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116)화 (116/129)

116화

꿈에서 깨어난 클라이드가 아쉬워하며 짧게 한숨 쉬었다.

“맞아. 아기는 있으면 좋지만 에디스가 훨씬 중요해.”

“나도 당신이 중요해요.”

“그러니까 한 가지에만 집중할게.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네가 버거워할지 모르잖아.”

날이 저무는데도 쌀쌀한 한기를 느끼지 못했다. 둘이서 한 덩어리의 몸이 되어 체온을 나누는 탓이었다.

지치지도 않는 입맞춤은 이제 그녀의 목덜미로 내려왔다. 손을 당겨서 푸른 혈관이 비치는 손목 안쪽에도 입술을 꾹 누르곤 했다.

에디스가 깔고 앉은 클라이드의 다리가 따끈따끈했다. 얕은 스킨십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벤치에서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가 자꾸만 꿈틀거리며 그녀를 당겨 안았다.

클라이드가 그녀를 연신 유혹했다.

“내가 알기로는 이 세계에 딱히 피임이 없을 텐데. 맞지요? 황가의 비기가 따로 있는 건 아니죠?”

“황실에서는 주로 임신을 잘하는 비법을 찾지. 피임법을 연구하진 않아.”

“그러면 언제든 아기가 들어설 수도 있는 거잖아요.”

에둘러서 전하는 말뜻을 클라이드는 단박에 이해했다. 땅거미가 푸르게 드리우는 정원에서 그의 안광이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괜찮겠어?”

“…….”

“나 기대할지도 몰라. 벌써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어쩌지?”

“운명에 맡기려는 것뿐인걸요.”

당장 아이의 아빠가 된다고 해도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 줄 것만 같은 클라이드가 진지하게 표정을 굳혔다.

“그래, 운명의 흐름을 따르자. 천문관에 날짜를 따로 받지는 않을게. 별점을 치지도 않고. 그냥 우리의 페로몬 주기만 맞춰서 잠자리를 같이하면 좋을 것 같아.”

“페로몬 주기요?”

“에디스는 따로 약 먹지 마. 내가 조절할 테니.”

먼 여행을 하는 동안 그녀는 히트 사이클이 올 때마다 페로몬 억제제를 먹곤 했다. 그리고 클라이드는 약발이 잘 받지 않아 맨몸으로 버텨 왔다.

“무슨 약을 먹으려고요?”

“에디스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웬만큼 독한 약은 안 듣는다면서요.”

“알아서 할게. 아무튼 앞으로는 네가 억제제로 페로몬을 누르는 일은 없게 할 거야.”

실랑이가 이어졌다. 사실 주기를 맞추기 위해 한 번만 억제제를 먹는다면 웬만큼 독한 약이라도 신체에 별로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대단치도 않은 부분에서 서로 제가 나서겠다고 우겼다.

“차라리 내가 주기를 맞출게요.”

“안 돼.”

“한 번만 약을 쓰면 되잖아요. 뭐 하러 클라이드가 위험을 감수해요?”

“위험하지 않아. 난 건강하거든. 앞으로 에디스에게는 좋은 것만 먹일 테니까.”

“아니에요. 난 클라이드만 믿고 여기에서 사는데, 당신이 병들고 아프면 어떡해요.”

“괜한 걱정을 다 하는군. 이런 얘기가 쏙 들어갈 만큼 튼튼한 모습만 보여 줘야겠는걸.”

툭탁툭탁 입씨름이 이어졌다. 벤치 아래의 풀벌레가 울다 지칠 때까지 서로 자신이 나서겠다면서 큰소리쳤다.

에디스는 넘어가 줄 수 있는데도 얘기를 질질 끌었다. 싸우는 순간이 뿌듯해서였다. 클라이드도 도톰한 입술을 내밀면서 절대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투는 중간마다 깨알같이 입을 맞췄다.

별의 인력을 이길 듯이 빈틈없는 포옹을 받은 탓에, 에디스의 복부가 그와 맞닿아 줄곧 따끈했다.

* * *

“에디스!”

두려움이 깃든 클라이드의 목소리와 함께 벽 너머에서 다급히 달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에디스는 입 안에 머금었던 물을 한 번에 꿀꺽 삼켰다. 잠깐 대답을 못 하는 사이 숨넘어가는 부름이 또 들렸다.

“에디스!”

“아, 왜요.”

활짝 열린 별실 문을 통해 짙푸른 머리칼이 빼쭉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제정신이 돌아온 듯 갑자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 있었군.”

또다. 눈앞에 없다면서 또 그녀를 찾아다녔나 보다.

