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수건으로 가리면서 하면 돼. 기분 좋은 마사지가 될 수 있게 신경 쓸게.”
수건으로 과연 비밀을 감출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렇다고 절대 싫다며 우기기는 뭣해서 에디스는 그가 하려는 대로 내버려 뒀다.
언더 드레스가 몸을 떠났다. 허전해진 부위에 곧바로 얇고 폭이 넓은 수건이 덮였다.
턱에 작은 쿠션을 받쳐 주는 클라이드의 태도가 진지했다. 신중히 오일 뚜껑을 열고 향을 맡아 보는 표정 역시 의욕이 철철 흘러넘쳤다. 누가 보면 전문가급 마사지사인 줄 알겠다.
“이거 어때?”
“향기가 아주 관능적인데요? 마음에 들어요.”
“그럼 이건 어때? 눕히기 전에 고를 걸 그랬군.”
다른 오일의 냄새도 맡았다.
“오, 이게 더 좋네요.”
“달고 풋풋한 분위기지? 그럼 이걸로 할게.”
미지근한 온도의 오일이 등줄기를 타고 주르륵 흘렀다. 기분이 간질간질했다. 그의 손이 미끈둥해지면서 살갗 위로 스케이트를 타는 느낌이 야릇했다.
“힘 풀어.”
처음에는 긴장해서 손길이 닿는 곳마다 움츠러들었다. 곧이어 세심한 손놀림으로 피부뿐만 아니라 근육 깊은 곳까지 만져지자 에디스는 차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보드랍게 주무르는 손이 움직임이 육신의 감각을 살랑거리게 했다. 얼었다가 녹은 땅의 폭신폭신한 흙이 된 느낌이었다. 그는 너무 세지도, 약하지도 않은 힘을 가했다. 부하게 부푼 흙덩이 사이로 클라이드의 감촉이 속속들이 자국을 남겼다.
그가 에디스의 속 근육까지 따끈하게 데운 후 다음 부위로 옮겨 갔다.
수건을 단정히 접어 상체를 덮은 후 다리를 마사지했다. 클라이드는 그녀에게 어디가 불편한지, 혹시 누르면 아픈 데가 있는지 꼬치꼬치 물어봤다.
마사지 숍에 가 본 경험이 없는 에디스였지만, 그에게서 전문가에 비견할 만한 수준을 느꼈다.
“이제 돌아누워 볼래?”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만으로도 몸이 개운해요. 그만 일어나도 될 것 같은데.”
“절반밖에 안 했어. 나머지 절반까지 마치면 훨씬 개운해질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클라이드의 태도가 완강했다.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구무럭구무럭 몸을 돌리는 동안 그녀의 마음속에 말 못 할 근심이 늘어 가고 있었다.
그는 수건 테크닉도 훌륭했다. 똑바로 눕는 순간에 맞춰 수건을 말끔하게 그녀의 몸에 덮었다. 손놀림은 칼같이 각이 잡힌 전문 마사지사지만 에디스를 내려다보는 눈빛은 대양을 건널 때 바라보던 수평선처럼 끝없이 다정했다.
“긴장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줘.”
그만하고 싶다는 얘기가 또 나올까 봐 걱정되는지 그가 어깨를 가만히 토닥거렸다. 에디스는 꺼리는데 클라이드가 너무나 하고 싶어 하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응.”
실제로는 에디스도 되게 만족스럽고 몸이 날아갈 것 같지만, 밝히지 못할 이유로 편할 수가 없었다.
조만간 들쳐질 수건에 신경이 잔뜩 쏠렸다.
어렸을 적 밖에서 놀다가 옷 찢어 먹고 집에 왔을 때, 엄마한테 어떻게 말하면 덜 혼날까 궁리하던 심정과 비슷했다.
순서대로 마사지가 흘러갔다. 뭉쳤던 어깨 근육이 풀릴 때는 기분 좋게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당황해서 손에 힘을 줄였다가 한참이나 같은 곳을 마사지해 줬다.
얼굴과 팔, 손에 이어 마침내 몸통의 순서가 돌아왔다.
“거의 다 했어. 에디스, 지루하지?”
수건이 펄럭 날아올랐다.
