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오후가 되자 에디스는 기대 반 걱정 반의 심정으로 카페 테라스로 향했다.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이 에디스를 뒤따른 클라이드의 등장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여기까지 황제가 무슨 일로 행차했는지 묻는 이는 없었다. 공손히 손을 앞으로 모으고 눈을 내리깔면서도 당황스러운 속마음을 드러내지는 않는 프로페셔널 시종들이었다.
차 모임을 위해 커다란 원형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었다. 클라이드가 에디스의 자리를 먼저 잡아 준 후 자신도 그 옆에 앉았다.
“편히들 있게.”
“예, 폐하.”
차마 황제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시종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화했다. 무례를 범하지 않는 수준에서 몰래 동료와 시선을 교환하는 이도 있었다.
클라이드의 자리가 출입문을 등지고 있었다. 에디스의 바로 왼쪽 의자였다.
동년배와 동기를 위주로 하는 모임이라 격식을 갖추지 않고 오는 순서대로 아무 데나 앉는 분위기였지만, 클라이드는 넉넉한 빈자리 중 하필이면 바깥쪽을 선택한 것이었다. 있을 수 없는 상황에 다들 눈치 보기만 바빴다.
에디스는 클라이드를 일부러 사적인 친구처럼 옆자리에 뒀다. 공석에서 황제의 대우로서 극진히 모시는 태도와는 달랐다.
그녀는 테이블 건너편의 동기한테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나 보네? 얼굴이 엄청 피었어.”
타일런이라는 이름의 동기는 에디스와 같은 날 임관하고 황태자 궁에 배정되어 일해 왔다. 황제 궁까지 따라올 만큼 쾌속 승진하는 유능한 시종이었다.
그만큼 눈치도 꽤 빨랐다.
“얼굴이 피다니. 힘들어서 부은 거야.”
“정말? 이 궁의 밥맛이 좋아서는 아니고?”
“밥맛이야 늘 좋지. 일도 늘 많고 말이야.”
몇 마디의 대화가 오가는 동안 사람들은 서서히 상황을 깨닫기 시작했다.
황제가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하고 있었다. 딴 사람한테는 관심도 두지 않고 에디스에게만 봄날의 햇볕처럼 따뜻한 눈빛을 던질 뿐이었다.
시종들 사이에서 에디스와 황제의 특별한 관계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에디스가 황태자의 별실에서 일하기 시작하던 시절부터 둘 사이를 의심한 사람이 꽤 됐다. 아드리안이 가짜 연인 행세를 할 때도 속는 시종은 거의 없었다. 귀족파 인사들이나 속임수에 넘어갔지, 이곳에서 살다시피 하는 이들은 상황 파악이 빨랐다.
타일런이 은근슬쩍 에디스에게 얘기를 더했다.
“에디스는 살이 좀 빠졌네.”
“진짜? 오, 잘됐다. 나 이제 좀 날씬해 보여?”
“날씬이라니. 있는 놈이 더 하다고, 네가 언제는 뚱뚱했었나?”
“말이라도 고마워. 책상에 앉을 때마다 배 주름을 모서리에 걸쳐야 하지만, 우리끼리는 날씬한 거로.”
“날씬한 거 맞네. 난 꿀단지 배가 돼서 걸칠 주름도 사라졌어.”
서로 뱃살 자랑을 하는 동안 카페테리아에 사람이 늘어났다.
한꺼번에 여러 명이 들어오는 걸 보니 바깥에서 상황을 살피다가 온 듯했다. 에디스는 태연하게 반가운 인사를 했고, 시종들은 황제에게 먼저 예를 갖춘 후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케츠모리스 경, 돌아왔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걱정 많이 했어요.”
점잖게 말을 붙이는 사람은 총시종장이었다. 초대받지 않았지만 모르는 척 끼어들어서 테이블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무사하게 몸 건강히 다녀왔어요. 총시종장님, 이제 최고의 자리에 오르셨다고 하던데요. 축하드려요.”
