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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110)화 (110/129)

110화

“다치지 말아요.”

“응.”

“나 속상하다고.”

“에디스는 건강히 잘 다녀왔어?”

저도 옆구리에 만만치 않게 큰 흉이 생겼지만 지금은 밝히고 싶지 않았다. 클라이드가 얼마나 마음 아파할지 안 봐도 훤했다.

“응, 잘 다녀왔어요.”

조금 전만 해도 그가 손을 뻗으면 언더 드레스를 벗어젖히려 했는데 이젠 마음이 바뀌었다.

되도록 늦게 보여 줘야겠다. 목욕할 때 말고 침대 위에서. 그때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으면 내일 옷 갈아입을 때.

새로 생긴 수술 자국을 보는 자신의 기분을 클라이드는 가능한 한 나중에 맛보게 하고 싶었다.

에디스는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이대로 씻을까요?”

“그럴까?”

원하는 대로 들어주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한 클라이드는 빳빳하게 각진 어깨에 올라온 작은 손길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가 가볍게 그녀의 둔부를 받쳐 안아 들었다. 팔뚝 위에 그녀를 앉힌 채 기분 좋은 고양잇과 동물처럼 그르릉거리는 목울음을 울었다.

수증기의 따뜻하고 촉촉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고개를 치켜든 클라이드가 그녀를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미소를 띤 뺨이 완만한 선으로 부풀어 올랐고 입술도 부드럽게 벌어졌다.

의식하지 못한 순간, 그녀의 고개가 녹아내리듯 그에게로 가까워졌다.

입술을 맞대면 얼마나 까칠한 느낌이 날지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정작 그와 마주하자 사고가 마비되었다. 하잘것없는 겉껍데기에 마음 썼던 게 무색하리만치 클라이드는 그녀에게 환상적인 감각을 선사했다.

에디스가 입술을 엇갈려 눌렀다가 살짝 뗐다.

따뜻한 물 속에 두 사람이 차츰 잠겼다. 발목에서부터 허리를 거쳐 가슴까지 차오르는 온수가 몸에 착 감겨들었다.

갈증 나는 얼굴의 클라이드가 그녀를 허겁지겁 찾아서 입에 물었다. 등을 받치고 뒷덜미를 살금살금 쓸며 더는 에디스가 물러나지 못하게 제 품속에 가뒀다.

물속에서 에디스는 부유하듯이 그의 무릎에 올라앉았다.

출렁이는 물결을 타고 그녀의 옷자락이 봉긋하게 부풀자 에디스도 한 뼘만큼 떠올랐다.

“에디스.”

그가 진저리치면서 팔에 힘을 줬다. 양과 음의 자석이 쉼 없이 서로를 끌어당기듯이 클라이드는 집착적으로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이제 어디에도 가지 마.”

“응, 안 가요.”

다시 만나 그에게 안긴 순간, 에디스는 인정해야 했다.

먼 곳에서 자신이 아주 힘들었구나. 그가 보고 싶어서 속이 까맣게 탔는데, 마음 바닥이 버석해진 줄도 모르고 멀쩡한 척 굴었구나.

괜찮은 척 꼬장꼬장하게 버텨 왔구나.

먼저 입맞춤하고 팔을 벌려 끌어안는 자신의 행동이 인제 보니 당연했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줄곧 에디스의 영혼은 그를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 * *

오랜만에 편한 잠자리에서 꿀잠을 잤다.

퀴퀴하고 좁은 선실 침상이 아니라 황금 기둥의 푹신하고 거대한 침대에 몸을 묻으니 하루가 꼬박 넘어가도록 눈을 뜨지 못했다.

해가 진 후 일어나서 실컷 먹고 다시 잤다. 꼬박 24시간쯤 잤나. 정신을 차리니 눈이 떠지지 않았다. 빵빵하게 부은 눈두덩이가 개구리와 동족처럼 보였다. 얼굴의 부기를 가라앉히느라고 냉찜질을 받으며 또 침실에서 머물렀다.

놀라운 건 클라이드도 만만치 않게 잠을 잤다는 사실이다. 에디스는 그가 침대에서 그렇게 오래 머무는 걸 처음 봤다. 대부분은 깨어 있었지만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고 누워서 게으름 피웠다.

“이렇게 팡팡 놀아도 돼요? 폐에에하?”

“전쟁은 끝났어.”

“그래도 국사는 넘쳐날 텐데요.”

