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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119)화 (119/129)

119화

실제로 들어 보니 꽤 묵직했다. 자주 쓸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게다가 디테일이 뾰족하고 직선적이어서 에디스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클라이드가 들면 더 멋질 것 같아요.”

황금관은 수십 개쯤 됐다. 보물은 많아도 요즘 트랜드에 맞으면서 자신의 분위기에도 어울리는 건 찾기가 힘들었다.

고르고 골라 마음에 드는 걸 두어 개 선택했다. 연말 파티에서 쓰면 딱 좋을 것 같았다.

그 밖에도 손바닥만큼 큰 망토 장식이라든지, 어깨 폭을 다 덮는 화려한 목걸이라든지, 열 손가락에 세트로 끼는 반지라든지, 허리가 삐끗할 정도로 무거운 허리띠 같은 것도 골라 담았다.

나중에는 너무 많이 봐서 황금이 똥처럼 보였다. 세상의 모든 귀금속이 다 모여 있다 보니 금은 그냥 보석의 모양을 잡아 주는 틀 같았다.

에디스는 지칠 때까지 보물 쇼핑을 했다.

“하루 만에 다 못 보네. 내일 또 오자.”

“아아, 이젠 지겨워요.”

“그럼 오고 싶을 때 얘기해. 지금 고른 건 너무 조금이잖아.”

갖고 나갈 상자가 키보다 높이 쌓였는데 조금이라니. 대체 얼마만큼의 분량을 예상했기에.

황궁 보물고를 탐험하고 돌아온 후에는 또 다른 일정이 있었다.

수도의 내로라하는 보석 세공사를 만나야 했다.

우선 가장 유명한 장인부터 초빙했다. 이 사람 이후로도 줄줄이 면담 약속이 잡혔다.

장인이 가져온 샘플들과 포트폴리오 노트를 훑어봤다. 클라이드와 머리를 맞대고 보석 디자인 스케치를 한 장 한 장 살펴보는 동안 그녀는 그림이 실제 보물로 만들어질 기대에 심장이 콩닥거렸다.

동시에 새삼스러운 기분도 들었다.

바로 작년까지만 해도 빚에 허덕였는데 언제 이렇게 달라졌지.

납치되어 신대륙으로 떠날 때쯤만 해도 약간의 빚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전쟁을 치르는 동안 긴 초록 뿔 땅에 많은 사건이 벌어졌다.

전장과 수도를 오가는 물자와 인력이 수백 배쯤 늘었다. 수도와 가장 가까운 항구인 긴 초록 뿔 항구에는 선박이 넘쳐났다.

원래 항구 이용료가 가문의 재정으로 볼 때 적은 수입이 아니었지만, 전쟁의 와중에는 푼돈에 불과하게 되었다. 유동 인구가 엄청나게 늘고 그에 따라 시장도 많아졌다. 사업을 벌이는 자는 거의 다 항구를 거쳐 갔다.

그야말로 대호황이었다.

물론 에디스에게 조금 아쉬운 점도 있었다. 그때 자신이 영지를 손수 돌볼 수 있었으면 더블로 벌었을 텐데.

전쟁이 끝난 후에도 항구 인근은 여전히 성업 중이었다. 케츠모리스 가문도 마이너스 재정에서 돈방석 재정으로 돌아섰다.

따라서 클라이드가 부른 보석 세공사가 아주 비싼 장신구를 추천한다고 해도 지레 주눅들지 않았다. 가난뱅이에서 황후가 되어 황실의 재산을 펑펑 쓰는 꼴이 아니란 말이다. 물론 에디스가 쓸 예물은 그가 지불하겠지만, 자신도 클라이드에게 근사한 예물을 안겨 주고 싶었다. 그럴 만한 재력이 생겨서 무척 뿌듯했다.

“이보게, 폐하께서 쓰실 만한 물건도 추천해 주겠나?”

장인에게 묻자, 그자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떨궜다.

“그, 그런 말씀은 미리 듣지 못해서……. 황후 폐하를 위한 보물만 준비해 왔습니다.”

“하루빨리 준비해서 내게 보여 주게. 폐하의 품격에 어울리는 물건을 기대하겠네.”