“고마워요. 경이 여러모로 큰일을 해 준 덕분이지요.”
총시종장은 황궁 살림을 도맡은 책임자로서 에디스와 접점을 만들 일이 많았다.
그는 황제가 에디스를 더 높은 직위에 올리길 원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동시에 에디스가 그 자리를 고사했다는 것도 파악했다. 그래서 에디스에게 일방적인 호감과 동료애를 느끼곤 했다.
총시종장 옆으로는 근위대장이 있었다. 그 역시 초대받지 않았지만 찻잔을 드는 자세가 초대객만큼 태연했다.
말수가 적은 근위대장과 에디스는 사적인 자리를 자주 가졌다기보다 일하면서 친분을 쌓아 왔다. 도박장의 제임스 사건도 근위대장이 정보를 물어다 줘서 벌어진 일이었다. 덕분에 에디스의 채무가 거의 다 탕감될 수 있었다.
게다가 근위대장의 아내는 에디스의 시녀인 해밀턴 백작 부인이었다.
근위대장은 구태여 수다를 떨기보다 이 사람 저 사람의 대화를 귀에 담으며 티타임을 즐겼다.
자리가 부족해서 궁인이 의자를 더 가져왔다. 좌우를 좁혀 앉아 차를 홀짝이며 화기애애한 담소를 나눴다.
“에디스, 아티는 만나 봤어?”
문득 타일런이 물었다.
그러자 카페테리아에 자잘한 소음이 뚝 끊겼다.
건너편의 다른 시종이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타일런 되게 용감하네.’라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속삭임이 어딘가에서 들려 왔다.
아무리 아드리안이 황태자와 사귀는 척했다고 해도 과거의 연인 사이라는 건 분명했다. 옆에 있는 클라이드가 껄끄러워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타일런은 아드리안의 친구이기도 해서, 해야 할 얘기를 한다는 식으로 씩씩하게 굴었다.
“아티가 너 만나러 갔는데 못 만났어?”
“그래? 난 연락 받은 거 없는데. 아티가 입궁했으면 좀 이따 봐야겠네.”
클라이드는 줄곧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때마침 차에 곁들이는 디저트가 각자의 접시에 서빙되었다. 에디스가 동전만큼 작은 타르트를 먼저 맛봤다.
타일런이 그녀에게 곤란한 말투로 대답했다.
“에디스, 아티는 여기에 없어.”
“무슨 뜻이야?”
“신대륙으로 떠나는 배를 탔어. 벌써 몇 달이나 전에 말이야.”
“……진짜?”
에디스는 당황스러웠다. 이건 단순히 시내에서 길이 어긋나는 상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오가는 데 몇 개월이나 걸리는 곳에서 서로 만나지 못했다니 충격적이었다.
놀라서 벌어진 입에 타르트가 하나 더 들어왔다. 우물우물 씹어 넘긴 후 타일런에게 물어 출발 날짜를 확인했다. 계산해 보니 아슬아슬하게 어긋난 것 같았다.
“어떡하지. 아티한테 너무 미안하네. 나 만나러 거기까지 갔는데 길이 어긋나다니.”
“자기네 신대륙 영지도 관리할 겸 갔으니까 영 헛걸음은 아닐 거야. 그래도 너와 만날 희망을 품고 떠났을 텐데.”
옆에서 소곤거림이 들렸다.
“퍽퍽하겠다. 목 축여.”
향을 음미하기에 딱 적당한 차가 에디스의 목으로 넘어갔다. 각자 한 개씩 서빙된 초콜릿 타르트는 어찌 된 일인지 세 개째 접시에서 샘솟았다. 날름 입에 넣으면서 아드리안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지 머릿속으로 바다 위의 좌표를 추적했다.
“아티가 자기 영지에서 얼마나 머물지 모르겠네.”
“최대한 빨리 움직일 거라고 했어.”
“그래?”
에디스는 옆을 돌아봤다.
“폐하께선 얘기 들은 거 있으세요?”