에디스는 부은 얼굴을 속 편히 클라이드한테 맡겨 버린 채 대자로 뻗어 있었다.

그가 눈 위에 올려진 수건이 충분히 시원한지 확인했다. 체온을 받아 미지근해진 걸 보고 냉큼 다른 수건으로 갈았다.

“쉴 수 있을 때 휴식을 즐기지 못하는 것만큼 불쌍한 사람도 없어. 누가 뭐래도 나는 당분간 쉴 거야. 적어도 2년쯤.”

“너무 길지 않아요? 왜 하필 2년이에요.”

“점성술사가 그러는데 두 개의 별이 교차점을 지났대. 이젠 서서히 멀어지고 있어. 한두 해가 지나면 서로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군.”

에디스는 손가락을 다각 튕겼다.

“버티면 이기는 건가요!”

존버 승리. 우주의 대진리가 통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굉장한 희소식이었다.

서지우의 세계와 멀어지면 모든 게 끝난다. 더는 제자리로 돌아가게 될까 봐 염려할 필요가 없게 된다. 하늘에 뜬 무수히 많은 별들 중 어느 것이 문제의 별인지 에디스의 눈으로 찾지는 못하지만, 원작 소설에 등장할 정도로 비중 있는 별 점성술사가 내다봤다면 분명 맞는 얘기일 것이다.

즐거움이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그녀의 입에 보드라운 감촉이 닿았다가 사라졌다.

냉찜질하느라고 눈을 가린 상태로는 짐작만 할 수 있었다. 입맞춤을 도둑질당했구나. 양쪽 입꼬리가 헤벌쭉하게 벌어졌다.

젖은 마찰음과 함께 똑같은 감촉이 또 지나갔다.

클라이드의 따뜻한 입바람이 뺨에 묻었다.

“그때까지 에디스와 붙어 지내자는 계획을 하고 있어. 이렇게 따지면 노는 건 아니지. 인생 목표를 실천하는 거라고나 할까.”

“남들한테는 노는 게 맞는데요.”

“나만 아니면 돼.”

“에이, 그건 억지지.”

에디스는 냉찜질 수건을 살짝 들치며 틈새로 그를 흘겨봤다. 좋아 죽으려고 하는 남자가 풍성한 속눈썹을 휘며 그녀에게 눈웃음짓고 있었다.

사실은 자신도 기분이 폭폭했다. 클라이드와 주고받는 시답잖은 대거리가 너무 반가웠다. 떨어져 있을 때 제일 그리워했던 건 이런 사소한 일상이었다. 에디스 혼자만 할 수 있는 막말과 살살 약 올리는 클라이드의 대꾸가 늘 생각났다.

그가 고양이를 돌보듯이 에디스의 턱을 살짝 긁었다.

찌릿, 째려보니까 미소가 더 크게 번졌다.

“아, 그러고 보니 황실 차원에서 중대사를 처리해야 해.”

“무슨 중대사요?”

“황후궁의 주인을 맞이해야 하잖아. 제국의 경사이자 한 세대를 통틀어 가장 큰 행사를 치르게 될 거야.”

잊은 척했지만 잊을 리가 없었다. 클라이드의 짝이 되려면 무거운 책무가 따르는 황후의 자리에 앉아야 했다. 첫걸음부터 국가적인 대행사를 치르게 되겠지.

시종으로서 잔뼈가 굵은 에디스의 입장으로는 그 모든 게 일이자 업무였다. 결코 핑크빛 결혼이 될 수 없었다.

예산은 어디에서 조달할 것이며, 외국의 귀빈은 어디까지 초빙할 것이며, 예식에 참가할 업체 간의 알력 다툼은 어떻게 조율할 것이며, 쓸데없이 찬양하는 자와 공연히 트집 잡는 자 사이의 균형을 어찌 맞출 것이며, 그러고 나서도 섭섭할 인사들을 무슨 수로 달랠 것이며…….

“난 스몰 웨딩이 꿈입니다만!”

그 자리에서 단언하고 말았다.

“그게 뭔데.”

“소박하게 꽃 한 다발만 들고, 작은 정원이나 아담한 공간에서 가족과 지인 몇 명만 초대하는 그런 거요.”

“……라그란드 제국의 황후가?”

여전히 조각 같은 미소를 품은 그가 되물었다. 대륙에서 첫손 꼽히는 강국인 라그란드에서 과연 그런 황실 혼인이 가능하겠느냐는 뜻이 숨겨져 있었다.

