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쪽팔림을 무릅쓰고 의자에 앉았다. 굉장히 뻘쭘했다. 그렇다고 어명을 거역할 수도 없었다.
황좌와 나란히 놓인 팔걸이의자가 큼지막하고 푹신해서, 너무 편히 앉지는 않으려고 허리를 꼿꼿이 펴야 했다.
탁 트인 회의실이 내다보이는 각도가 참 부담스러웠다.
첫 번째 안건은 역시 황제의 결혼이었다. 정무장관이 어제의 일을 길게 설명하면서 황제와 회의 참석자에게 진행 상황을 전했다.
흐뭇한 분위기였다. 브리핑이 끝나자마자 다들 국가적인 경사를 축하하는 말을 늘어놨다.
기나긴 하례가 오간 후, 문득 누군가가 목소리를 키웠다.
“폐하, 황송하지만 한 가지만 말씀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회의에 참여한 인원의 절반 이상이 예전에는 참석하지 않던 인물이었다. 방금 말씀을 고하기를 청한 사람도 에디스하고는 안면만 조금 있지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다.
시종장이라면 미리 회의의 참석 인원을 파악해야 하지만 에디스가 별실에서 뭣 좀 읽어 보려 할 때마다 클라이드가 뺏어 대곤 했다.
클라이드가 답할 때 그녀는 옆에서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말하라.”
“케츠모리스 경은 분명 제국에 세운 공이 많습니다. 페이튼 일당의 수상한 동태를 파악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벌써부터 클라이드의 눈썹이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폐하의 역사를 함께할 황후로 적합한 분은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폐하께서 국혼을 치르겠다고 공표하셨지만, 이제라도 다시 숙고해 보시면 어떨지요.”
“무엄하구나. 대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올리는 것이냐.”
“제국의 번영을 위해 감히 말씀을 올립니다. 체르헨의 사절로 와 있는 레테이시아 황녀님이 황후 감으로 훨씬 어울린다고 봅니다. 폐하, 부디 재고해 주십시오.”
황좌에서 너털웃음이 터졌다.
“하, 감히.”
지나치게 용감한 신하의 태도가 기이하기까지 했다. 누군가의 사주라도 받았나? 자연스럽게 그런 예상을 하게 됐다.
그자는 황제의 눈 밖에 날 각오를 해야 꺼낼 수 있는 망언을 막무가내로 떠벌렸다. 대체 어디에 믿는 구석이 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아직 공표한 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명령 체계상으로 착오가 있었다면서 빠르게 철회하면 됩니다. 그렇게 해도 폐하의 권위에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겁니다.”
어디 마음껏 씨불이라는 식으로 그가 팔꿈치를 괴고 신하를 지켜봤다.
“폐하, 충심으로 간언합니다. 체르헨은 대국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명실공히 대륙에서 두 번째 가는 나라입니다.”
“…….”
“체르헨과 혈맹을 맺는다면 우리 라그란드 제국이 대대손손 번영을 누리리라 확신합니다.”
“…….”
“그리고 레테이시아 황녀의 인품을 봐도 그렇습니다. 누가 봐도 황후로서 자격과 품위가 넘치지 않습니까. 그 아름다운 자태 하며 자비로운 인덕, 박식한 지성까지. 황녀께서 훌륭한 분이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니 간곡히 청하건대, 폐하께서는 황녀님과 깊은 인연을 맺으시길 바랍니다.”
“레테이시아 황녀가 그대에게 뭘 줬지?”
들을 만큼 다 들은 클라이드가 자신의 귓가를 가볍게 손등으로 문질렀다. 더러움을 닦아 내듯이 고개도 털었다.
“바, 받은 건 없습니다.”
“그럼 협박당했나?”
“아닙니다. 저는 객관적으로 판단해서.”
“근위대장.”
회의실 한쪽에서 장식용 조각상처럼 꼼짝하지 않고 서 있던 남자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어제 오후부터 레테이시아 황녀가 누구와 환담을 나눴는지 알고 있나?”
“저녁에 황녀님께서는.”
당장 보고하려는 근위대장의 말을 끊은 클라이드가 카펫 건너편에서 사색이 된 신하를 노려봤다.
