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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122)화 (122/129)

122화

한 달 남짓이 흘렀다.

레테이시아 황녀를 황후로 추천하는 여론의 목소리가 서서히 잦아들 무렵, 반전이 일어났다.

클라이드는 황제의 집무실에서 여유로이 공무를 보고 있었다. 그때 시종장이 황망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폐하, 체르헨에서 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시종장이 올린 문서를 펼친 클라이드는 글을 몇 줄 읽어내리다 말고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게 무슨.”

심각한 내용이란 걸 알아챈 에디스가 옆 책상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뭔데 그래요?”

“말도 안 되는 조작이 벌어졌어.”

봉투에 체르헨 황실의 문장이 새겨진 걸 확인하자 먼저 긴장이 앞섰다.

“조작이요?”

인사말은 건너뛰어 읽고 용건부터 확인했다.

「라그란드의 군주와 케츠모리스 가문의 공작이 결혼을 발표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 사태를 매우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사태? 미친 거 아냐? 남의 나라 국혼을 사태라고 하다니.

「케츠모리스 공작은 우리 저희 체르헨 관공서에 공식적으로 결혼 신고가 되어 있습니다. 배우자는 그레이브즈 공작입니다. 시청에서도 확인을 받았고, 워낙 지체 높은 가문 간의 결합이라 황궁까지 이 사실이 전해졌습니다.」

에디스는 뒤로 넘어가 버렸다.

그레이브즈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골이 뻐근해졌다. 목덜미를 부여잡자마자 몸이 휘청였다. 쓰러지기 직전 클라이드가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에디스 괜찮아?”

“하, 미친놈.”

“처돌은 놈이지.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나.”

「그레이브즈 공작은 현재 페릴랜드에 머물고 있습니다.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크나큰 격변을 거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곳에서 건재합니다. 만약 그레이브즈 공작이 죽은 줄로 알고 재혼을 계획하신다면 이는 틀렸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페이튼이 아직 버티고 있는 건 이쪽도 안다. 그 개자식이 말도 안 되는 문서를 위조한 게 문제지.

“그런데 혼인 증명서를 사본으로 어떻게 만들죠? 그게 효력이 있나요?”

“사본을 쓴 사람이 직접 사인과 직인을 찍게 되어 있어. 그러면 관공서에서 효력을 판단해서 받아들이는 것이지. 사본은 아마 페이튼이 써서 보냈을 거야.”

“애초에 결혼 증명서를 가짜로 썼을 테니, 똑같은 내용으로 사본을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겠네요.”

열 뻗쳐서 쓰러질 뻔한 위기가 지나자 에디스는 분개하기 시작했다.

화풀이 대상이 머나먼 섬에 있어서 놈을 대신해 클라이드에게 잔뜩 투덜거렸다. 소 새끼 말 새끼 욕을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속된 말을 하기에는 자신의 입이 더러워지는 게 아까웠다.

아무리 해도 가슴속에 들끓는 화를 잠재울 수 없었다. 클라이드는 함께 격분하면서도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페이튼이 위조했다고 회신을 보내면 돼. 화가 날 뿐이지 우리 결혼에 지장은 주지 않을 거야.”

“체르헨 황제가 딴지 걸면요?”

“그자가 무슨 권리로 라그란드 황실의 혼사에 끼어들겠어.”

아마 아닐 수도 있다. 법적으로는 상관없는 사이라도 이 문제를 화젯거리로 만들 수는 있겠지. 체르헨 황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본을 들먹이며 사방팔방 떠벌릴 수도 있다. 라그란드 황제가 유부녀와 결혼한다고.

세상이 얼마나 우리 결혼을 흉볼까.

거센 반발에 밀려 끝내 식을 올리지 못하게 될 가능성도 아예 떨쳐 낼 수는 없다. 무리해서라도 강행할 클라이드와 신하들 사이에 한바탕 분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만약 체르헨 황제도 이런 그림을 상상한다면, 분명히 요란하게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적대국 라그란드의 황실이 뒤집히는 꼴을 꼭 보고 싶을 테니.

에디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 정말. 미친개한테 물린 기분이에요.”

“페이튼은 미친개 맞는 것 같아.”

“위조했다는 답변만으로는 부족해요. 체르헨 황제는 잘됐다 싶어서 끝까지 물고 늘어질걸요. 당신을 흠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겠죠.”

클라이드의 손이 너무 세게 문서를 잡은 탓에 끄트머리가 구겨졌다. 내던지듯이 손끝으로 튕겨 내면서 깊이 고심했다.

“일단 회신부터 하겠다는 뜻이야. 가만히 있으면 안 되잖아. 그다음에는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필요한 증거를 모아야지.”

“증거……. 맞아요. 그게 필요해요.”

둘이 머리를 맞대고 대처 방법을 찾았다.

어떤 증거가 도움이 될지 고민하면서 두 사람의 결혼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다방면으로 신경을 썼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앞날은 역시 레테이시아 황녀의 부상이었다. 에디스가 하자 있는 황후 감으로 여겨진다면 많은 이들이 레테이시아를 지지하겠지. 황제 클라이드의 아내가 될 사람으로 누가 나은지 온 제국민들이 들고일어나 떠드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른다.

황실의 혼사는 한 사람만의 인연이 아니라더니, 결혼식을 코앞에 두니 그 얘기가 피부로 와닿았다.

* * *

에디스는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전술적으로 봐도 이게 맞았다. 수성하는 진영은 상대의 반응을 살피며 적절히 막아 내고, 공성하는 진영은 이기기 위해 덤비는 패턴이다.

어중간하게 대처하기보다는 클라이드가 딱 부러지게 황명을 내렸다.

