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머릿속은 벌써 계산기가 떠올라 있었다. 행사가 하루 이틀 내로 끝나지는 않겠지. 수도뿐만 아니라 제국 영토 전체와 식민지까지 혜택을 뿌려야 할 테고 말이야.
천장과 벽 사이의 몰딩에 의미 없는 시선을 던지며 먼저 결정해야 할 일을 구분하고 일정을 짰다.
“에디스, 대체 무슨 생각 해?”
“견적 뽑아요.”
“무슨 견적?”
“예산이랑 일정이랑 기타 수많은 것들이요.”
“그걸 왜 에디스가 하지?”
클라이드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별 허튼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의아한 표정이었다.
“이런 행사를 진행하는 건 시종의 몫이니까요. 당연히 내 일이죠.”
“설마 그런 이유로 스몰 웨딩을 하고 싶었던 거야?”
기다란 눈매를 크게 떴다가 금세 부드럽게 휘었다. 입을 주먹으로 막으며 풋, 하고 실소를 흘리다가 차츰 즐거운 웃음소리가 커졌다. 에디스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귀여운 동물처럼 대했다.
“아, 왜요. 난 시종이라고요. 그것도 방금 승진한 시종장.”
볼록하게 드러난 이마에 그가 달곰하게 입을 맞췄다.
“에디스, 네가 찰 보석을 네 손으로 직접 주문하게 둘 수는 없어. 말이 안 되잖아. 황후가 될 너는 누리기만 해야지.”
“하지만 어떻게 그래요.”
“혹시 이런 장면을 상상한 거야? 목걸이 가운데에 박힐 다이아몬드로 뭐가 좋을지, 사우드폴산과 헬름산을 두고 가격 비교하는 거?”
“가격은 따져 봐야죠.”
입매는 여전히 길게 늘어져서 미소를 지우지 못한 그가 제법 단호한 말투로 을렀다.
“따지지 마. 얼마인지 묻지 말고, 네 눈에 예쁜 건 다 골라.”
“하지만.”
“그래도 돼. 에디스는 그렇게 할 자격이 충분하고도 넘쳐.”
“무턱대고 사 댔다가 비용이 엄청 많이 들면 어떡해요?”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 여태껏 난 에디스한테 제대로 된 선물 한번 준 적이 없잖아.”
그녀가 소심하게 항변해 봤다. 서지우의 별에서는 역사적으로 사치를 부려 나라를 말아먹은 황족이 꽤 많다고, 지금 이쪽의 상황과는 상당히 다른 상식을 끌어와 주절거렸다.
클라이드는 당치 않다는 듯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에디스가 그럴 리는 절대 없다고 확신하며 한 귀로 흘렸다.
“에디스를 시종으로 남겨 둔 건 내 궁에서 재우고 싶어서야. 혼례 전에 공연히 구설에 휘말리지 않도록 한 것뿐이라고. 그러니까 행사나 일정 걱정은 할 필요 없어.”
“그래도…….”
“딴 건 아무것도 하지 말고 마음에 드는 걸 고르기만 해. 어차피 우리가 줄곧 함께 있을 테니까 네 손에 결혼식을 준비하는 서류가 쥐여질 일은 없겠지만.”
클라이드는 판사가 판결봉을 두드리듯이 딱 잘라 말했다.
이것으로 끝이었다. 약간이나마 규모를 줄여 보는 건 어떠냐는 의견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혼식은 황제의 직속 소관으로서 그가 마음대로 하기로 했다.
* * *
황제 궁은 확실히 황태자 궁보다 화려하고 컸다.
매끼 식사하는 장소도 달랐다. 아침 식사는 밝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신선한 봄볕을 만끽하면서 먹었다. 점심용 식당은 접견을 겸할 수 있도록 이보다 넓은 곳이라고 했다.
명목상 에디스가 황제를 보필하는 시종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반대 상황이 펼쳐졌다. 누가 봐도 시중드는 사람은 클라이드였다.
“자꾸 이러면 부담스러운데.”
크리스털 물잔을 시녀가 아닌 클라이드가 직접 채워 줄 때 그녀는 머쓱해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뭐가 부담인데?”
관계의 역전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클라이드가 더 문제였다. 그가 손을 털어 주변을 오가는 시녀들을 모조리 내보냈다.