클라이드는 장인보다 더 놀랐다. 무슨 소리냐는 듯 그녀의 팔꿈치를 당겼다. 이런 전개를 전혀 예상치 못했던지, 황금의 눈동자를 크게 키우면서 당황스러워했다.

“갑자기 내 것은 왜?”

“폐하께 예물을 드리고 싶어요.”

“하지만 나는 이미 많아. 새로 제작할 필요는 없어.”

“우리 결혼이잖아요. 기념으로 오래 간직할 만한 걸 만들면 좋으니까요.”

“결혼 예물은 내가 해 줄 거야. 에디스는 맘 편히 고르기만 해.”

“에이, 나 혼자 결혼하나요?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지.”

너스레를 떨면서 눈꼬리를 예쁘게 접어 웃었다. 짐작조차 못 했던 듯한 그의 반응이 만족스러웠다. 그녀의 옷소매를 잡은 채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감촉도 마음에 쏙 들었다.

클라이드는 어쩔 줄 모르고 한동안 어벙하게 있었다. 그러다가 다짜고짜 입술을 쭉 내밀었다.

기습 뽀뽀에 당한 에디스는 고개 숙인 장인을 흘끔거리며 입 주변을 손으로 덮었다.

“남 앞에서는 이러지 말죠, 우리?”

“미안. 참을 수가 없어서.”

“지난번에도 실수인 척하더니.”

“그러게. 앞으로도 자주 미안해질 것 같은 예감이 강력하게 드네.”

손으로 가려지지 못한 귓가에 한 번 더 입맞춤이 지나갔다. 이젠 아예 노골적이네. 누가 보든 말든 그의 꽁냥질에는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았다.

포트폴리오가 무릎에서 떨어지려고 했다. 그가 때맞춰 낚아채어 살펴보던 페이지까지 후루룩 넘겼다.

다양한 디자인의 황후 왕관들이 그려져 있었다. 전부 다 눈 돌아가게 대단해 보여서 마음에 든다는 말조차 하기 부담스러웠다. 이걸 제작했다가는 과거 어느 나라의 허영기 많던 황후처럼 자리에서 내쫓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마저 들었다.

“이거 어때? 중간 부분은 저쪽 모양을 따와서 수정하면 좋겠군.”

그런데 클라이드가 되게 진지했다.

“액세서리 세트가 더 쓸모 있을 것 같아요. 왕관은 아까 찾은 것도 훌륭하니까요.”

“윗사람이 쓰던 물건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나는 에디스만을 위한 보물이 있었으면 해. 처음부터 끝까지 네 취향대로 만들면 좋겠어.”

“보물은 소모품이 아니잖아요. 물려받는다고 중고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싫어. 네가 처음 쓰는 예물이 있어야 해.”

팔꿈치를 붙들었던 손길은 어느새 그녀의 허리를 살갑게 두르고 있었다. 늘 하는 포즈라서 이젠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 낯뜨거워하는 사람은 장인뿐이었다.

에디스는 어깨로 그를 툭 치며 작은 소리로 귓속말했다.

“클라이드는 떼쟁이야.”

황금안이 절반 가려지도록 그가 유연하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

허락을 받은 클라이드는 전투적으로 포트폴리오를 뒤적거렸다. 황금관과 함께 풀세트 장신구도 신중하게 골랐다. 스케치의 어느 부분이 아쉬운지 구체적으로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다.

당대의 명인이라고 불리는 모든 장인의 포트폴리오를 확인한 후, 최종적으로 하나를 결정해 실물 제작에 들어갈 것이다.

황후의 관은 제작 기간이 적어도 3년 이상이었다. 장신구 세트도 빨라야 2년이었다. 그래서 클라이드는 1년 내로 완성할 수 있는 예물을 또 따로 골랐다.

에디스의 뇌리에 장착된 계산기가 쉼 없이 덧셈을 했다. 걱정도 차곡차곡 쌓여 갔다.

“이러다가 나 쫓겨나요.”

“누가 에디스를 쫓아내지?”

어딘가에 적이 도사리고 있는지 염려하느라고 그가 갑자기 눈두덩이에 힘을 줬다.

“함부로 황실 재정을 낭비했다가는 여론의 지탄을 받을 거라고요.”

“그럴 일 없어. 절대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허영덩어리로 낙인찍히고, 황후 자격이 없다면서 꺼지라고 하면.”