멀쩡한 듯하다가도 클라이드는 종종 이런 식으로 발작했다. 모든 감각을 에디스에게만 집중하면서 잠깐이라도 있는 곳을 모르는 상황이 생기면 길길이 날뛰었다.

방금 전에는 그가 접견실에 다녀온 참이었다.

넘어갈 수 없는 중요한 접견이 있는데 에디스와 동행하기는 곤란하다고 했다. 누굴 만나는지 나중에 얘기해 주겠다면서 그는 매우 껄끄러운 기색을 띠었다. 그녀도 딱히 캐묻지는 않았다. 황제가 되니 모든 일정을 공유하기는 어려운가 보다 싶은 생각을 했다.

혼자가 된 시간 동안 에디스는 별실에 새로 들어온 자료를 훑어봤다.

거의 대부분이 못 보던 자료였다. 큰 전쟁이 벌어졌던 탓에 바뀐 게 많았다. 제국만이 아니라 대륙 전체가 들썩인 여파로 전쟁 보고서가 가득했다.

클라이드도 저만큼 바빴겠다고 내심 감동하던 차였다.

그런데 그가 절반쯤 돌아 버린 얼굴로 뛰어 들어오니 감동은 차게 식고 한숨만 나올 수밖에.

“나 어디 안 가거든요.”

뻘쭘해진 클라이드는 공연히 딴청을 피웠다. 뭐 마실 거 있나, 혼잣말하면서 커피를 내릴 준비를 했다.

이런 분위기가 자꾸 반복되면 안 될 텐데.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려나. 걱정스러워진 에디스가 그의 분주한 손놀림을 가만히 지켜봤다.

“커피는 조금 전에 마셨어요. 그보다 나 본가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본가?”

“돌아온 후로 줄곧 궁에만 있었잖아요. 집에 들러서 아버지도 뵙고, 쌓인 일도 처리해야죠.”

클라이드의 입매가 평평하게 다물렸다. 말은 안 하면서도 표정으로 싫은 티를 팍팍 냈다.

“시니어 케츠모리스 경을 여기로 부르면 되잖아. 할 일도 될 수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맡겨.”

“말이 쉽지 어떻게 그게 되나요. 집에 가긴 가야죠.”

단정하던 그의 얼굴이 갈수록 불퉁하게 굴곡이 생겼다.

“내일 돌아올게요. 괜찮죠?”

“하루나?”

“고작 하루만이요.”

“안 돼. 기다리지 못할 것 같아. 나는 내가 잘 알아.”

에디스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불안정한 감정이 쉽게 읽혔다. 제 마음속에도 클라이드가 가득하지만, 그는 훨씬 더 에디스를 열망하면서 힘겨워하고 있었다.

기분을 추스르게 하고 싶어서 손을 높이 들어 머리를 쓱쓱 만져 줬다.

“아무리 24시간 딱 붙어서 지내고 싶다고 해도 할 건 해야지요. 다녀올 동안 클라이드는 얌전히 궁에 있어요. 알았죠?”

“싫어.”

“싫어도 해 봐요. 이제 보니 당신, 떼쟁이였네.”

“같이 다녀오자. 떨어져 있을 필요가 없잖아.”

“황제가 이렇게 외출을 자주 해도 돼요? 며칠 전에 산에도 다녀오고선.”

“괜찮아. 여태까지 제국에 이바지한 공만 따져 봐도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 될걸. 한동안 놀아도 된다니까.”

부득부득 우겨 대는 클라이드를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둘이 함께 케츠모리스 저택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하고 외출을 준비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중 어떤 사람과 마주쳤다.

장식이 많고 고상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젊은 여성이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서늘한 매력을 풍기는 미인이었다.

그 사람은 클라이드를 보자마자 표정이 돌변했다. 언제 차가웠냐 싶게 생글생글 화사한 눈웃음을 쳤다.

“폐하, 다시 만났군요.”

유난히 멀찍이에서 걸음을 멈추는 그가 은근히 상대를 꺼리는 태도를 보였다.

“아직 돌아가지 않았군.”

“바쁜 일도 없어서 천천히 움직이던 참이었어요. 이렇게 폐하를 뵙게 되려고 그랬나 봐요.”

누가 봐도 꼬리를 치는 말투였다.

에디스는 황당해서 클라이드의 뒤에서 딱 멈춰 섰다. 저렇게 물정 모르는 사람이 있었나? 궁 안의 사정에 어두운 사람이 분명했다. 자신이 황궁을 비운 틈을 타 황제의 옆자리를 노리려는 듯했다.

