. 그러면 더는 분란이 일어나지 않을 거로 믿겠다.”
뺨을 파들거리는 레테이시아 황녀를 바라보며 쐐기를 박았다.
“또한 이 순간 이후로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지엄한 황제의 권위에 대적한다고 받아들이겠다. 내 뜻을 이해했길 바란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누군가가 쿨럭거리는 소음을 낸 후에야 얼음이 깨지듯이 분위기가 바뀌었다. 클라이드가 시종장을 향해 눈짓하자 시종장이 사무적으로 접견을 마무리했다.
“이상입니다. 폐하를 뵈러 오셨던 분들은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썰물이 빠지듯 사라지는 귀족과 상류층 인사들이 이따금 뒤돌아 아드리안을 바라봤다.
흙과 지평선에서 있었던 사건을 자세히 듣고 싶은 눈치였다. 그들의 식민 영지는 골치를 썩이면서도 그다지 주머니를 불려 주지 않는데, 그곳은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