“걱정도 많네. 내가 장담해. 에디스는 분명히 추앙받는 황후가 될 거야.”

“아닐지도요.”

볼일을 마친 장인이 짐을 챙겨 물러났다.

단둘만 남게 되자 클라이드는 맺힌 한이라도 풀듯이 그녀를 다리 사이에 앉혔다. 뒤에서 끌어안은 채 연달아 입을 맞췄다. 옆쪽 목선을 따라 아래에서 위로 촘촘히 입술을 찍은 후 귓가에 이르렀다. 달콤한 한숨이 둘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남의 눈이 있든 말든 잘만 스킨십하던데. 그러고도 부족했던지 클라이드는 품 안의 그녀를 조몰조몰하느라고 바빴다.

“에디스, 재정 문제는 정말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엄청난 고가의 보물인데 어떻게 넙죽 받겠어요.”

“그런 계산을 하는 것만으로도 우선 허영덩어리는 될 수가 없고.”

말을 받아치려는 그녀의 입술을 클라이드가 보드라운 키스로 눌러 막았다.

“당장 체르헨에서 받아 낼 전쟁 배상금만 따져도 예물과는 비교도 안 돼. 황실 재정이 바닥나는 사태는 없을 거라는 뜻이야.”

“…….”

“그리고 구 귀족 놈들한테 몰수한 재산은 훨씬 많아. 황실 소유의 영지가 지나치게 넓어서 골머리를 앓을 지경이라니까.”

“…….”

“무엇보다 에디스는 제국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잖아. 노예 제도가 달라지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대륙에 분위기가 바뀔 거야.”

“…….”

“알았지? 그러니까 결혼식 날짜에 맞춰 완성할 수 있는 예물도 추가로 주문할게.”

“클라이드…….”

“나 지금 떼쓰는 건데.”

저는 할 말 다 하면서도 에디스가 뭔 말만 할라치면 쪽쪽거렸다. 응석받이가 다 되어서 그녀에게 몸을 비볐다.

“고귀한 황후로 받들고 싶어서 너한테 요구하는 거라고.”

온몸으로 절실함을 표현하는 그에게 에디스는 무력하게 끌려들어 가고 있었다. 별빛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클라이드에게 깊이 잠식되었다.

* * *

체르헨에서 온 황녀 레테이시아는 수완이 좋은 데다가 부지런하기까지 했다.

에디스와 클라이드가 새벽 운동을 하고 돌아올 때는 아침 식전이었다. 황제궁 앞에서 기다리던 레테이시아 황녀가 반가운 얼굴로 클라이드에게 문안 인사를 올렸다.

“폐하, 이른 시간에 바깥나들이를 다녀오시네요.”

“어떻게 알고 왔는가?”

싫은 티를 팍팍 내는 클라이드 앞에서도 꿋꿋했다.

“제가 아침 산책을 하다가 폐하께선 어찌하고 계시는지 들렀던 적이 있거든요. 솔직히 여러 번 왔었어요. 오늘은 작정하고 아주 일찍 왔더니 폐하를 뵐 기회를 얻었네요.”

정말 그가 마음을 돌려 이미 정한 결혼을 깨고 자신에게 올 거라고 믿는 걸까? 에디스는 거침없이 말을 붙이는 황녀의 속마음이 궁금했다.

어리석어 보이지는 않는데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딱히 용건이 없으면 이만 돌아가게.”

“폐하의 조찬을 함께할 영광을 주시겠어요?”

“유감이군. 나는 늘 케츠모리스 경하고만 먹어서.”

에디스는 미리 그에게 귀띔을 받은 게 있어서 거북한 대화에 한발 물러나 있었다.

그녀가 귀국하기 전에도 황녀는 이런 식으로 추근거리고, 클라이드는 매번 쌀쌀맞게 내쳤다. 그래도 아예 말을 안 섞을 수는 없었다. 열 번쯤 접견 신청을 받으면 한 번은 만나 줘야 했다.

클라이드는 며칠 전에 지루한 만남을 가졌으니 황녀가 무슨 짓을 하든 한동안 접근을 허락하지 않을 셈이었다.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도 레테이시아 황녀가 상냥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럼 다음에 뵐 기회를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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