에디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매번 예리한 각도로 신체 부위를 덮어 주던 수건이 이번에는 쭈글쭈글하게 한쪽으로 기울었다.
허공에서 커다란 손이 정지했다. 잘못 날아간 수건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하트가 마구 쏟아지던 눈동자는 순식간에 차게 식었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한기를 품은 짙푸른 머리칼이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게…… 뭐야.”
왼쪽 옆구리의 총상 자국 앞에서 그의 목소리가 늪에 잠기듯이 낮아졌다.
정지했던 손이 하강하는 순간, 눈에 띄게 손끝이 흔들렸다. 진동이 갈수록 심해졌다. 상처가 나은 부위에 닿지도 못하고 덜덜 떨었다.
악몽을 헤매며 그가 서둘러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완전히 아물어 흉터밖에 남지 않았지만 클라이드는 당장 출혈이 생긴 환자를 만난 것처럼 허둥거렸다. 오일이 닦여 말끔해진 손가락 끝을 가까이도 아니고 멀리에서부터 건드렸다.
“하.”
심장이 떨어지는 한숨.
“별거 아니에요.”
클라이드는 자신의 갈비뼈 아래를 움켜쥐었다. 총에 맞은 아픔을 대신 느끼고 있었다.
옆구리가 날아간 감각이 그에게 일어나고 죽을 것만 같은 통증이 불길처럼 번졌다.
“의, 의사부터.”
“다 나았어요. 오래전에 다쳤다가 아문 지도 한참 됐는걸요.”
“그래도 의사한테 보여야 해.”
“나중에요. 급하지 않아요. 사실은 진료가 필요 없는 컨디션이지만요.”
“안 돼. 하, 에디스가 어떻게…….”
그가 침대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극도의 공포 속에서 새파랗게 질린 채 전율했다. 흐트러진 머리칼이 이마 위에서 마른 잎처럼 파들거렸다.
아드득, 이를 갈면서 눈을 부릅떴다. 굴곡이 가파른 목울대가 턱 아래까지 일렁였다.
조심스러운 손끝이 차츰 접근했다.
작고 동그랗게 파인 자국이 선명했다. 총알을 꺼내느라고 절개한 수술 자국까지 무척이나 눈에 잘 띄었다. 면적이 크지는 않지만 아직 붉은 기가 남아 있었다. 갓 생긴 총상의 흔적이라는 게 역력히 읽혔다.
“심하게 부상 당했었군.”
몸에 박힌 총상이었다. 가볍게 스친 상처가 아니었다.
“다 나았으니까 괜찮아요.”
하지만 에디스는 그다지 연연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목숨이 위태로웠지만 지나고 나니 흉터에 담담해졌다. 그때의 용기가 흔적으로 남은 기분이었다.
단지 클라이드가 많이 속상해할까 봐 걱정이었다. 그는 절대로 자신을 밉다고 하지 않으리라 자신했지만, 마음 아프게 하는 건 싫었다. 운 좋게도 제법 오래 들키지 않았다가 마침내 클라이드의 일그러진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이 되자, 그녀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가 어려웠다.
에디스는 난감한 기분이 앞서서 흉터 부위를 숨기려고 했다.
옆구리를 가리기 직전 그가 먼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가만.”
클라이드가 쩔쩔매면서 파인 자국을 아주 살짝 만졌다.
“아파?”
“전혀요. 당신이 더 잘 알면서.”
그녀는 그의 가슴 아래를 손가락질했다. 같은 시기에 클라이드도 전장에서 총에 맞아 흉터 훈장을 추가했다. 그 이전의 흉터는 총사 대회 도중에 에디스 대신 맞은 총알의 흔적이었다. 가슴 아래는 전쟁터에서, 팔뚝은 총사 대회에서 흉을 남겼다.
손이 닿았다가 떨어진 자리에 클라이드의 일그러진 얼굴이 가까워졌다. 망연히 벌어진 입술 사이로 괴로움에 찬 신음마저 흘렀다.
“이게 어떻게 괜찮을 수 있지? 절대 괜찮지 못해.”
