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다음도 없을 것이네. 나는 내 황후에게 신실한 남편이 될 생각이거든.”
“폐하, 그래도.”
“앞으로는 찾아오지 말게.”
“폐하…….”
“황녀는 하루빨리 체르헨으로 돌아가 주길 바라네. 내 결혼식에 초청할 체르헨의 귀빈으로는 그대가 아닌 다른 사람이면 좋겠군.”
대답도 듣지 않고 뒤돌아섰다. 에디스의 손을 잡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겨우 화친 조약을 맺은 양국 사이에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도 괜찮으려나. 지켜만 보기로 약속했던 에디스는 속으로 조마조마했다.
뒤에서 바락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제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았습니다!”
잠깐이나마 클라이드의 속도가 늦춰졌다. 하지만 아주 잠깐이었을 뿐이다.
“체르헨의 사절로서 책무를 마치고 돌아가겠습니다. 부디 제 아버지의 면을 봐서라도 쫓아내지는 말아 주시길 바라…….”
황녀의 날카로운 음성이 멀어져 마지막 말은 들을 수 없었다.
아침 식탁에 앉으니 진이 다 빠졌다. 황녀와 짧은 만남을 가졌지만 정신력의 소모가 굉장히 컸다. 에디스가 커다란 글라스에 물을 가득 담아 들이켜자 클라이드도 똑같이 따라 했다.
입맛이 뚝 떨어져서 음식이 좀체 줄어들지 않았다. 그녀는 접시 구석을 포크로 콕콕 찌르며 딴청부렸다.
클라이드는 자신의 마른 뺨에 살을 붙여야겠다는 일념으로 꾸역꾸역 식사를 입에 밀어 넣었다. 음식 먹는 로봇이 되어 콩과 달걀을 곁들인 스테이크를 해치웠다.
“레테이시아 황녀는 어떤 사람이에요?”
그녀는 주스를 조금 홀짝이며 물었다.
“관심 주지 마.”
“제대로 알아두는 편이 낫겠어요. 저렇게 강경한 태도로 보면 체르헨에 쉽게 돌아갈 것 같지도 않고요.”
껄끄러워하는 클라이드를 거듭 졸랐다.
그는 황녀에 관한 화제를 입에 올리기조차 싫어했지만 에디스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자신의 관점을 털어놨다.
황녀는 작년 총사 대회 때 라그란드에 왔다가 이내 체르헨으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전후 협상이 이루어지면서 화해의 의미로 다시 왔다. 특별히 협상에 관여하지는 않았다. 양국 간의 대립적 관계를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
체르헨의 황제가 유난히 아끼는 혈육으로서 학식도 높고 영리한 황녀라고 하던데, 그 점에 대해서는 클라이드가 별로 인정하지 않았다.
“라그란드 제국의 황후 자리를 노리는 건 이해가 가. 하지만 자꾸 내 심기를 건드리면 평화는커녕 분위기가 다시 냉각할걸.”
“그건 그러네요. 황녀는 고민도 될 것 같아요. 계속해서 당신에게 접근을 시도해 보느냐, 다 관두고 결혼을 축하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드느냐.”
“눈치가 없는 건지. 에디스와 나 사이를 그렇게도 모르나? 어딜 감히 끼어들려고.”
“내가 이제야 귀국해서 허점으로 봤을 수도 있어요. 황녀의 생각도 아예 엉뚱한 것만은 아니에요.”
클라이드와 자신의 끈끈한 유대관계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그가 공개적으로 애정 행각을 벌인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국정 회의에서 민망하게 그가 에디스의 손을 쥐고 회의했다는 걸 과연 황녀가 몰랐을까? 아마 미리 포섭한 귀족에게서 전해 들었을 테지. 그런 정황을 불사하고라도 어마어마한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황후 자리를 포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에디스가 신경 쓰지 않게 해 줄게. 강제로라도 황녀를 돌려보내 버리든지 해야겠어.”
“웬만하면 좋게 해결해요. 황녀도 때가 되면 알아서 포기하겠죠.”
아무렇지 않게 굴려고 했는데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옆구리가 콕콕 쑤셔서 방에 돌아가 쉬기로 했다.
한가로운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봄날, 에디스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클라이드의 간호를 받으며 오전부터 침대에서 뒹굴었다.
* * *
페릴랜드라 불리는 섬은 원래 한적한 어촌이었다.
