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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112)화 (112/129)

112화

시녀들이 공손하면서도 진지한 태도로 에디스를 둘러쌌다. 상냥한 손길로 그녀의 머리칼을 만져 보고, 소매를 걷어붙여 팔뚝도 살펴봤다.

가장 연배가 높은 카티네스 백작 부인은 갈수록 눈초리가 예리해졌다. 전면적인 대공사를 대비해 꼼꼼하게 견적을 내는 분위기였다.

“죄송하지만 공작님. 지금 전체적으로 손질이 필요한 상황이에요.”

“손질이라면, 피부 관리를 얘기하는 거죠?”

“피부는 당연히 꾸준하게 관리를 받으셔야 하고요. 머리칼도 많이 상하셨어요.”

“머리가 좀…… 그렇죠.”

에디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양을 가로지르는 배에서 머리 손질은 꿈도 못 꿨던 탓이다.

긴 항해를 하는 동안 선실에만 죽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갑판에 올라가 있거나 선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곤 했다. 그 결과 내리쬐는 직사 일광과 소금기 가득한 바닷바람이 피부와 머리에 속속들이 배어들었다.

“미용사와 상담해 봐야 정확히 계산이 나오겠지만, 제가 보기엔 길이를 전부 살리지는 못할 것 같네요. 끝부분을 쳐 내고 집중적으로 헤어 케어를 받으셔야 해요.”

“잘라도 돼요. 그새 많이 길어서요.”

“피부도 관리가 많이 필요해요. 단시일 내에 해결될 게 아니네요.”

“잘 부탁해요. 레이디 카티네스와 여러분을 믿고 맡길게요.”

세 시녀가 의욕에 가득 찬 태도로 앞다퉈 입을 열었다. 머리와 피부에 발라야 할 영양제로 온갖 값진 재료들이 물망에 올랐다.

시녀들은 클라이드가 엄선해서 뽑은 사람들이었다. 에디스의 측근이 되어도 손색이 없을 만한 자로 선발했다.

카티네스 백작은 원래부터 황제에게 충성하는 사람이었다. 옛날부터 소신 있게 클라이드를 지지하고 따랐다. 페이튼을 중심으로 한 귀족파가 우세한 가운데에서도 백작은 황제파라고 불리는 소수의 세력을 만들어 왔다.

해밀턴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작년까지만 해도 황태자 궁의 근위대장이었고, 지금은 황제 궁의 근위대장과 황궁 전체의 보안을 책임지는 사령관을 겸직하게 되었다.

제리언 자작은 신흥 상공인 출신이었다. 아드리안과 같은 부류로서 황태자의 눈에 들었다가, 이번 전쟁에서 전폭적으로 황실에 물자를 지원한 공을 인정받아 자작의 작위를 얻었다.

에디스는 미리 클라이드에게 시녀들의 신상을 들었던 덕분에 거리낌 없이 곁을 내어 줄 수 있었다.

“머리칼이 많이 푸석거리죠? 햇볕이랑 바닷바람 때문에 이렇게 됐네요.”

“우선 미용사부터 불러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하세요.”

“지금 시간 괜찮으시죠?”

“지금 당장이요?”

껌처럼 옆에 달라붙어 있던 클라이드가 냉큼 대꾸했다.

“오늘 별로 바쁜 일은 없네. 부르도록 하게.”

어영부영 클라이드와 시녀에게 이끌려 머리 손질을 하게 됐다. 환궁하고 나서 먼저 하게 되는 일이 어쩌다 보니 몸치장이 되었다.

그것도 상당히 스파르타식으로 진행됐다.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지나지 않아 귀족 여성 전문 미용사가 궁에 들었다. 에디스를 중심으로 해서 시녀들과 미용사가 어떤 헤어컷이 어울릴지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였다. 고르고 골라 머리를 다듬었다.

내친김에 황제의 미용사도 와서 클라이드의 머리를 손봤다. 에디스가 조금 자란 길이도 나쁘지 않다고 한 덕분에 삐죽한 부분을 다듬기만 했다.

그리고 에디스의 상한 머릿결을 살리는 건 미용사보다 각 귀족가에서 내려오는 비책이 더 유용했다. 황족의 머리 손질은 전통적으로 시녀의 전담 업무이기도 했다.