무사히 넘어갈 수는 없으리라고 여겼는데 역시나 그랬다. 내핵까지 땅굴을 파고들어 갈 듯한 클라이드의 암울한 독백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다 제 탓이라고 자책하는 것부터 해서 후유증에 대한 걱정을 끊임없이 늘어놨다.
엄마한테 야단맞던 기억보다 더 심했다. 감정이 직접 와닿았던 탓이다.
클라이드의 장황한 염려를 귀담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자신이 다친 것보다 더 괴로워해서 에디스의 마음도 안 좋았다.
“얼마나 아팠겠어.”
뚫어지게 쳐다보느라고 벌겋게 충혈된 눈자위는 흡사 우는 것처럼 보였다.
에디스는 내내 멀쩡하다고 강조하다가 마지못해 힘들었던 티를 냈다.
“아팠어요, 정말.”
“그랬을 거야. 총탄이 박히는 순간은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죽음과 맞닥뜨리게 되는 공포도 만만치 않잖아.”
“맞아. 그랬던 것 같아요.”
제 입으로 얘기하고 나니 새삼스럽게 지난날의 격렬했던 고통과 고단함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죽음을 불사하고 싸웠기에 그때는 마음의 각오도 되어 있었다. 하지만 생각한다고 해서 두려움이 잠재워지지는 않았다. 무서웠지만 어쩔 수 없이 나섰던 거다.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클라이드의 손을 맞잡았다. 그의 침잠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흔들리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모조리 얘기해 줘.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흉터뿐만 아니라 얘기가 아주 길어요.”
“긴 얘기라도 모두 듣고 싶어. 숨결 한 조각 내쉬었던 것까지 전부다.”
그는 에디스의 몸에 남은 오일을 닦아 내고 침대에서 일으켜 줬다. 거북해하는 그녀의 표정을 읽으며 더는 흉터를 유심히 쳐다보지 않았다. 찬찬히 옷을 입히고 마사지를 마무리했다.
흙과 지평선에서의 뜻하지 않던 경험은 장황한 모험 이야기가 되었다.
그가 안쓰러워하는 표정으로 눈썹꼬리를 내릴 때, 제 육신이 다친 듯 아파할 때, 에디스는 알게 모르게 편안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센 척하던 자신의 마음에 사실은 치유가 필요했던가.
심장에 연고를 바른 듯 간질간질했다.
* * *
모르는 사람이 보면 황후가 될 사람이 레테이시아 황녀인 줄로 착각하겠다.
황녀는 궁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 거의 매일 응접실을 사용했고, 외부의 모임에도 자주 참석했다.
나가는 곳은 주로 살롱이나 소규모 파티였다.
상류층 인사들은 황녀를 상당히 반기곤 했다. 지위만으로도 모임의 품격을 높여 주거니와, 황녀에게서 느껴지는 의연하고 당당한 위엄은 타인의 호감을 끌어냈다.
황실에서는 차근차근 결혼식을 준비했다. 황후궁에 전면 대공사가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식을 올릴 그레이트 홀도 완전히 뒤집어엎었다. 공사를 기일 내로 진행하기 위해 관리들은 매일 야근하면서 과로에 시달려야 했다.
반면에 결혼에 관한 화제는 바람 많은 날의 억새풀처럼 어지러이 술렁거렸다.
결혼을 공표한 초기에는 레테이시아 황녀가 케츠모리스 공작보다 객관적으로 낫지 않느냐는, 순전히 개인적인 평가에 근거한 잡담이 흔했다.
황녀와 모종의 친분 관계가 있는 듯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소문이 만들어졌다. 속사정을 사람은 휘둘리지 않았지만 어중간하게 풍문을 주워듣는 사교계 인사들은 말을 보태어 퍼뜨리기도 했다.
그래 봤자 황제가 강경한 태도를 보이니 구석에서 쑤군거리다가 끝나곤 했다.
에디스는 황녀의 지인보다 훨씬 지명도 있는 귀족과 친분을 쌓았다. 외곽에서 말을 만드는 황녀와 비교한다면, 핵심 인사를 꽉 잡는 에디스가 물밑 다툼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사실 경쟁이 이루어질 만한 사안도 아니었다. 다만 에디스와 클라이드가 매우 불쾌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