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체르헨과 2차전을 치르게 된다면 보통 큰일이 아니겠지. 그녀는 걸어 들어온 오솔길을 되짚어 허둥지둥 걸음을 옮겼다. 돌담 사이의 작은 문을 빠져나와 가지런히 정돈된 나무 사이들 지났다.
불확실하게 메아리치던 소리가 마침내 명확해졌다.
공작님— 공작님— 수많은 근위병이 팝콘처럼 뛰어다니면서 찾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대체 왜?
놀라움과 충격에 휩싸인 탓에 에디스는 서두르던 걸음을 잠시 멈췄다.
때마침 한 무리의 근위병이 잔디밭과 화단을 짓밟으면서 달려왔다. 제일 앞으로 치고 나온 클라이드가 꽃나무를 걷어찼다. 연이어 폭이 넓은 관목을 뛰어넘었다.
숨넘어가는 음성이 에디스의 귀에 팍 꽂혔다.
“에디스!”
당황스러워서 휘둥그렇게 눈만 굴리는 그녀를 향해 마구 질주해 왔다.
“에디스……. 하, 에디스.”
빛이 내리꽂히듯이 순식간에 좁혀지는 거리 사이로 그의 모습이 명확해졌다.
클라이드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단정하던 머리는 바람에 날려 흐트러졌다. 코트도 어디에 내동댕이쳤는지 셔츠 바람에 비뚤어진 칼라 레이스를 드러냈다.
구두 등이 누런 흙먼지에 덮인 채 에디스의 스커트 아래로 파고들었다.
“하, 흐으.”
거칠게 토하는 숨결과 함께 클라이드가 그녀를 있는 힘껏 제 품에 밀어 넣었다.
속도를 줄이지 못한 탓에 두 사람의 균형이 기울었다. 쓰러질 뻔하다가 그가 나무 기둥에 손을 짚으며 겨우 바로 설 수 있었다.
맞닿은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펄떡거렸다. 조금 놀란 에디스의 심장 박동이 아니었다. 미친 듯이 달려와 그녀를 끌어안은 클라이드의 것이었다.
대장장이의 풀무질처럼 그녀의 목덜미에 뜨겁게 뿜어지는 숨결 역시 보통을 훨씬 웃돌았다. 이렇게 들끓는 상태를 에디스는 얼마 전에 경험한 적이 있었다. 바로 산 중턱에서 재회했을 때였다.
“에디스 대체 왜…….”
그가 말을 잇지 못하고 헐떡거렸다. 귓속을 파고드는 클라이드의 목소리가 왠지 무너질 듯 위태로웠다.
“대체 왜 사라졌던 거지?”
에디스는 갈비뼈가 아릿해져서 몸을 뒤틀어야 했다. 등 한복판을 당기는 그의 손힘도 어찌나 센지 피부에 멍이 들 것만 같았다.
“사라지다니요. 잠깐 산책 나왔던 건데요.”
“말도 없이 나가 버리면, 하, 내가 너무 놀라잖아.”
연신 그녀의 신체를 더듬는 행동에 두려움이 배어났다. 가까스로 호흡이 가라앉은 후에도 손끝이 덜덜 떨리는 게 느껴졌다. 격류가 사라진 자리에 자잘한 감정 조각이 남아 그의 내면을 여실히 투영하고 있었다.
무엇을 겁내는지 에디스도 잘 알았다.
별 너머로 돌아가 버릴까 봐 초조한 것이다.
자신도 늘 그런 기분을 마음의 바닥에 깔고 살기에 클라이드의 행동을 공감할 수 있었다. 지나친 기우라고 탓하지도 못했다.
잠깐이나마 자신이 눈에 보이지 않을 때 그는 얼마나 놀랐을까.
이곳에 에디스가 남아 있지 않고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을까 봐 두려웠겠지. 그래서 자신도 잠깐 바람 쐬려는 것조차 꼼꼼히 알려 두고 움직였다.
“메모 적어 놓은 거 못 봤어요?”
“못 봤어. 어디에 메모를 남겨 뒀는데?”
“피부 관리받았던 방에요. 눈에 잘 띄는 테이블에 바로 올려 뒀어요. 그리고 뒷정리하러 온 궁인에게도 얘기해 뒀고요.”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 바람에 날아간 게 아닐까? 궁인은 제 할 일 하느라고 바쁜지 방에 없었고.”