고기잡이로 생계를 잇는 가구가 드문드문 흩어져 있을 뿐, 딱히 육지를 오가는 사람도 적었다. 그래도 섬의 규모가 제법 커서 이곳의 우두머리는 촌장보다 한 단계 높게 도주로 불렸다.
자급자족하며 평화롭게 살던 섬은 어느 날 갑자기 독립된 나라가 되었다.
군대가 밀어닥치고 높은 귀족이 배를 타고 잔뜩 들어왔다. 군인 중에는 부상을 입은 자가 많았다. 전투에서 연전연패한 바람에 사기가 바닥을 찍었고 군기도 엉망이었다.
돌아갈 고향을 잃은 사람들은 서로를 헐뜯었으며, 상대를 가리지 않고 공격했다. 오랫동안 섬에서 살아오던 어부의 가족이 공격당하기도 일쑤였다. 민심은 흉흉해졌다. 섬은 나날이 처참한 지옥으로 변해 갔다.
설상가상으로 식량마저 동이 났다. 육지로 연결되는 해상 보급로가 끊긴 결과였다.
페이튼의 식탁에도 형편없는 음식이 올라왔다.
“이 시커먼 건 뭐지?”
퀭한 얼굴의 시종에게 물었다. 시종은 배고파 쓰러질 듯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감자입니다. 작년에 캐서 땅속 저장고에 묻어놨던 거라고 합니다.”
“저장은 무슨. 완전히 썩은 감자이지 않나.”
버럭 성을 내며 삶은 감자 접시를 밀어냈다.
“다른 걸 가져와라.”
“이것뿐입니다.”
“네가 죽고 싶구나. 사람이 먹을 만한 걸 내어오란 말이다.”
더는 페이튼의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는 시종이 반항적인 눈빛을 번뜩였다. 물러설 곳이 없는 섬에서 생명의 위기를 느낀 탓이었다. 최근 들어서는 시종뿐만 아니라 누구나 비슷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
“제 목을 치신대도 별수 없습니다. 그럼 이 감자는 물리시는 겁니까?”
“이딴 걸 어떻게 먹나!”
“그럼 제가 감사히 먹겠습니다.”
따박따박 대꾸한 그가 접시를 가져가 버렸다. 그래도 페이튼은 시종의 오만불손한 태도를 어쩌지 못했다. 이곳은 지휘체계가 완전히 무너져 버려서, 부리는 자를 통제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페이튼은 도주가 살았던 저택을 점유하고 있었다.
이름만은 그럴듯하게 황궁으로 불렀다. 덕분에 가장 상황이 나았지만, 최상의 환경이라고 할만한 게 이 지경이었다.
함께 독립 전쟁을 펼쳤던 빅토르 백작은 전쟁 중에 죽었다. 디트리안 백작은 패퇴해 섬으로 들어오는 도중에 자살했다. 다른 동지들도 거의 다 명을 달리했다.
페릴랜드 독립에 쓰였어야 할 막대한 자금은 대부분 클라이드에게 빼앗겼다.
‘내 돈. 내 재산. 어떻게 얻은 것들인데.’
서류상의 재산은 아직도 상당히 많았다. 죽은 귀족의 재산을 모조리 페이튼이 넘겨받은 덕분이었다. 그래 봤자 실제로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사실상 라그란드 제국에 있는 재산 목록은 휴짓조각이었다. 클라이드가 몰수해서 황제령으로 선포했다.
다른 대륙에 있는 재산은 그나마 온전했다. 하지만 먼 바다를 가로질러 와야 했다. 그것들이 어느 세월에 먹이를 물어다가 페이튼의 입에 넣어 줄지 막막하기만 했다.
심지어 신대륙을 출발하는 선박은 대륙에 동란이 벌어진 상황을 알지도 못할 것이다. 당연히 라그란드 제국의 어느 항구에 입항하겠지. 그러면 고스란히 클라이드에게 빼앗기게 되어 있다.
페이튼은 처참한 절망감에 빠진 채 주린 배를 부여잡았다.
백기를 들고 클라이드에게 무릎을 꿇는 길밖에 없는 현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사형이었다. 먼저 자살한 디트리안 백작이 차라리 현명했던 거다.
‘나도 그냥 깔끔하게 생을 끝낼까?’
항복하면 유일하게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이 섬에 고립된 사람들이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죽게 생겼는데 그런 걸 챙겨 줘야 하나? 페이튼은 벼랑 끝에 선 와중에도 코웃음 쳤다.
