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이젠 아드리안도 감정을 잘 숨길 줄 알게 되었다. 전에는 그녀에게 좋아한다는 표현을 제법 많이 했지만, 별다른 진도도 나가지 못한 데다가 이미 몇 달이나 시간이 지났다. 그럭저럭 정상적인 분위기 속에서 편한 사이로 돌아가고 있었다.
따라서 눈치가 부족하지 않은 에디스라도 그의 속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 봐도 아티를 클라이드와 만나게 한 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
“내가 보기엔 글쎄.”
“덕분에 네 사업도 잘나가게 됐잖아.”
“원래도 쪼들리는 형편은 아니었어.”
“공작 작위도 받았는걸!”
아드리안은 잊었다가 기억났다는 양어깨를 으쓱했다.
“맞아, 내가 공작이 됐지.”
“뭐야. 남의 일처럼.”
“아직 새 작위가 익숙하지 않아서.”
전쟁이 끝난 후 공훈을 인정받은 자가 제법 많았다. 그중에서도 아드리안은 최고로 큰 포상을 받았다.
그는 일찍부터 클라이드의 연인 행세를 하며 귀족파를 견제하는 데 도움을 줬다. 전쟁 중에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황제의 뜻을 따라 물자를 조달했다. 당장 대금을 받지 않아도 군량을 끌어모아 군대에 옮겼고, 구두 계약만으로 무기류를 실어 나르기까지 했다.
아드리안은 딱히 클라이드와 호흡이 맞는 사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중간에 에디스가 끼어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
전쟁에 승리해야 멀리로 납치된 그녀와 다시 만날 기회가 생기리라고 생각해 왔다.
작년과 비슷하게 후덥지근한 날씨에 야외 테이블에 앉은 아드리안은 자신의 예감이 적중해서 너무 기뻤다. 홀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레이먼드 공작 각하.”
에디스가 장난치듯이 공작 운운하는 순간이 뿌듯했다.
“듣기 이상해.”
“라그란드에 공작 가문이 나밖에 없으면 썰렁하잖아. 너랑 나랑 딱 좋네.”
“그건 좋아. 너와 공통점이 생긴 거.”
에디스도 좋았다. 아드리안의 마음을 매몰차게 거절하던 당시는 속상했지만 이젠 그의 감정이 사그라든 것 같아서 다행스러웠다.
그간 있었던 일을 주거니 받거니 얘기 나누다가, 문득 아드리안이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귀국하고 나서 괴상한 소문을 들었어. 네가 페이튼과 결혼했다며?”
“설마 믿는 거야?”
아드리안이 커다란 눈을 들어 잠깐 하늘을 봤다.
“말도 안 되지. 널 납치한 놈이잖아.”
“그치? 말도 안 되지? 하지만 요즘엔 믿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아.”
“대체 어쩌다가 그런 얘기가 퍼진 거야?”
에디스는 생각만 해도 짜증 나는 페이튼의 만행을 죄다 하소연했다. 날조된 결혼부터 시작해서 체르헨 황제한테까지 사기 친 결과까지 밝히며 그놈을 마구 욕했다.
이건 변명할 거리도 되지 않는 거짓이었다. 하지만 워낙 여론이 시끄러워서 대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긴 설명을 들은 후 아드리안이 생긋 미소 지었다.
“접견 일자가 언제라고?”
“사흘 뒤야.”
“내가 증인이 될게. 널 납치했던 선장이 서민이라서 말발이 서지 않는다면, 공작인 내가 나서면 되겠네.”
아이리스꽃이 청초하게 피어나듯이 아드리안의 자태가 눈부셨다.
그의 태도는 여느 때처럼 보드라웠다. 클라이드처럼 강하게 어필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왠지 말한 대로 이루어질 듯 오묘한 자신감이 엿보였다.
* * *
대형 접견실에 인파가 가득했다.
황제를 뵙기를 청했던 자를 추려 내어 궁으로의 방문을 허용했다. 어떤 질문이 나오든 대처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사람들은 황궁 정원의 네모나게 깎아 낸 벽돌 블록처럼 가지런히 열을 맞춰 섰다.
