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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117)화 (117/129)

117화

황녀의 얼굴색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하지만 이런 수치심에 물든 표정은 아랫사람들의 눈까지 닿지 않았다. 외국 사절을 배려한 최소한의 조치였다.

클라이드가 에디스의 손을 끌어와 굳게 잡았다.

“에디스, 우리 결혼식 날짜를 지금 공표해야겠어.”

“폐하…….”

“다음 국정 회의가 열릴 때 중신을 모아 놓고 널리 알리려고 했는데, 그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네. 서두르는 편이 낫겠어.”

“국정 회의라 해 봤자 내일이잖아요.”

“하루나 남았지. 그리고 난 지금 교지를 써야겠어.”

황녀에게 간단히 인사한 후 둘은 곧바로 집무실로 향했다.

무료하게 풀어져 있던 시종들이 급작스러운 황제의 행차에 당황해 벌떡 일어났다. 웬일이시냐는 어리숙한 물음을 던지는 시종이 있어 다른 사람에게 눈총을 받았다.

그때 에디스는 알아챘다. 클라이드가 요즘 집무실에 뜸하게 발길 하는구나. 제가 시종으로 있을 때는 엄청 빡빡하게 굴고 완전 열심히 하더니.

“잠깐만 기다려. 빨리 쓰고 외출하자.”

“급할 거 없잖아요. 국정 회의에서 발표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오늘 작성하고 사인해 봤자 외부에 알리고 공식화하는 날은 내일이 될걸요. 그게 그거죠.”

찌릿 째려보는 클라이드의 눈빛에 서운함이 묻어났다.

“체르헨 황녀가 나한테 하는 행동 못 봤어? 결혼 발표가 당장 급하다고.”

“당신은 별로 대미지가 없던데요. 철벽이던데.”

“그래도 불쾌해. 난 하루빨리 아내 있는 남자가 되고 싶어.”

품절되고 싶어 아우성치는 클라이드가 참 별스러워 보였다.

그는 급한 마음에 글씨가 날아가려는 걸 꾹 눌러 참으며, 황실 기록 보관소에 영구보존 될 공문서를 나름대로 차근차근 깨끗하게 써 내려갔다.

날짜는 거침없이 9월 1일로 적혔다. 다소 이른 듯하지만 될 대로 되라지. 에디스는 신중하게 눈매를 내리깐 클라이드를 담담히 감상했다. 마음속으로는 황제의 결혼식을 성대히 치르기 위해 고생할 신하와 관리들에게 애도를 보냈다.

* * *

오랜만에 만난 에디스의 아버지가 굉장히 반가워했다.

빙의한 몸이라 친아버지로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그가 환영의 포옹을 하자 에디스도 자연스럽게 받아 줬다.

아버지가 본가에 돌아와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녀로서도 먼 시골 저택에서 집사를 하는 그분이 안쓰러워서 좀 더 편한 길이 있는지 알아보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도시에 돌아오니 다시 도박장에 드나드는 모양이었다. 노름 버릇은 절대 못 고친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다. 다만 개인 파산의 전력이 널리 알려진 바람에 새로 빚을 내지는 못했다. 게다가 클라이드가 붙여 놓은 시종이 외출할 때마다 따라붙어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곤 했다.

바쁜 에디스 대신에 집안의 대소사를 처리할 사람으로는 아버지가 딱이지만, 이런 사정 탓에 함부로 권한을 위임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 죄송하지만 우리 집 금전 문제는 회계사에게 맡길게요. 집안일은 대부분 집사를 시키고요. 아버지께는 제가 따로 용돈을 드리면 괜찮으실까요?”

친부를 무시한다고 섭섭해할까 봐 조심스레 물었더니 아버지는 작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노름에 눈이 먼 것 빼고는 유순한 분이었다.

“나야 고맙지. 내가 무슨 행운이 깃들어 너 같은 딸을 뒀는지 모르겠구나. 못난 짓 하는 걸 다 뒷수습도 해 줬잖니.”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앞으로는 도박장에 드나드시면 안 돼요.”

“그래, 꼭 그러마.”

“약속하시는 거예요.”