침실로 돌아가 낡은 책상의 서랍을 열었다.
쓸모없는 각종 서류 더미에 묻혀 단검이 놓여 있었다. 날카롭게 벼려 두어 쉽게 목을 그을 수 있는 무기였다.
그때 문득 단검에 깔린 서류 제목이 눈에 띄었다.
「결혼 증명서」
에디스와 결혼했다는 위조 서류를 만든 다음, 널리 공인받기 위해 체르헨에 사본을 보냈다. 하지만 그 심부름꾼도 연락이 끊겼다. 수도의 시청에서 결혼 인정을 받았는지, 황궁까지 증거를 밀어 넣었는지 페이튼은 알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에디스를 배에 태워 보내지 말 걸 그랬다. 클라이드에게 도로 빼앗길까 봐 꼭꼭 숨겼더니 자신도 써먹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페릴랜드 군대가 이렇게나 허무하게 밀릴 줄 몰랐다.
‘에디스……. 전장에 내내 끌고 다닐 걸 그랬군.’
지나고 나서 더 좋은 방법이 떠올랐지만, 이미 때는 늦어 버렸다.
긴 초록 뿔 땅이 중립을 지키며 초반의 전세에서 그에게 유리했던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했다. 에디스는 훨씬 더 빼먹을 게 많은 여자였다. 다시금 애석한 심정이 치밀어 올랐다.
페이튼의 시선이 서류에서 단검으로 돌아왔다.
당장 검을 뽑기에는 자신이 너무 아까웠다. 불세출의 인재였던 제가 이렇게 허무하게 스러지다니.
스스로 너무 불쌍해서 눈물이 흘렀다.
절망을 품어 굳게 그러쥔 단검으로 목을 그었다.
* * *
단단히 작정한 클라이드는 전쟁에 나가는 장수처럼 옷소매 아래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벼르고 별러 준비한 마사지 데이!
특별 수업도 받았고 동방에서 온 귀한 미용액도 구했다. 장소까지 따로 마련해서 전문 마사지숍을 방불케 했다.
그는 에디스의 쌓인 피로를 자신의 손으로 풀어 줄 기대에 부풀었다. 생일 선물을 열 개쯤 받은 아이처럼 눈망울이 초롱초롱 빛났다.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렀다가 에디스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보고 소리를 멈췄다. 북받치는 흥을 이기지 못한 멜로디였다.
“뭐가 그렇게 즐거워요?”
“당연히 즐겁지. 앞으로 에디스의 몸 관리는 나한테 맡겨.”
에디스는 호언장담하는 그를 흘겨보면서도 내심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저리도 좋을까. 누군가에게는 노동이고 직업일 텐데. 하지만 클라이드에게는 꼭 하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유희 거리였다.
몸에 딱 맞고 쿠션이 딱딱한 침대에 올랐다. 이미 세 번 씻은 손을 물수건으로 다시 닦은 클라이드가 갈고리처럼 입꼬리를 위로 휘어 올렸다.
“엎드려야 해.”
시키는 대로 몸을 뒤집었다.
“옷을 입으면 오일을 바를 수 없겠지? 이건 내가 도와줄게.”
언더 드레스 차림이었던 그녀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귀국한 지 보름째 되어가는 동안 옆구리의 흉터를 들키지 않았다. 언젠가는 들통날 것이기는 해도, 되도록 늦게 보여 주고 싶어서 여태 감추며 미뤄 왔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그동안 수차례 위기가 있었다.
같은 침대를 쓰면서 날마다 뜨거운 어른의 시간을 보냈으니, 여태 안 들킨 게 기적이었다. 에디스는 오랜만의 잠자리에 어색하다며 불을 전부 꺼 달라고 부탁했다. 덕분에 겨우 비밀을 유지했다.
하지만 전신 마사지를 하면서 흉을 숨기기는 어렵겠지.
내보이려면 가장 기분 좋을 때가 낫기는 하다. 바로 지금이 최적의 순간이다.
그래도 은근슬쩍 넘어갈 욕심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작은 가능성을 남겨 두고 클라이드를 몰래 곁눈질했다.
“오일은 등에만 바르고 싶어요.”
“왜?”
“앞은 민망하니까요.”
“우리 사이에 가릴 게 뭐 있어.”
“빤히 쳐다보면 거북하잖아요. 게다가 너무…… 야하다고요.”
더듬거리는 말투를 들은 클라이드가 빙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