어느 집안의 영애일까.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구 세력이었던 귀족파는 이제 싹쓸이되어서 제국에 발을 붙이지 못했다. 전쟁과 맞물려 작위를 수여하거나 몰수할 일이 많았을 테니 에디스가 모르는 가문일 수도 있었다.

조심히 그 사람의 얼굴을 뜯어보며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클라이드가 선뜻 소개해 줬다.

“서로 인사하지. 이쪽은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인 케츠모리스 공작, 이쪽은 체르헨에서 온 레테이시아 황녀.”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녀님.”

“그래, 경이었군.”

정체를 듣는 순간 어디서 봤는지 기억났다. 예전에 총사 대회 결승전을 할 때 잠깐 봤었다. 로열석에서 클라이드한테 엄청 엉기고 친한 척했더랬지.

그때는 잠깐 방문했다가 축제와 연회만 즐기고 돌아갔는데, 이번에 또 온 건가?

외국 사절이면 라그란드의 일반 귀족보다 소문에 어두울 수 있다. 에디스가 황제의 측근이라는 걸 모를 수도 있겠지.

황녀는 왠지 전투력이 높은 사람 같았다. 에디스에게는 시큰둥하게 인사만 받더니 클라이드에게는 유난스럽게 말을 걸고 사근사근하게 굴었다. 너무 쉽게 속이 읽히는 이물질 여조 스타일이었다.

“폐하, 알현을 마쳤지만 제게 시간 좀 더 내주실 수 있을까요?”

방금 클라이드가 에디스를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강조했으니, 기본적인 눈치가 있다면 사적으로도 친밀한 사이란 걸 알 텐데.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1단계 눈치조차 없는 건지.

하지만 이웃 나라 황녀라는 타이틀은 상당히 유용했다.

비록 패전국일지언정 레테이시아는 황녀이고 에디스는 공작이었다. 클라이드에게 다가간 황녀가 별 시답잖은 얘기를 질척질척 늘어놓아도 자신은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무례하게 굴어서 나라 망신을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에디스는 기회를 노려 정중하게 말을 붙였다.

“폐하께서는 지금 급한 일정이 있으십니다. 안타깝지만 레테이시아 전하와 말씀을 길게 나눌 수가 없…….”

“지금 나와 폐하가 얘기 중이지 않나.”

황녀가 무시하듯이 말을 자르며 클라이드에게 사근거렸다.

“폐하, 잠깐 괜찮으시지요?”

클라이드의 표정이 돌변했다. 화난 티가 역력한 채로 황녀에게 서늘한 시선을 던졌다.

“조금 전 그대의 행동은 그다지 바람직해 보이지 못하군. 내 소중한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는 건 넘어가 줄 수 없네.”

황녀는 송구하다는 인사치레만으로 대충 넘어갔다. 그러면서도 그에게 재미없고 부실한 말을 꿋꿋하게 늘어놨다.

“요즘처럼 유난히 좋은 날씨에 새로 피어나는 꽃을 감상하시는 건 어떨까요? 폐하께서 국정을 돌보는 데만 몰두하느라고 건강을 해치실까 두렵습니다.”

“황녀가 봄나들이에 다녀오고 싶다면 그렇게 하게.”

“부족하지만 폐하를 모시고 싶습니다.”

“나는 늘 일정이 차 있어서.”

“일정이 비는 날에 제가 맞출게요.”

그러다가 결국 그가 울컥해 버렸다. 미간을 모으며 불편한 심기를 확 드러냈다.

사실 황녀에게 따로 알현 시간을 마련해 줬으면 충분히 성의 표시가 되었다. 거기에 홀에서까지 붙잡혀 이만큼 얘기도 들었으니 할 만큼 한 거였다.

클라이드는 손짓을 해 주변의 사람들을 멀리 물렸다. 세 사람만 남고 듣는 귀가 없게 되자 분노한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황녀, 무슨 꿈을 꾸는지 모르겠지만…….”

본심이 여과 없이 튀어나왔다. 도를 넘는 황녀에게 그 역시 예를 차리지 않겠다는 의지도 담았다.

“봄나들이든 뭐든, 나는 케츠모리스 경과 늘 함께할 것이네. 다른 이에게 내줄 틈은 없어.”

“폐, 폐하 저는 그런 뜻이 아니오라.”

“혹시 내가 그대에게 눈곱만큼이라도 여지를 줬던가? 황후가 될 사람이 있다고 처음부터 분명히 말했던 것 같은데.”

“……말씀하시긴 했지만.”

“케츠모리스 경이 먼 길을 다녀오느라고 한동안 궁에 없어서 그대가 오해한 것 같군. 이런 일이 또 생기지 않게 아예 못을 박아야겠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