최대한 말로 설득하고 약속을 받아 냈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를 도박에서 멀어지게 하는 방법은 매섭게 감시하는 시종과 딱 필요한 만큼의 용돈일 것이다.

저택에는 타와누카도 머물고 있었다. 작년에 시내에 방을 따로 얻어 줬는데 장기간 실종되면서 임대 계약을 연장하지 못했다. 그곳에는 다른 사람이 들어와 산다고 했다.

타와누카하고는 따로 용건이 있었다.

마침 클라이드도 온 김에 셋이 티테이블에 앉았다.

흙과 지평선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해 클라이드와 미리 얘기를 나누긴 했다. 하지만 앞으로 제국 차원에서 어떻게 하고 싶다는 포부는 밝히지 않았다. 당시에 노예에게 약속했던 것을 그에게 밝히고 공감을 얻어 낼 때를 노린 탓이었다.

에디스는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던 사람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자세히 설명했다. 다른 대륙을 약탈하고 중노동과 죽음으로 내모는 현실이 얼마나 참혹한지 그녀가 느꼈던 대로 표현했다.

사이사이 타와누카에게 말을 붙여 경험담을 털어놓도록 했다. 에디스의 설득에 현실감을 더했다.

“신대륙 농장이 얼마나 최악이었는지, 그건 실제로 눈으로 보지 않으면 잘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클라이드가 귀 기울여 들었다.

“무엇보다 소모적인 노예 무역이 제국으로서도 그다지 득이 되지 않아요. 장기적으로 봤을 때 자신의 땅에 애착을 가지고 농사를 짓는 정상적인 패턴이 훨씬 유리해요. 이건 내가 나중에 꼼꼼히 득실을 계산해서 보고서로 올릴게요.”

“에디스는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최종적으로는 노예 제도가 사라지는 게 맞다고 봐요. 그 목표를 위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가야겠지요. 나 한 사람의 머리에서 방법이 나오기보다는 같은 뜻을 가진 관리들이 함께 머리를 짜내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노예는 귀족과 상류 계층의 중요한 재산이야. 단번에 제도를 없애기는 어려워.”

“혹시 클라이드는 나와 반대 생각을 갖고 있나요?”

“그렇진 않아. 단지 신대륙 무역 자체가 그다지 라그란드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 더 크게 와닿기는 해. 지금 우리 본국에 노예가 불법이듯이 차츰 범위를 넓혀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행이네요. 나도 노예가 당장 사라지긴 어렵다는 거에 동감해요. 그래서 길게 내다보면서 사업을 추진하고 싶어요.”

팔걸이에 걸친 팔로 턱을 고인 그가 에디스에게 몸을 기울였다. 가까워진 얼굴에는 느른한 미소가 배어 있었다.

“황후로서의 포부를 밝히는 건가?”

“이런 결정은 황제만 할 수 있을 텐데요?”

“아닐걸. 내 치세에서는 황후와 국사를 반반씩 나눠서 처리할 건데.”

“반이나요?”

“빨리 일하고 놀아야지. 아기도 열심히 만들고.”

갑자기 왜 또 아기? 심각하게 정책을 논의하려는 자리에서 클라이드의 머릿속은 꽃밭이었다. 혼전임신은 자연에 맡기면서도 결혼 후 임신, 아예 허니문 베이비를 단단히 노리는 태도였다.

넘어가면 안 돼. 그의 말을 받아 주면 2세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게 될걸.

에디스는 정신을 차리고 바다 너머의 고통받는 이들을 떠올렸다.

“그래서 폐하께서는 소신의 의견을 받아들이시나요?”

“응, 적극 동의해. 네가 신대륙에 가기 전부터 가졌던 태도와 같은 흐름이라서 별로 놀랍지도 않아. 단지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조건이라니요.”

그는 고인 손으로 자신의 턱을 쓸었다. 아직 살이 붙지 않은 턱선에 엄지손가락을 스윽 문지르며 의미심장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흙과 지평선을 에디스의 영지로 하사할까 해.”

의외의 얘기였다. 동그랗게 커진 눈을 깜빡거리며 그녀가 되물었다.

“네? 거긴 이미 황제령이 되었는데요.”

