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아니, 그런데 좀 이랬다저랬다 하는 거 아닌가? 국가적인 중대사라면서 열변을 토할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제 맘대로 하래.
한편으로는 클라이드의 바람대로 초대형 규모의 식을 치르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려야 할지 셈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즐거워 미치려고 하는 클라이드를 째려봤다.
“준비 기간이 만만치 않을 테니까…….”
건너편 사람이 침을 꼴깍 넘기는 소리까지 들리겠다. 고요한 카페 테라스에 에디스의 말을 가로막는 이는 없었다. 준비한 기간이 길어지는 까닭을 누구도 묻지 않았다.
그리고 남편 될 사람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올봄 내로는 너무 촉박하고 여름은 덥겠지요. 무난하게 9월부터 11월 사이면 어떨까요?”
“9월 1일?”
클라이드의 미간이 와그작 일그러졌다.
화두를 꺼냈던 타일런은 어느새 대화에서 제외되었다. 해맑은 에디스와 매우 언짢아하는 황제가 주거니 받거니 입씨름을 했다.
“네? 9월에서 11월 사이라고 말했는데요.”
“9월 1일은 너무 멀어. 기다리다가 늙어 죽겠네.”
“첫 번째 날 외에는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 건가요? 3개월 사이에는 91일이라는 날짜가 있습니다만.”
“올해 날씨가 대체로 선선할 거라고 하던데, 8월쯤만 돼도 선선한 바람이 불지 않을까?”
“8월은 쪄 죽어요.”
“아니야. 천문관에서 분명히 하늘을 관측했어. 아마 그랬을걸?”
분명하다는 건지,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는 건지. 뒤죽박죽 말을 섞으며 둘러대는 클라이드가 조금 웃겼다.
“엄청 땀이 날 게 뻔하다고요. 겹겹이 드레스를 껴입고 무거운 장신구도 주렁주렁 단 상태로 온종일 식을 치르면 아마 탈진할걸요.”
“흠, 그러면 안 되지. 8월은 곤란하겠군.”
“애초에 천문관이 8월부터 가을이 될 거라고 말한 적은 있고요?”
따지듯이 묻자 클라이드는 못 들은 척 시선을 돌렸다. 심각하게 고심하면서 테이블 끝을 손가락으로 까딱까딱 두드렸다. 저 버릇은 일생 동안 가나 보네. 예전부터 저러더니.
“9월 1일은 에디스의 남편 될 사람이 안 된대. 너무 멀대.”
“그분은 한창나이시거든요. 몇 개월 만에 늙어 죽지 않아요.”
“하여튼 못 기다려. 차라리 올봄에 해치워 버릴까?”
“클라이드, 저기 창밖을 봐요. 나무에 새순 돋은 거 보이죠? 올봄이 지금이라고요.”
“네 바람대로 스몰 웨딩을…….”
“절대 안 된다던 사람은 어디 갔죠? 국제적인 영향력 어쩌고저쩌고하던 분 말이에요.”
“그럼 규모는 제대로 갖추면서 날이 더워지기 전에 식을 올리면 어때? 유능하고 추진력 있는 신하들이 잘해 주겠지. 시간이 부족하더라도 극복할 수 있을 거야.”
“클……!”
힘주어 이름을 부르다가 말고 멈칫했다.
계속 아옹다옹했다가는 결국 이 자리에서 결혼식 날짜를 정하게 될 것 같았다. 정확한 날은 요목조목 따져 보고 신중하게 선택해야 할 텐데. 클라이드가 자극하는 대로 말을 받아쳐선 안 되겠다는 느낌이 왔다.
고요하기만 한 테이블에는 찻잔 부딪히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둘의 실랑이를 지켜봤다.
뒤늦게 뻘쭘해진 에디스는 애써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만들었다.
“실례했습니다. 제가 잠시 기분이 엇나가서.”
타일런이 절반쯤 흩어진 정신을 추스르며 괜찮다고 대답해 줬다.
황궁 물을 먹을 만큼 먹은 처세술 대가만 모인 덕분에 다른 사람도 이내 태연한 웃음을 흘리며 차를 마셨다.
클라이드가 에디스의 입에 딸기를 넣어 주는 장면을 다들 신경 쓰지 않는 척했다. ‘폐하께서 어떻게 저럴 수가’라는 반응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흔한 연인의 거리낌 없는 행동으로 보아넘기며 여기저기에서 각자 짧은 대화를 나눴다.
물론 에디스도 냉큼 표정 관리를 했다.