“아, 창문을 열어 둬서 바람이…….”
에디스는 망연해지고 말았다. 그를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억센 손아귀에 눌려 등이 아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에 떨림을 진정시키기 위해 자신도 그의 목덜미를 팔로 감아 매달렸다. 둘의 상체가 좌우로 진자운동 했다. 클라이드는 진정하지 못하고 흔들렸다.
탁하게 잠긴 음성으로 뒤쪽의 근위병에게 명했다.
“모두 물러가라. 에디스를 찾았으니 이젠 수색을 그만두도록 하고.”
간결한 태도로 고개를 숙인 근위병들이 조용히 자리를 떴다.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황궁이 뒤집힌 게 분명했다. 어림잡아 인근을 오가는 사람을 헤아려 봐도 동원할 수 있는 자는 다 동원한 듯했다.
뜻하지 않게 사고 친 꼴이 된 자신으로서는 좀 민망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클라이드에게 싫은 티를 내지는 못했다. 그 심정이 너무나 와 닿아서였다.
“많이 걱정했군요.”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어. 정말 너무 놀라서.”
겨우겨우 감긴 팔을 떼어 낸 후 그의 퀭한 눈자위를 손으로 더듬어 만졌다.
“잠깐 안 보인다고 이렇게 난리 피우면 어떡해요. 잠깐 기다릴 수도 있었잖아요.”
“미안해. 하지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어. 너는 벌써 여러 번 별 너머로 오락가락했잖아.”
“또 가 버린 줄 알았어요?”
“다른 에디스가 돌아와서 황궁의 낯선 곳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렇게 만나고 보니까 내가 널 난감하게 한 것 같네.”
에디스는 딱히 수긍하지 않고 미소로 때웠다.
“이렇게 집착하면서 널 꼼짝 못 하게 하는 거 싫지?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으면서도 잘되지 않아. 일등 남편감이고 싶었는데 고작해야 감정도 통제하지 못해서 쩔쩔매다니.”
“이유가 있어서 이러는 거니까 괜찮아요.”
“네 표정이 괜찮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걸. 잠깐도 떨어져 있지 못하는 남자는 너무 매력 없잖아.”
“매력 없다니 말도 안 돼요. 클라이드, 방에 돌아가면 거울부터 봐요.”
안쓰러울 만큼 말랐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관 최강의 외모를 자랑하는 클라이드는 어느 모로 뜯어 봐도 잘생기기만 했다.
이런 얼굴로 매력 없다는 망언을 남발하다니. 에디스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우스개 표정을 지어냈다. 그의 얼굴도 조물조물 만져서 눈꼬리를 쭉 내려줬다.
클라이드가 비로소 평소의 분위기를 되찾았다.
“고마워.”
두부 으깨듯이 얼굴을 망가뜨려도 잘생김이 뿜어지면 어쩌란 건지.
“들어갈까요?”
“나 때문에 산책 방해받은 것 같은데, 에디스가 가던 길로 다녀와도 돼.”
“그러면 음……. 조금 전에 꽤 멋진 곳을 찾았는데 같이 갈래요?”
둘이 팔짱을 끼고 수풀 사이의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돌담을 지나 나무들 틈에 외따로 놓인 벤치까지 되짚어 갔다.
저녁이 다 되어 땅거미가 드리웠다.
벤치 아래로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클라이드는 저녁이 깃드는 소리를 방해하지 않으며 살금살금 자리에 앉았다.
좌우에 앉을 공간이 넉넉했지만 에디스는 냉큼 그의 무릎 위로 올라갔다. 몸을 들이밀자마자 그에게 가뿐하게 들려서 무릎에 안착했다. 마침 잘됐다는 듯이 둘러싼 그의 팔 안으로 허리가 쭉 당겨졌다. 둘 사이에 틈이 남지 않았다.
클라이드의 입술이 저녁 그림자처럼 알게 모르게 다가왔다. 고개를 기울인 코끝으로 에디스의 코끝을 야살스럽게 스쳤다.
열정을 담은 입맞춤이 에디스의 입술에 쏟아졌다.
맞닿는 감촉은 다른 감각을 몰아냈다. 시각이나 후각이 입술을 마찰하는 느낌에 압도당했다.