“케츠모리스 경에 관하여 근거 없는 헛소문을 퍼뜨리는 자는 엄벌에 처하겠다.”

하지만 레테이시아 황녀 측에서는 헛소문이 아닌 근거를 대며 항변의 목소리를 키웠다. 어느 백작의 살롱에 가서 황녀가 떠들어 댔다고 한다.

“내 아버지 되시는 폐하께서 직접 갖고 계시다네. 그레이브즈 전 공작과 케츠모리스 공작의 결혼 증명서 사본을 말이지. 헛소문이 아니라네. 궁금하다면 폐하께 알현을 청해 물어봐도 돼.”

클라이드가 체르헨에서 공문을 받은 시기에 황녀도 같은 소식을 접한 게 분명했다. 날개 달린 쥐처럼 이 얘기는 순식간에 도시에 퍼졌다.

며칠 지나지 않아 온 나라가 황후 에디스에 관한 이야기로 시끄러워졌다.

“황후가 되실 분이 알고 보니까 벌써 결혼했다며?”

“체르헨 황제가 증거를 갖고 있대.”

“폐하는 알면서도 새 황후님을 좋아한다던데.”

“떼잉,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천륜을 거스르나.”

결국 수많은 탄원서와 접견 신청서가 황궁에 날아들었다.

클라이드는 전부 무시하는 방법을 선택하려 했지만, 에디스는 가만히 놔두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거센 공격에 성벽이 무너질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했다.

길게 끌지 않고 황녀 측과 싸워 한 방에 이기기 위해, 대규모 인원의 접견을 한꺼번에 받기로 했다.

우선 접견 날짜를 신중히 정했다.

필요한 자료도 넉넉히 모았다. 황녀 측에서 떼거리로 몰려와 질문을 퍼부을 테니까 우리 측에서도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다 불렀다.

에디스를 구출하기 위해 신대륙에 다녀온 사령관이 1순위였다.

사령관인 에스톤 남작은 원래의 보직이었던 제2군단에 돌아가 있었다. 황제의 명을 받아 입궁한 후 자신의 역할을 꼼꼼히 숙지했다.

“에스톤 경은 흙과 지평선에 도착했을 때 보고 겪은 일을 있는 그대로 밝히게.”

“기필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대의 본분이 아닌 일로 불러서 유감이군.”

“폐하께서 명하신 건 제가 당연히 해야 할 부분입니다. 솔직히 기회가 와서 다행입니다. 그동안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들으면서 울화가 치민 게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다음으로 풍요의 요정 호 선장을 불렀다. 결정적인 증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서민 신분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지위 있는 귀족들은 황실에서 마련한 중요한 자리에 한낱 서민이 들락거리는 걸 못마땅해할 터였다.

신분제가 불합리하고 쓸모없는 관습이라고 에디스가 아무리 투덜거려도 소용없었다. 그녀를 제외하고 세계의 모든 이가 신분제 사회에서만 살아와서 답이 안 나왔다.

마찬가지 이유로 닉슨을 부르면서도 별다른 활약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선장이나 닉슨에게 발언의 기회를 준다고 해도 상대 진영에서는 한 귀로 흘릴 가능성이 컸다. 신분이 낮은 자의 말은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사고방식이 팽배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흙과 지평선까지 에디스와 함께 납치되어 다녀온 근위병 중 한 명은 다행히 기사 집안 출신이었다. 비록 기사라는 지위가 몇 세대 전부터 유명무실해졌지만, 다가올 접견에서는 아쉬운 대로 도움이 될 듯했다.

각종 근거 자료를 수집하느라고 바쁜 나날을 보내던 중, 에디스를 만나러 온 사람이 있었다.

“아티!”

대항해를 마치고도 우유처럼 뽀얀 피부색을 뽐내는 아드리안이 청초한 자태로 그녀 앞에 나타났다.

“에디스, 드디어 만나네.”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세계의 반대편만큼 길이 엇갈리다니.”

반가운 마음에 두 팔을 벌려 그를 환영했다. 친구로서 가벼운 포옹을 하자, 그림자처럼 그녀를 따라온 클라이드가 삐뚤게 눈꼬리를 비틀었다.

에디스는 손사래 쳐서 클라이드를 내쫓았다. 나중에 약간 투덜거림을 들어야 하겠지만, 굳은 신뢰가 쌓인 두 사람 사이가 어그러질 일은 없다.

아드리안을 마주하고 야외의 티 테이블에 앉았다.

아름드리나무가 빽빽한 그늘을 드리우고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이 더위를 식혀 줬다. 아드리안은 마지막 봤을 때에 비해 달라진 게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찰랑거리는 보랏빛 머리칼이 더 길어진 정도랄까.

둘은 잔뜩 쌓인 회포를 풀기 전에 느긋하게 차를 한잔했다.

“아티,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난다.”

“무슨 생각?”

“내가 네 집에 찾아갔을 때 말이야. 뜬금없었는데 네가 반겨 맞아 줬잖아.”

“그때 나 엄청나게 들떴었어. 오랫동안 눈으로만 좇았던 네가 와서.”

에디스가 머쓱하게 웃었다.

“난 엉뚱하게 클라이드와 널 만나게 해 주려고 노력했지. 이 세계가 소설 속인 줄 알고, 두 주인공이 반드시 맺어져야 하는 줄 알았어.”

“그때부터 계략을 품었구나. 어쩐지.”

“계략이라니. 다 너한테 좋으라고 한 일이라니까.”

“취향도 아닌 알파를? 난 폐하와 너무너무 안 맞는걸.”

그녀가 부담스럽지 않도록 아드리안은 애써 친구의 선을 지켰다.

그래야 황후가 될 에디스를 먼 훗날까지 거리낌 없이 볼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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