타인의 이목이 집중된 자리에서 클라이드가 일부러 도발했음을 눈치챈 탓이었다.
타르트가 입에 들어올 때부터 낌새가 있었다. 황제의 포크질을 마다할 수는 없으니 주는 대로 받아먹어야 했다. 그 뒤로는 서서히 애정 행각의 강도가 올라가는데도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티타임에 오겠다고 한 이유가 이거였나?’
우리 사이를 동네방네 자랑하려고?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데도 불구하고 구태여 보여 주고 싶은 마음?
체통도 없이 헤벌쭉 입을 벌린 클라이드는 엄한 황제가 아니라 여친 자랑에 푹 빠진 남자에 불과했다.
< 13장. 쏘 스윗 >
이 세계에서 혼인이 진지하게 거론되는 기준은 결혼식 날짜였다.
날짜를 못 박고 나면 흔히들 정말 결혼하게 되는 거라고 여겼다. 혼담이 오가는 단계에서는 일이 틀어질 수도 있고 조건이 안 맞을 수도 있어서였다.
이해관계가 중요한 황실의 혼사는 더욱 심했다. 몇 년 전에 결혼한 체르헨의 황태자만 해도 그랬다. 최종적으로 황태자비를 맞이하기 전에 혼담만 오가다가 깨진 후보가 여럿이었다.
에디스도 마찬가지 경험이 있었다. 페이튼에게 청혼서를 받고 조건을 맞추는 단계에서 파국을 맞이했다. 이런 건 귀족 가문에 으레 있는 일이었다.
따라서 클라이드는 서둘러 결혼식 날을 고르려고 애썼다.
“다음 국정 회의에서 우리가 정한 날짜를 공표할까 해.”
얼굴에 팩을 한 채 누운 에디스에게 그가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값진 영양액을 듬뿍 섞은 팩이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때를 틈타 허를 찌른 것이다.
에디스가 입을 열어 대꾸하려고 하자 제리언 자작 부인이 질색했다. 팩이 조금 흘러내린 것도 참아 주지 못하고 붓에 재료를 듬뿍 묻혀 입 주위를 덧발랐다. 이제 입을 벌리기만 해도 씁쓰레하고 느끼한 맛이 뭉텅이로 입 안에 흘려들 지경이 되었다.
그녀가 피부 관리를 하는 동안 클라이드는 머리를 짧게 잘랐다. 귀 아래로 내려오는 길이가 거북했던지 금세 미용사를 다시 불렀다. 찰랑거리는 것도 멋있지만 단정하게 올려 친 헤어스타일이 그에게 한결 잘 어울렸다.
머리 손질을 마친 그가 꼼짝하지 못하는 에디스를 들여다봤다.
“네가 하자는 대로 할게. 좋은 남편은 아내 말을 잘 듣는 법이니까 9월 1일에 식을 올리기로 하자.”
“웁웁…….”
제가 언제 9월의 첫째 날을 원했더냐고 눈빛으로 공격했다. 하지만 그에게 좀체 타격을 주지 못했다.
“이번에는 내가 크게 양보했으니까 다음엔 에디스가 양보할 차례야. 나도 바라는 게 있어서 말이지.”
“웁!”
“그렇게나 궁금해? 기대되나 보지?”
잔뜩 흥에 겨워 날짜를 정하고 에디스에게 다음 양보까지 받아 낸 클라이드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고개를 돌려 째려보려 하자 제리언 부인이 에디스의 양쪽 귀를 살짝 눌렀다. 움직이면 팩을 하기 곤란하다는 염려도 빼놓지 않았다.
약 올리듯이 클라이드가 옆에서 속닥거렸다.
“나중에 알려 줄게. 이따가 밤에 단둘이 있을 때.”
잠시 후 다른 시녀들도 방에 들어왔다. 카티네스 백작 부인이 상기된 표정으로 황제에게 허리를 숙였다.
“폐하, 명하신 대로 준비해 놨습니다. 오메가 여성을 위한 전신 마사지를 배우고 싶다고 하셨지요? 제가 어제 집에 돌아가자마자 남편에게 연습시켰습니다.”
다른 시녀들도 같은 얘기를 했다. 각자의 남편 세 명이 마사지 실험 대상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래? 지금 만나 볼 수 있겠는가?”
“예, 폐하. 모시겠습니다.”
여전히 팩에 뒤덮여 있는 에디스를 돌아본 그가 살가운 말투로 물었다.
“같이 갈래?”