“무, 무리일까요?”

“절대 무리지.”

그럴 수 없는 이유를 클라이드는 숨도 쉬지 않고 장황하게 설명했다.

우선 제국은 바로 몇 달 전에 체르헨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수도까지 밀고 올라갈 수 있었지만 클라이드는 에디스가 돌아올 시기를 떠올리며 무리하지 않았다. 한 나라를 멸망시키면 이어지는 여파가 만만치 않은 탓에 구태여 욕심부릴 필요가 없었다. 영토 확장으로 그가 격무에 시달릴 때 에디스도 똑같이 힘들게 되리라는 걸 염두에 뒀다.

하지만 국력의 우위를 널리 알리는 건 아주 중요했다.

독립국을 세우겠노라며 들고일어났던 귀족파만 해도 그랬다. 황실이 위압적인 권위를 자랑해야 또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터였다.

또한 페이튼을 비롯한 무리들은 아직도 페릴랜드라는 나라 이름을 걸고 저항을 계속하는 중이었다. 본대륙에서 내로라할 만한 영토를 점유하지는 못했지만, 체르헨과 라그란드의 국경 근처의 섬을 수도로 삼아 해상 지역을 야금야금 장악하고 있었다.

게다가 신대륙의 지지 기반은 여전했다. 페이튼의 신대륙 식민지는 흙과 지평선 외에도 또 있었고, 자금줄이 끊기지 않았으니 뭐든 시도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라그란드에 비하면 그곳은 작은 국가였다. 그들 스스로 국가를 표방했으니 페릴랜드 제국으로 불러 주지만 사실상 격차는 매우 컸다. 라그란드 내에 있던 그들의 영지는 모조리 클라이드가 몰수해서 황제령으로 선포했다.

강국과 약소국으로 나뉜 상황.

하지만 페이튼 패거리가 아예 전멸하지는 못했으니 그들도 나름대로 저력이 있다고 봐야 할까.

“에디스, 우리가 간소하게 식을 치르면 체르헨이나 페릴랜드에서 빌미로 삼을지 몰라.”

“승전국이 패전국에게 꿀릴 게 뭐 있어요. 적당히만 하면 안 될까요.”

번거로워. 귀찮아. 일하기 싫어. 그녀는 쫑알쫑알 입 안으로 불평했다.

“투덜대도 소용없어. 전쟁에 나랏돈을 쏟아부어서 재정이 파탄 났느니 어쩌니. 그런 소리 들으면 열 받겠지?”

“열 받긴 하겠죠.”

“내게 허점이라도 있는지 착각한 놈들이 괜히 군대로 도발하면 짜증 나겠지?”

“……짜증 나겠죠.”

“국경지대에서 깔짝깔짝 간 보다가 선 넘는 거 순식간이거든. 밟아 줄 때는 확실히 밟아 줘야 뒤탈이 없는 법이야.”

에디스도 이번 전쟁에서 클라이드가 성질 많이 죽였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시신을 오랫동안 황궁에 숨겨 둔 채 얼마나 이를 갈았는지 그녀의 눈으로 봐 왔다. 그는 단단히 벼르면서 기회가 오면 모조리 죽여 버리겠노라고 각오했다.

이만큼만 적을 몰아붙인 후 군대를 물린 건 클라이드로서는 힘든 결정이었겠지.

“그럼 앞으로는 어쩔 계획이에요? 이대로 안정을 되찾는 방향으로 가는 건가요?”

“체르헨은 국경을 재확정하는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 배상금만 받으면서 끝내려고. 그리고 페릴랜드는 쓸어버려야지. 그건 그냥 둘 수 없……. 아니, 잠깐. 에디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결혼식 얘기부터 해야지.”

“페릴랜드하고는 끝까지 갈 생각이군요. 역시.”

“결혼식 말이야! 난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싶다고.”

에디스는 공연히 귀청을 때리는 그의 항변을 외면하며 귀를 쓱쓱 문질렀다.

“알았어요. 알았어. 격에 맞는 결혼식으로 가야죠, 뭐.”

클라이드와 함께할 미래는 기대되지만 으리으리하고 번쩍번쩍하게 치러야 하는 행사에 대해서는 새신부의 들뜨는 마음을 갖기가 힘들었다. 시종장인 에디스는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막대한 업무량이 떠올라 아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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