그녀는 자연스레 눈을 감았다. 조용히 끓는 기름과 같은 키스였다. 밤벌레도 울음을 그치지 않을 만큼 열렬함을 갈무리했으나, 마음 깊은 곳까지 교감하는 에디스에게만은 펄떡 뛸 듯이 뜨거웠다.
그는 입맞춤마저도 집요했다.
감각을 나누는 행위에 다른 어떤 것보다 몰두했다. 끈질기게 에디스를 괴롭히고 숨도 못 쉬게 밀어붙였다.
그의 가슴팍을 제법 세게 때려서야 겨우 입술을 뗄 수 있었다.
“클라이드, 아까 팩하면서 했던 얘기 있잖아요.”
“무슨 얘기?”
“결혼식 날짜를 내가 원하는 대로 정했으니, 당신도 원하는 걸 요구하겠다고요. 그거 뭐였어요?”
그가 계속해서 입을 맞추려 했다. 에디스는 고개를 저으며 도망 다녀야 했고, 덕분에 도톰한 입술이 얼굴 전체에 찍히고 말았다.
귀밑머리에 쪽 소리가 나게 키스 당했다.
한결 기분이 나아진 클라이드가 따뜻한 입바람을 귓속에 흘렸다.
“바라는 게 있었지만 이제는 마음이 바뀌었어. 부탁하지 않을 거야.”
“왜요?”
“네가 내 곁에 있어 주는 거야말로 큰일인데 뭘 더 바라겠어. 이렇게 엄청나게 엉겨 붙어 있는 상황인걸. 에디스가 날 참아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지.”
말 한번 되게 예쁘게 하네. 게다가 너무 겸손한 거 아닌가? 일방적인 관계도 아니면서 에디스에게는 마냥 굽히고 들어오는 남자다.
“참아 주는 거 아니에요. 내가 좋아서 안기는 거예요.”
“정말?”
“정말이요. 그러니까 얘기해 봐요.”
무차별 폭격과 같은 키스가 귓가에서 얼굴 중심부로 옮아 왔다. 볼을 문지르듯이 지그시 누르는 입술 감촉과 함께 그가 낮게 웅얼거렸다.
“결혼식보다 먼저 아이부터 갖고 싶어.”
입 안으로 말리는 음색이 조금 쉬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한결 섹시하게 들렸다.
분위기에 휩쓸린 탓에 에디스는 저를 부둥켜안은 남자와 2세를 만드는 미래를 어렵지 않게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었다.
그의 바람이 어찌 보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절실하게 서로를 원하는 데다가 곧 식도 올릴 텐데. 클라이드와 자신이 아기를 갖지 않으면 누가 갖겠어.
“아기요?”
“응, 에디스를 닮은 우리 아기.”
그가 에디스의 뺨부터 턱까지 깃털로 간질이듯이 어루만졌다. 아직 생명이 움트지도 않은 아기가 벌써 보고 싶다는 듯 눈매를 아련하게 좁혔다.
그러더니 잠깐 레드썬에 빠진 것처럼 엉뚱한 소리를 잔뜩 뱉어 냈다.
“상상만 해도 뿌듯해. 너무 귀여워서 진짜 깨물어 버리면 어떡하지? 널 닮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닮으면 더 좋을 것 같아. 그냥 에디스의 분신이라면 무조건 사랑하게 될걸.”
“클라이드. 나 아직 아기 없는데요.”
“몇 명이나 낳을까? 물론 에디스가 하자는 대로 할 거지만 나한테도 의향을 묻는다면 나는 많을수록 좋아.”
“저기. 클라이드?”
“아, 설마 육아 걱정을 하는 건 아니겠지? 황후께서는 아이들을 예뻐해 주기만 하면 돼. 당연하게도 유모가 잔뜩 붙을 테니까.”
“벌써 아이들까지 갔군요. 3남 4녀?”
“그래 줄 수 있어? 나는 대찬성.”
“클라이드의 상상 속 아이들 말이에요. 내가 낳는다는 거 아니고요.”
“그럼 몇 명?”
“부탁하지 않겠다면서요.”
태어날 아기를 떠올리는 듯 그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풀렸다. 에디스가 손을 눈앞으로 휘휘 젓자 움찔 놀란 그가 다시 현실에 초점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