“아 잠깐. 미리 말하자면 뒷조사는 아니다. 근위대장이 궁의 경비를 맡았으니 당연히 체크해야 하는 부분이지. 근위대장, 계속해라.”
“황녀님께서는 저기 있는 알페르 자작과 함께 제3 응접실에서 만남을 가지셨습니다. 제법 오랜 시간을 들여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충심 어쩌고저쩌고를 외치며 용감하게 황제에게 대들었던 자가 소스라치게 몸을 떨었다. 알페르 자작이 저 사람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뵙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어떤 뒷거래를 했다거나 이기적인 욕심을 부린 건 없습니다.”
변명까지 당당하게 하는 걸 보면 역시 용기가 대단했다.
그때 다른 쪽에서 절반쯤 몸을 숙여 예를 차린 후 말문을 연 사람이 있었다.
“알페르 자작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체르헨은 여전히 강국입니다. 그곳에서 황녀님을 우리에게 장기간 사절로 파견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폐하께서 부디 너른 아량으로 헤아려 주십시오.”
근위대장은 하다 만 얘기를 계속했다.
“레테이시아 황녀님께서는 저녁을 궁에서 드시지 않고 외출하셨습니다. 황궁 소속의 마차를 타고 다녀오셔서, 저는 절차에 따라 목적지를 보고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라튼 자작의 저택이었다고 합니다.”
알페르 자작을 두둔하던 자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에디스에게는 낯선 사람이지만, 구태여 묻지 않아도 얼굴에 라튼 자작이라고 쓰여 있었다.
클라이드의 찌푸렸던 미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느긋하게 손사래도 쳤다. 눈앞에 파리가 앵앵거릴 때 쫓아 버리려는 손짓과 비슷했다.
“그래, 맞다. 그대들 의견대로 체르헨이 큰 나라이기는 하지.”
더는 언짢은 말투가 아니었다.
“하지만 땅덩이가 넓다고 내가 그곳의 눈치를 봐야 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체르헨이 우리에게 그다지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지. 내가 전쟁 배상금도 못 마련해서 쩔쩔매는 나라한테 비위를 맞춰야 하나?”
조곤조곤하면서도 똑 부러지는 언변이 회의실에 널리 퍼졌다. 숨소리조차 잦아든 공간에 그의 낮은 음성이 메아리쳤다.
“연모하는 사람을 황후로 들이지도 못할 만큼 날 형편없는 황제로 봤냐는 말이다.”
마지막 단언과 함께 그가 에디스를 돌아봤다.
시선만으로도 강하게 빨아들이는 흡인력이 느껴졌다.
여러 대신들 앞에서, 그것도 국정 회의 도중에 연모한다고 외치는 황제였다. 두 사람의 관계가 소문나기를 원했을 뿐만 아니라 제 입으로 아예 동네방네 떠벌린 지경에 이르렀다.
불타오르는 시선으로 그가 에디스의 손을 잡았다. 의자를 건너온 클라이드의 손이 그녀의 손을 깍지 껴서 나긋하게 움켜쥐었다.
에디스는 순간 두려워졌다. 이 남자가 사랑 타령에 이어 수위 높은 애정 행각까지 벌일까 봐 겁났다. 클라이드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정색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뒤로 빼자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나와 케츠모리스 경의 결혼은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다.”
회의의 안건이 다음으로 넘어갔다. 싸늘하게 냉각했던 회의실의 분위기가 돌아오면서 차츰 대신들 간의 토론이 오갔다. 황녀의 미약한 발버둥은 마치 길을 뽈뽈거리던 개미가 납작하게 밟혀 죽은 것처럼 가소로웠다고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에디스는 내내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는 레테이시아 황녀의 약삭빠른 행보가 마음에 걸렸다. 대처가 아주 신속했던 탓이다.
또한, 국정 회의에 발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를 중심으로 손을 쓴 것도 예리했다. 씨알도 안 먹히는 사람과 뒤흔들 여지가 있는 사람을 구분할 줄 안다는 뜻이었다.