헤어팩 재료를 엄선하느라고 시녀들이 한참이나 입씨름하더니, 꿀과 우유를 베이스로 여러 가지 오일을 시도해 보기로 결정했다.

“공작님, 머리 자르고 나면 영양제도 바르셔야죠?”

열의에 찬 세 쌍의 눈빛이 에디스의 부스스한 뒤통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에디스는 벌써 한참이나 목둘레에 시트를 두른 채 붙들려 있던 참이었다. 엉덩이에 땀이 찼다.

“오늘은 머리만 자르면 안 될까요?”

“어디 가셔야 해요? 폐하께서 급한 일 없으시다고 하셨는데…….”

두 눈 시퍼렇게 뜨고 호랑이처럼 지켜보고 있던 클라이드가 타이밍 좋게 끼어들었다.

“영양제 하게.”

“네!”

카티네스 백작 부인이 눈치 빠르게 대답했다.

“피부 관리도 서두르도록 하게.”

“넵! 내일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한동안 뒹굴거리며 쉬게 되리라고 기대했건만, 역시 놀고먹을 팔자가 못 되나 보다.

장시간에 걸쳐 관리가 이루어졌다.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전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미용사의 신중한 손길에 의해 헤어컷을 마무리한 후, 다시 영양제를 만들어 머리에 듬뿍 바르는 고단하고 험난한 과정이었다.

말끔해진 머리 모양을 한 클라이드는 에디스의 허리와 어깨를 마사지하면서도 케어를 계속해야 한다며 살살 달랬다. 이따금 시녀에게 질문도 던졌다.

“아, 그런데 피부 관리도 머리처럼 뭘 바르는 방식인가?”

“바르는 것도 있고 목욕물에 푸는 것도 있습니다. 우선 얼굴에는 영양 팩을 듬뿍 발라야겠지요. 전체 피부를 위해서는 무난하게 우유 목욕부터 시작할까 합니다.”

“목욕은 내게 방법을 알려 주게.”

“……네?”

백작 부인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차피 나와 에디스 가까이에서 겪다 보면 자네들도 알게 되겠지만, 에디스의 목욕은 내가 돌볼까 하네.”

“앗, 잠깐! 클라이드.”

에디스가 기겁해서 외쳤다.

하지만 그 소리에 시녀들이 한결 더 경악했다. 거침없이 이름을 불러 젖힌 탓이었다. 여태 점잖게 ‘폐하’ 호칭을 유지하다가 당황한 김에 평소 버릇이 튀어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클라이드는 자신의 의지를 고수했다.

“레이디 카티네스, 우유로 어떻게 목욕하는지 구체적으로 내게 설명하게.”

에디스가 막아도 소용없었다.

“자제 좀 부탁해요, 클라이드.”

“그냥 몸을 담그면 되겠는가? 달리 주의할 점은?”

“아아, 제발.”

“에디스, 이 자리에서 밝혀지나 나중에 밝혀지나 똑같아. 어차피 시녀에게 우리 사이를 감출 수는 없어.”

클라이드는 국정 회의를 할 때처럼 완전히 정색하고 있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법한 표정으로 냉정하게 시녀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준엄한 말투는 흡사 조세의 개정안이라도 논의하는 듯했다.

시녀들도 이내 몸가짐을 추슬렀다. 속으로는 여전히 당황스럽겠지만 우유로 목욕하는 방법을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화는 흐르고 흘러 바디 마사지까지 건너갔다. 학구적인 자세로 귀를 기울이는 클라이드와 열정 넘치는 시녀들의 토론이 끊이지 않았다.

“이게 직접 시연을 하는 게 최고인데 말씀입니다.”

“나도 말만 들어서는 잘할 자신이 없군.”

“제가 한번 공작님께 시범을 보일까요?”

“에디스가 부끄러워할지도 모르는데.”

저기요. 부끄러운 사람이 바로 옆에 있는데요. 얘기만 들어도 에디스는 되게 민망했다. 당사자는 제쳐두고 시녀와 황제의 심오한 대화가 계속됐다.

“어떻게 마사지 시연을 하면 좋을까요?”