클라이드의 옆에는 타르트가 가득 쌓인 접시가 놓여 있었다. 서빙하는 궁인이 센스 있게 타르트에 이어 과일도 큰 접시째 가져와 조용히 내려놨다.
“아드리안은 여기 일을 미뤄 두고 간 게 많아. 나한테도 짧은 일정으로 다녀오겠다고 했으니까.”
“그럼 배를 정비할 기간만큼만 계산하면 되겠네요. 얼추 곧 돌아오겠군요.”
클라이드가 절반쯤 빈 에디스의 찻잔을 채워 줬다. 타르트와 과일도 그녀의 접시에 예쁘게 올렸다.
평범하게 열애 중인 남자가 된 황제의 모습에 둥근 테이블을 둘러싼 여러 시선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엄격하던 군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먹으면서 얘기 나눠.”
심지어 화제가 아드리안이든 누구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에디스는 클라이드와 자신의 사이에 제삼자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걸 진작부터 절감하고 있었다.
그는 외골수 에디스 바라기였다. 머리와 수염을 다듬고도 수척한 얼굴은 헤어져 있던 동안 그가 얼마나 그리움에 사무쳐 왔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딸기 더 줄까?”
“한 개만요.”
클라이드에게 있어서 아드리안의 의미는 에디스의 친구밖에 되지 못했다. 질투할 단계도 지났다. 그녀의 마음에 자신이 확고히 자리 잡았다고 믿고 있었다.
시종 타일런은 혼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드리안과 에디스 양쪽 다 친구라서 누굴 응원해야 할지 난감할 때도 있었지만, 이젠 결론이 나는 분위기였다.
타일런은 아드리안을 들먹인 데 이어 2연타로 용자의 패기를 준비했다.
“아, 그리고 에디스. 나 지난달에 결혼했다?”
“정말? 와, 축하해. 결혼식에 못 가 봐서 아쉽네.”
“넌 언제 결혼해?”
또 카페 테라스에 얼음물 세례가 퍼부어졌다.
“……어? 나?”
“에디스가 결혼할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 언제로 할 거야?”
게릴라의 야습과도 같은 돌발 질문이었다.
몇몇 시종이 어떻게든 온화한 티타임을 만들기 위해 좋은 말을 덧대려고 했다. 하지만 죄다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실내가 봄 날씨답지 않게 썰렁해져서 안절부절못하는 사람만 가득했다.
하지만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근위대장은 찻잔과 손목으로 얼굴을 가린 채 부들부들 떨었다. 웃는 건지 떠는 건지 모호했다.
총시종장은 주름 가득한 얼굴로 아득히 먼 곳에 시선을 던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힘들었다.
당사자인 에디스는 말문이 막혀서 입만 떼었다가 붙이기를 반복했다.
유일하게 춘풍이 부는 곳은 딱 한 군데였다.
“에디스, 다들 궁금하다잖아.”
갑자기 화색이 돈 클라이드가 냅킨을 사용하기 좋게 펴서 그녀에게 건넸다. 단둘만 있었다면 직접 입을 닦아 줬겠지만 보는 눈이 많으니 자제하는 모습이었다.
“나도 듣고 싶어. 에디스가 언제 결혼할지.”
의미심장한 말투로 클라이드가 독촉했다.
에디스는 냅킨을 건네받아 입을 훔쳤다.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부스러기밖에 묻어나지 않는 걸 보니, 냅킨이 주어진 이유는 입가가 지저분해서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입가를 가린 채 잠시 시간을 벌었다.
고개를 떨궜다가 느릿한 속도로 다시 들 때, 클라이드에게 눈빛으로 물었다.
‘내가 정해요?’
의사소통에 착오가 생길까 봐 손짓도 동원했다. 테이블 아래로 자신을 손가락질했다.
벅차오르게 행복한 얼굴로 클라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꾸준한 재촉도 잊지 않았다.
“너무 늦게 결혼하지는 않을 거지? 기다리는 사람 생각을 한다면 그러지는 않을 거라고 봐.”
졸지에 날짜를 자신이 결정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