자리 정돈을 완벽하게 마친 후에야 다음 절차로 넘어갔다.
“황제 폐하 드십니다.”
총시종장의 엄격한 외침에 이어 클라이드가 나타났다. 나란히 에디스를 대동한 채였다. 외부까지 널리 알려진 대로 황제와 예비 황후가 가까이에 의자를 붙이고 앉았다. 황제는 단정한 자세로 좌중을 둘러보면서도 수시로 옆의 예비 황후를 의식하곤 했다.
황궁에 처음 든 자들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자 내심 놀랐다. 황제의 시선이 날카롭게 접견실에 모인 인사를 훑을 때는 등골이 오싹하리만치 엄했다. 반면에 우연히 황제의 손이 예비 황후의 팔목을 건드릴 때는 순식간에 훈풍이 불었다.
다시 클라이드의 짙은 눈빛이 정면을 향했다.
누군가가 긴장을 이기지 못해 크흠, 헛기침했다. 황제는 그쪽을 노려보지 않았지만 장내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이 자리에 온 그대들은 모두 탄원을 올린 적이 있다. 그것도 황실의 권위를 기만할 만큼 아주 강력한 어조로 말이지.”
초반부터 클라이드가 기선을 잡았다.
“무슨 근거로 내 결혼에 이의를 던졌는지 이제부터 얘기를 들어 보겠다.”
먼저 나서려는 자가 없었다. 살얼음판 같은 접견실에 클라이드의 낮은 음성이 좀 더 이어졌다.
“이 자리에 온 자는 누구든 내게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단, 명확한 증거를 내 앞에 보여야 한다. 남이 하는 얘기를 들었다든가 요즘 여론이 어때서, 같은 말은 허용하지 않겠다. 이런 발언을 하는 자는 악소문을 퍼뜨리는 주범으로 간주하겠다.”
악소문의 범인이 된다면 당연히 황실 능멸죄로 엄벌에 처해지게 된다. 소문을 기정사실로 믿고 탄원했던 많은 이는 시작 단계에서부터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클라이드가 가장 앞줄에 선 자를 노려봤다.
황녀 레테이시아.
증거를 보일 만한 사람은 황녀뿐이었다. 그는 가만히 황녀와 시선을 맞췄다. 적의 우두머리가 덤불에서 뛰쳐나올 순간을 기다렸다.
“왜 아무도 말이 없는가. 내 결혼에 입방아를 찧어 대는 이유와 근거를 밝히란 말이다.”
차가운 침묵이 접견실에 내려앉았다.
뒷줄의 어떤 사람은 옆 사람에게 눈짓했다. ‘네가 한번 나서 봐’와 비슷한 태도였다. 눈짓을 받은 자가 금세 사색이 되었다. 어깨를 작게 움츠리면서 황제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안간힘썼다.
죄다 소문뿐이라서 황제에게 고할 자가 있을 리 없었다. 에디스가 이미 결혼했다는 전제하에 그동안 여론이 들끓었던 탓이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마침내 레테이시아 황녀의 손이 어깨만큼 올라갔다.
황제에게 말씀을 올리고 싶다는 표시였다.
클라이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총시종장이 접견을 진행했다.
“체르헨 제국의 레테이시아 황녀님, 말씀해 주십시오.”
황녀가 손에 든 봉투에서 내용물을 꺼내 들었다.
“이건 제가 아버지인 체르헨 황제 폐하께 받은 친서입니다.”
몇 장의 편지지가 황녀의 손 위에서 잘게 펄럭거렸다.
“사담을 나눈 편지의 내용은 유감스럽지만 공개하기가 어렵겠습니다. 단순히 아버지와 여식 간에 한 얘기라서요. 하지만 마지막으로 첨부된 문서는 클라이드 폐하를 비롯한 여러분께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시종의 손을 거쳐 문서가 클라이드에게 전달됐다.
‘결혼 증명서’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그는 속이 뒤집어졌다. 험상궂게 표정이 굳어질 때에 맞춰 황녀가 목소리를 키웠다.