“왜 다 내보내요?”
“단둘이 있고 싶어서. 또 필요한 거 있어? 샐러드 덜어 줄까?”
“여태 둘이 있었잖아요.”
“무슨 소리야. 네가 돌아온 게 나는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고. 가까이 있고 싶고, 만지고 싶어. 지금도 테이블이 너무 커서 불만이야.”
깜빡 잊고 있었다. 클라이드는 닭살 멘트에 조예가 깊었다. 이미 그녀의 앞에 수북이 샐러드가 쌓여 있는데도 그 위에 집게로 한 움큼을 더 얹기도 했다.
자신의 입으로 저런 대사를 읊으라면 절대 못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빙판을 날아다니는 피겨 스케이트 선수 같은 클라이드의 혀는 거침이 없었다.
“에디스는 내가 반갑지 않은 거야?”
“물론 반가워요. 하지만 이제 클라이드도 식사해요.”
“네가 먹는 걸 보는 게 더 배불러.”
이럴 때 대처 방안은 비슷한 말을 되돌려 주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건 에디스에게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뭐라고 받아쳐야 하나 고심하다가 결국 어중간한 미소로 때우고 말았다.
그래도 마냥 좋아하는 클라이드는 머나먼 테이블 간격을 견디지 못하고 의자를 들어 옮겼다. 메인 디시만 가져와 나란히 앉더니 세상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시녀를 내보내길 잘했네요. 이러면 남들이 흉봐요.”
“흉이 아니라 칭송을 하겠지. 역대급으로 금실 좋은 황제 커플이 탄생할 거야. 제국의 롤 모델이 되는 거지.”
“클라이드.”
“왜.”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워 오는 거예요?”
“배우다니.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건데.”
“조금 대단해요. 아니, 놀리는 거 아니고 정말요.”
그가 삐뚜름하게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속을 재보듯이 유심히 그녀를 흘겨보다가 작게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럼 에디스도 해.”
“난 도저히 입이 안 떨어지는걸요.”
“말로 못 하겠으면 행동으로 보여 주든가.”
행동이라면 덜 쑥스러우려나. 솔직히 에디스도 뭐든 돌려주고 싶었다. 마음을 표현하기란 생각보다 어려워서, 의지만 있다 뿐이지 실제로 도전하지 못했다.
드라마 대사 같은 얘기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정해져 있는 걸까? 클라이드처럼 완벽한 비주얼과 음성이 받쳐 줘야 가능하지. 자신의 촐싹대는 말투로 ‘자기야, 나 요기 쪼꼼 아파앙.’ 막 이런 얘기를 했다간 제 성질에 못 이겨 자폭해 버릴 게 분명했다.
에디스는 주스를 한 모금 마실 때조차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그는 음식에 손도 대지 않은 채 아예 돌아앉아서 그녀를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얼른 먹어요.”
“주스 더 줄까?”
“나 신경 쓰지 말고 당신 배부터 채워요.”
아무리 권해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를 어쩌면 좋지.
해결책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에디스는 차마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은 클라이드처럼 단 소리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상냥한 행동과도 거리가 멀었다. 쑥스러움을 참고 도전하기가 참 어려웠다.
“그러면…….”
빵 바구니에서 모닝 롤을 집어 작게 잘랐다. 자신의 손이 아닌 듯 로봇 같은 태도로 쭈뼛쭈뼛 빵조각을 집은 손을 그의 입가에 가져갔다.
“이거라도.”
클라이드의 황금빛 눈에 섬광이 지나갔다.
가까이 놓인 의자를 더 당겼다. 드르륵 끌고 와서 두 사람의 무릎을 엇갈렸다. 에디스의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상체를 기울인 그가 빵조각을 조심히 물었다.
날렵하게 도드라진 턱을 움직여 영화처럼 음식을 씹었다.
품위 있는 식사법이 황족으로서 중요한 소양이긴 하지만 클라이드는 훌륭한 본판 덕분에 먹는 모습이 더 근사했다. 에디스의 눈에만 멋있어 보이는 게 아니라 오찬이나 만찬에서 만나는 많은 이들이 비슷한 칭송을 늘어놓곤 했다.
비주얼이 복지다. 미모가 힐링이지.
“에디스가 먹여 주니까 맛있어.”
한 조각을 더 물려 줬다.