물론 알페르 자작의 발언은 의도가 빤히 읽혔다. 그렇다고 해서 황녀의 능력까지 부족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하루 만에 남의 나라 중신을 두 명이나 포섭하다니. 분명히 대단했다.
황녀를 너무 비약해서 높이 평가하는 걸까?
클라이드의 권력이 워낙 강력해서 비밀리에 배후 조작을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그래서 차라리 탁 까놓고 결혼식을 반대하려는 의도로 읽혔다. 어쩌면 알페르 자작의 목소리는 국정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 황녀의 목소리를 대변하려는 것일 수 있었다.
에디스는 황녀가 일부러 자신의 존재를 감추지 않으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 * *
“내 이럴 줄 알고 서둘러서 결혼을 공표했지.”
으쓱해서 턱을 치켜드는 클라이드가 귀여웠다.
이 남자는 나이를 한 살 먹더니 깜찍한 짓이 눈에 띄게 늘었다. 놀란 토끼 달아나듯이 호다닥 결혼 공표를 해 놓고 자신의 크나큰 업적이라며 자랑해댔다.
“네, 네. 잘했어요.”
“그런데 알페르 자작한테서 힌트를 얻은 게 있어. 행정 착오로 결혼 날짜가 잘못됐다고 하면 어떨까?”
무슨 말을 할지 뻔해서 그녀는 어이없는 한숨부터 새어 나왔다.
“에휴…….”
“빨리 바꾸면 괜찮을 것 같은데. 한 7월 중순쯤 어때?”
“내가 말을 말아야지, 원.”
“별로야? 그럼 7월 말이나.”
둘이서 긴 복도를 걷는 동안 클라이드는 혼자 날짜를 늘였다 줄였다 하면서 에디스와 줄다리기했다.
그들은 황궁 보물고에 와 있었다.
철통같은 경비 시스템과 함께 여러 겹의 잠긴 문을 열었다. 중간부터는 근위병도 따르게 하지 않고 클라이드가 직접 열쇠 꾸러미를 쥐었다. 다양한 형태의 열쇠를 맞춘 후에는 다이얼 번호도 넣어야 했다. 어떤 문은 퍼즐 형태로 되어 있기도 했다.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환경이 고풍스러워졌다. 아주 오래전에 지어졌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마침내 좌우로 띄엄띄엄하게 창고가 늘어선 곳에 도착했다.
어떤 문을 열자 의외로 선선한 공기가 느껴졌다.
환기와 온도 조절이 잘되게 지어진 방이었다. 네모난 블록으로 짜인 금고들이 사방의 벽 전체를 메웠다. 값진 보물이 보관된 비밀 금고였다.
“여기에 네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좋겠네. 천천히 살펴봐.”
클라이드는 차례차례 금고를 열어 그녀에게 보여 줬다.
아주 옛날 물건도 있었다. 고대의 제사에 쓰였을 법한 도구와 투박한 황금관은 라그란드 제국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었다.
“굉장하네요. 이런 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높겠어요.”
“어차피 내 역할은 온전히 보관하는 거지 뭐. 그보다 에디스가 쓸 만한 건 어디에 있을까?”
“이런 보물을 내가 직접 몸에 두르기엔 부담스럽네요.”
“흠, 너무 오래된 것이긴 하군……. 그럼 다른 방에 가 볼래? 실은 나도 하나하나 열어 본 적은 없거든.”
방마다 시대순으로 잘 정리가 되어 있었다.
가장 가까운 시대의 보물이 보관된 방을 찾자 클라이드가 멜로디를 섞어 휘파람을 불었다. 으리번쩍한 것들이 가득한 탓에 당연히 에디스도 심장을 부여잡으며 금고마다 기웃거렸다.
얼마나 신이 나는지 몰랐다. 이 많은 게 다 제 것이라니.
정확히는 자신의 소유라기보다 마음껏 쓸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거지만.
다이아몬드가 빼곡히 박힌 황금 홀을 봤을 때는 정말로 넋이 나갔다. 보물 싫어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이걸 다 써도 된다는 현실에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이거 쓸래?”
클라이드가 선뜻 그녀에게 짤막한 막대 모양의 황금 홀을 안겨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