저도 모르게 눈썹이 삐죽 솟아올랐다. 남자들 실습하는 곳에 같이 가자고? 눈빛으로 한 대 때리려는 그녀를 지켜보며 클라이드가 시원하게 웃었다.
“역시 좀 그렇지? 에디스를 혼자 두고 다녀오려니까 영 마음이 쓰이네. 내가 얼른 배우고 돌아올게.”
누가 들으면 몇 년짜리 장기 유학이라도 떠나는 줄 알겠다. 고작해야 다른 방에 가서 마사지 실습을 하는 건데.
시녀들은 에디스와 편히 어울릴 수 있도록 모두 오메가였다. 반면에 각자의 남편들은 베타도 있고 알파도 있었다.
클라이드는 다양한 마사지법을 골고루 익히고 싶어 했다. 에디스가 원래 베타였다가 뒤늦게 오메가로 발현한 탓에 베타의 방식에도 관심이 많았다. 내친김에 귀족가의 비기를 제대로 배워 보겠노라며 야심 차게 발길을 돌렸다.
제리언 자작 부인만이 홀로 남아 에디스의 피부 관리를 마무리했다. 팩을 닦아 낸 후에는 피부 진정을 위한 화장수를 대여섯 가지쯤 발랐다.
다 끝나니 어느덧 시간이 훌쩍 지나 해가 질 무렵이 되었다.
“수고 많았어요, 제리언 부인.”
“고생하셨습니다, 공작님. 저도 마사지하는 곳에 다녀와도 될까요?”
“그러세요. 다들 함께 있나요?”
“옷을 벗고 해야 하는 수업이라서 아마 세 군데에 따로따로 있을걸요. 저도 들어가지는 않고 밖에서 기다리면서 필요한 게 있으면 도와주려고요.”
자작 부인이 사라지자 에디스는 뻐근해진 몸을 스트레칭했다. 예뻐지는 건 되게 힘든 일이었네. 굳은 어깨를 두드리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창을 활짝 열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다.
춥지 않은 날씨에 바람도 잠잠했다. 이제 막 노을이 내리기 시작하는 창밖 정원에는 움트는 새싹이 깜찍한 싱그러움을 자랑했다.
클라이드는 언제 돌아오려나.
꽤 오래 기다려도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바람에 공연히 시간을 확인하게 됐다. 아무것도 안 하고 노는 건 참 좋아하지만 지루한 건 별로였다.
‘바깥바람이나 쐬고 와야겠네.’
자신이 나가 있는 동안 그가 올지도 모르니 테이블에 메모를 남겨 뒀다. 가까운 정원에 잠깐 나갔다 오겠다는 내용이었다. 팩 재료를 정리하러 들른 궁인에게도 행선지를 밝혀 뒀다.
에디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1층의 아치형 현관을 나섰다.
황제 궁 근처는 그녀에게도 낯선 곳 투성이였다. 예전에 클라이드와 한 번 와 봤을 뿐 주변을 산책하기는 처음이었다. 선황께서 미라 상태로 궁에 남아 있는 동안 당연히 외부인의 출입도 통제될 수밖에 없었던 탓이다.
드넓은 잔디와 키 작은 관목으로 꾸며진 매듭 화단을 지났다. 황태자 궁의 대리석 조각상보다 훨씬 웅장하고 예술적인 석상을 빙 돌며 구경했다. 아지랑이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그 너머로는 굵직하고 커다란 나무들이 군락을 이뤘다. 어느 각도로 봐도 관광 안내 책자에 나올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정원 뒤에 돌담이 있고 그 뒤로 또 숲 크기의 정원이 이어졌다. 역시 황제 궁은 급이 달라. 연신 감탄하면서 아름드리나무 꼭대기에 노을이 지는 장면을 완상했다.
수풀 사이에서 동화의 한 장면 같은 벤치를 발견했다. 이렇게 외진 곳에 벤치를 두면 누가 앉을까 싶은 생각도 잠시, 에디스는 살포시 엉덩이를 붙였다. 자신이 이 벤치에 앉은 유일한 손님일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문득 멀리에서 메아리가 전해져 왔다.
뭐라는지 단번에 알아듣지는 못했다. 궁 앞의 정원에 소리가 널리 퍼졌다.
자신을 찾는 걸까? 그러기에는 규모가 지나치게 큰걸. 전쟁이라도 난 듯 황궁 근위병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혹시 체르헨에서 다시 침공한 거 아냐?”
에디스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동화 속 벤치를 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궁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훨씬 긴박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