“똑같은 빵인걸요.”
“아냐, 맛이 전혀 달라.”
그가 냉큼 받아먹으면서 눈꼬리를 좁혀 훗훗한 미소를 지었다. 살랑거리는 커튼 너머로 봄날의 나무와 작은 가지마다 빼죽이 머리를 내민 새순보다 훨씬 싱그러웠다.
잘 먹는 클라이드가 보기 좋았다.
빵 한 덩어리를 다 먹인 후에는 클라이드의 접시를 끌어왔다. 에디스의 것은 아침에 부담스럽지 않은 달걀 요리였고 그의 것은 체격에 어울리게 든든한 육류였다.
스테이크와 소시지를 작게 자르는 동안 예전 생각이 났다. 그가 제게 이런 식으로 스테이크를 잘라 준 적이 있었다. 그땐 참 별걸 다 챙기며 유별나게 군다고 투덜거렸는데, 그 짓을 자신이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클라이드는 세상 다 가진 놈처럼 흐물흐물 풀어진 얼굴로 에디스에게 연신 엉겨 붙었다.
“내가 먹어도 되는데…….”
흐려지는 말꼬리는 받아먹고 싶다는 거지?
에디스는 엄마가 아이한테 이유식을 먹일 때처럼 한 손을 아래로 받치고 신중히 포크를 움직였다. 홍조가 도는 입술 사이로 스테이크 한 점이 무사히 안착했다.
“잘 먹으니까 보기 좋네요.”
바짝 마른 몸 상태로도 에디스에게 치대기 바빴던 그가 뺨을 부풀려 음식을 먹으며 만족스러워했다. 이 낯간지러운 짓을 왜 하나 싶었는데, 정작 시도하고 보니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받아먹으려고 그가 입을 벌리는 순간은 그녀도 호흡을 멈추고 몰입할 만큼 특별했다.
“고마워. 이제 내 차례네.”
새 포크와 나이프를 쥔 클라이드가 에디스의 접시에 손을 대려 했다.
“아니에요. 이거 다 먹어야 해요.”
“그럼 내가 먹을게.”
“아, 해요.”
내버려 두면 그는 저를 시중들기에 바쁠 게 뻔했다. 늘 그래 와서 행동 패턴이 훤히 읽혔다. 에디스는 접시가 완전히 빌 때까지 바삐 손을 놀렸다.
왜 이리 수척해졌냐고 묻지 않았다.
물을 필요 없는 질문이었다.
공연히 그를 신경 쓰이게 할 말이 될까 봐 자제했다. 바보가 아니라면 클라이드의 상태를 모를 리 없었다. 뼈에 사무치도록 그녀를 그리워해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한 게 분명했다.
만나서 서로 얼굴을 보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는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끊임없이 손으로 만지려 하고 눈으로 바라보면서 에디스의 존재를 확인하려 들었다.
상심이 깊어 살을 발라낸 듯, 클라이드의 뺨이 얇았다.
그리움의 잔재가 남은 그의 턱선을 바라보는 순간 에디스는 가슴이 울울하게 아렸다.
코끝에 찡한 느낌이 올라왔다.
여차하면 눈물이 솟을 것 같았다. 그가 마음 쓰지 않도록 잠시 고개를 돌려 기분을 추슬러야 했다.
클라이드가 촉촉하게 눈웃음지었다. 황량하도록 움푹 들어가는 눈자위에 자작자작 봄비가 내리는 느낌이었다. 나머지는 제 손으로 먹겠다면서도 에디스가 포크를 내밀면 곧바로 입을 벌렸다.
“빵 더 먹을래요?”
“배불러. 에디스도 식사해야지?”
접시로 덤벼드는 그의 태도가 완강했다. 치즈가 듬뿍 들어간 오믈렛을 스푼과 포크로 말끔하게 떠서 에디스 앞에 대령했다. 그녀는 사양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하나 마나 소용없을 게 뻔했다.
그는 에디스보다 훨씬 경험이 많은 덕에 능숙하게 식사 시중을 들었다. 황태자 궁에서 살 때는 거의 매일 방에서 둘이 저녁을 든 덕분이었다.
상당히 느리게 아침 시간이 흘렀다.
밥을 먹는 건지 소꿉장난을 하는 건지 모호한 짓을 오래도록 주거니 받거니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