“음, 카티네스 경과 해밀턴 경, 제리언 경에게 부탁하면 어떻겠나. 집에서 각자 남편에게 전수해 주게. 그러고 나서 내가 그들을 따로 만나 배우도록 하지.”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여성과 오메가라는 차이점을 짚어 주면서 최선을 다해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잘 부탁하네.”

손발이 오그라드는 사람은 에디스뿐이었다. 어디 숨을 데도 없었다. 머리에 두껍게 팩을 바른 채로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있어야 했다. 발랐다가 씻고, 또 발랐다가 씻기를 세 번이나 반복했다.

그녀의 거친 피부를 반질반질 광 나는 피부로 바꿔 놓고야 말겠다는 열정으로 가득한 사람들 틈에서 자제 좀 부탁한다고 말리는 건 소용없었다.

* * *

다음 날 에디스는 궁을 두루 돌아다니며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인사했다.

다들 반가워하며 그녀의 귀환을 대환영했다.

그중에서 에디스의 임관 동기라든가 비슷한 또래라서 마음이 잘 통했던 시종들, 황태자 궁에서 동고동락했던 사람들하고는 지난 경험을 풀어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내친김에 한꺼번에 모여 차나 한잔하자는 얘기가 나왔다.

에디스가 다른 이를 만나 한담을 나눌 때면 클라이드는 잠시 자리를 피해 주든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멀리 떨어져 있었다. 24시간 붙어 다니겠다고 장담하긴 했지만 매너만큼은 확실히 지켰다.

오후의 휴식 시간에 맞춰 에디스는 시종 전용 휴게실에서 지인들과 티타임을 갖기로 했다. 시간 맞춰 오겠다고 한 사람이 꽤 많았다.

그런데 약속을 클라이드에게 전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나도 티타임에 함께하면 안 될까?”

황제가 시종들 모임에?

“클라이드, 그건 좀…….”

“얌전히 있을게. 화초처럼 있는 듯 없는 듯,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구석에 처박혀 있을 테니까 데리고만 가 줘.”

“그래도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사람들이 입도 제대로 열기 힘들어할걸요.”

“무게 잡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지? 실없이 웃고 있을까?”

표정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클라이드가 광대 복장을 하고 나타난대도 황제는 황제였다. 다들 고양이 앞의 쥐처럼 꼼짝도 못 할 게 분명했다.

“나랑 떨어져 있는 게 불안해서라면 건너편 휴게실에 있는 건 어때요? 거기도 거리는 되게 가까워요.”

“불안한 마음도 있지만, 모임에 끼고 싶어서 말이야.”

“왜 끼고 싶은데요?”

“에디스가 약속을 잡은 티타임이잖아. 그것만으로도 같이 있고 싶은 이유가 돼. 그리고 다른 사람과 어울려 놀 때 네가 어떤 모습인지도 보고 싶어.”

“별거 없을 텐데.”

“네가 그 자리에 있을 텐데 어떻게 별거 아닐 수 있지? 나한테는 굉장히 의미 있어.”

클라이드는 하는 말마다 남친 전용 대사였다. 로맨스 소설 도서관에서 형광펜으로 밑줄 치면서 공부라도 했나 싶을 정도였다. 서로 손을 꼭 쥐고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녀를 봄눈 녹듯이 녹여서 마음이 약해지게 만드는 남자였다.

하긴 클라이드가 황제가 아니었더라면 서로 집에도 찾아가고 친한 친구도 알고 지냈을 것이다. 결혼을 코앞에 둔 피앙세를 지인 모임에서 인사시키는 건 흔했다. 결혼식을 앞두고 누구나 으레 거치는 과정이기도 했다.

“정말 무게 잡지 않을 수 있겠어요?”

“노력할게. 웃기는 농담을 외워 둘까?”

“풋, 그렇게까지는 할 필요 없고요.”

성의는 고맙지만 시종을 웃길 준비까지 하는 건 클라이드에게 심하게 캐릭터 붕괴였다.

만약에 농담이 나온다면 다들 표정 관리를 못 해 쩔쩔매게 될 거다. 진짜 웃긴다고 해도 입을 벌려 함부로 웃지 못할 테고, 안 웃긴다면 억지웃음을 자연스럽게 포장하려고 노력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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