“체르헨에 보관되어 있던 결혼 증명서 사본입니다. 제 부황께서 저를 믿고 보내 주셨지요.”
고요하던 접견실이 술렁거렸다. 황제 앞이지만 무의식중에 탄성을 발하는 자가 제법 많았다.
게다가 이걸 당사자인 에디스라든가 결혼 상대자인 클라이드에게 보내지 않고 황녀의 손에 쥐여 주다니. 체르헨 황제의 시커먼 속이 어렵지 않게 읽혔다. 결혼을 파투내고 싶을 뿐만 아니라 황녀도 엮어 황후 자리를 노리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남자의 필체로 쓰인 증명서의 아래쪽에는 사본의 제작자 서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바로 페이튼의 이름이었다.
“문서의 진위를 조사하셔도 됩니다.”
“아니, 그런 건 시간이 걸려. 이 자리에서 논의하기에 적절하지 못하다.”
페이튼의 친필인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놈이 가짜 서류를 만들고 사본도 한 장 더 적어서 체르헨에 보냈을 테니.
따라서 반박의 실마리를 다른 곳에서 찾아야 했다.
클라이드는 다 깨부술 듯 불쾌한 모습을 하면서도 동요하지는 않았다. 문서 트레이에 올려진 서류를 꼼꼼히 확인하면서 잠시 숙고했다.
곧이어 에디스에게 시선을 건넸다.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늘어졌다. 작은 표정의 신호를 알아본 그녀는 여상한 태도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황녀가 내민 증거는 예상했던 대로라는 의미였다.
무성한 소문과 황녀의 물밑 작전으로 마음고생 하던 나날, 클라이드라고 손 놓고 있지는 않았다. 지난번에 공문을 받자마자 체르헨에 정보원을 보냈다.
정보원은 정확한 결혼 신고 내용을 알아내기 위해 체르헨 관공서를 뒤졌다. 시청에 보관되었던 흔적을 찾고 어렵사리 열람했다. 그 결과, 페이튼의 위조 결혼 문서에 구체적으로 뭐라고 쓰였는지 미리 알아낼 수 있었다.
클라이드는 동요하지 않고 어깨를 바로 세웠다.
“그레이브즈 전 공작과 케츠모리스 공작이 10월 8일에 결혼했다고 쓰였군.”
“네,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확인했습니다.”
“레테이시아 황녀, 혹시 그대의 나라가 우리 라그란드를 침공한 날짜를 알고 있는가?”
그의 시선이 문서에서 황녀로 옮아 갔다. 거북한 표정의 황녀가 조금 늦게 대답했다.
“9월 3일입니다. 그건 왜 물으시는지요?”
“이 증명서대로라면 전쟁 도중에 결혼했겠군.”
“아마 그렇겠지요.”
“하지만 케츠모리스 경은 전쟁이 터지던 날 항구에서 납치됐네. 배에 갇혀 흙과 지평선까지 인질로 끌려갔다가 왔지. 내가 그 사실을 여러 번 주장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문서를 내민다는 건, 내 말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지?”
“폐하를 믿지 않는 게 아니라, 케츠모리스 경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겁니다.”
클라이드가 흠, 하고 흥미로운 한숨을 쉬었다. 수세에 밀리는 느낌이 없었다.
결정적인 증거를 내밀고 에디스를 황후 후보에서 밀어낼 수 있으리라고 여기던 황녀는 그의 이런 태도에 내심 조마조마해졌다. 클라이드가 무슨 변수를 만들려는지 몰라 긴장 속에 귀를 기울였다.
“반대로 나는 이 문서가 위조되었다고 확신한다.”
“저와는 다른 생각이시군요. 하지만 폐하가 원하신 대로 전 증거를 가져왔습니다. 잘못된 증거라는 걸 밝히지 못한다면, 케츠모리스 경은 이미 결혼했다고 결론지어야 합니다.”
“좋다. 잘못된 증거라는 사실을 이제부터 밝혀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