“그럼 황제가 공신에게 포상을 내리는 당연한 순리가 되겠네.”

“하지만 내가 가지려고 점령한 게 아닌데.”

“거기에서 우선 시범 사업부터 벌이면 좋을 것 같아. 흙과 지평선을 모델로 삼아 에디스가 원하는 정책을 펼쳐 봐. 할 수 있는 지원은 다 해 줄게.”

돈 욕심은 많지만 노예 장사로 부자가 되기는 싫었던 탓에 잠깐 꺼려졌는데, 클라이드의 속 깊은 얘기를 듣고 기분이 풀렸다. 아주 끝내주는 생각이었다. 흙과 지평선에 자신의 의도대로 새로운 법을 시행할 수 있다니.

하고 싶은 방향이 금세 여러 가지 떠올랐다. 지역 유지들이 반발할 것도 예상되고 그걸 어떻게 설득하며 손실을 보전해 줄 것인가도 순서대로 머릿속의 고민 목록에 쓰였다.

노예 관리자가 없어도 제 발로 밭으로 돌아가 자신의 먹거리가 될 밀을 가꾸던 노예들이 떠올랐다.

라그란드로 귀향하는 배에 그녀가 오를 때, 사탕을 받았던 소년의 얼굴에는 더는 상처가 남아 있지 않았다.

많은 생각이 담긴 미소가 에디스의 얼굴에 슬며시 떠올랐다.

“고마워요, 클라이드.”

“천만에. 내 옆에 있어 주는 네가 더 고맙지.”

클라이드는 그곳의 참상을 직접 겪어 보지 못했으니 느끼는 바가 다를 테지. 제가 하겠다는 걸 무조건 들어주는 쪽에 가까운 듯도 보였다.

그래도 고마웠다.

에디스는 진심이 담긴 인사와 함께 그의 손을 꼭 쥐었다.

* * *

다음 날은 이른 아침에 환궁했다.

국정 회의가 예정되어 있어 서둘러 회의실에 접어들었다. 황제의 회의실에는 으리으리한 황좌가 놓여 있었다. 상징적인 의미까지 포함해 제국과 황실의 권위를 뽐내기 위해서였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 클라이드가 속닥거렸다.

“내 옆에 의자를 나란히 놔야겠어. 사실은 그동안 에디스가 서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

“지금이요? 하지만 난 아직 황후가 아닌걸요. 결혼하고 나서라도 그래요. 국정 회의에 황후가 황제와 나란히 앉아서 보고를 받는 건 이상해요.”

“내가 하고 싶다는데 누가 말려.”

“클라이드…….”

“나 황제야. 내 맘대로 할 거야.”

혹시 어린애냐는 물음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요즘 그는 매사에 이런 식이었다. 에디스에게 회까닥 돌아 버렸다는 걸 감추지 않았다. 도리어 사방에 과시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시종들만의 티타임에 나타나서 그 닭살을 떨어 놨으니 오죽하랴.

이건 아예 널리 소문을 내 달라고 어필하는 것과 같았다. 시종의 업무 특성상 대부분 인맥이 넓을 수밖에 없었다. 입을 다문다면 심해의 조개처럼 굳게 비밀을 유지하겠지만 떠벌리자고 작정하면 난리가 난다.

덕분에 황제의 강력한 연애 의지가 순식간에 황궁 담을 넘고 내로라하는 귀족과 상류층에 쫘악 퍼졌다.

설상가상으로 어제는 결혼 날짜까지 공개했다.

시청 앞 게시판을 비롯해 도시의 주요 거점에 공문이 붙었다.

따라서 클라이드가 절차와 법도는 잊은 듯 의자를 가져오라고 해도, 아무도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하물며 새로 구성된 국정 회의의 구성원은 전원이 황제의 측근이었다. 충신의 모습으로 웬만해선 반대하는 일 없이 황제의 뜻을 따랐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국가의 대소사에 관해 논쟁을 벌이는 편이 낫지만, 전쟁 직후의 분위기에 힘입어 황제의 손과 발이 될 사람만 회의실에 늘어섰다.

“클라이드, 두고 봐요.”

에디스는 그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이를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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