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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109)화 (109/129)

109화

그가 낮은 신음과 함께 에디스의 망토 자락을 끌어당겼다.

“솔직히 말해야 허락을 받을 수 있겠군. 이건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에디스를 시중들고 싶어.”

클라이드는 힘으로 버티며 억지 부리지 않았다. 대신에 그녀의 뺨 가까이에 얼굴을 갖다 댔다.

“제발, 이 손 놔줘. 에디스의 등 뒤에 있는 단추도 직접 풀고 싶어.”

까칠한 턱을 뺨에 직접 대지는 못하고 지극히 가까운 존재감만을 드러냈다.

절대 거절하지 못할 상황을 만들어 놓고 제발이라니. 싹싹 비는 행동의 이면에는 에디스를 꼼짝 못 하게 하는 용의주도함이 깔려 있었다. 재회한 이후로 죄다 그의 뜻대로 끌려가는 형국이었다.

“하아…….”

“고마워.”

에디스가 만사를 포기하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자, 망토를 벗기는 손길이 한결 경쾌해졌다. 까칠하게 말라붙어 있는 그의 입술에 옅은 미소가 배어났다.

일단 편하고 헐렁한 실내용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목욕물이 준비될 동안 입고 있다가 씻은 후에는 침의로 또 갈아입게 될 것이다.

자신은 황족도 아니고 아직 시종에 불과한데 이미 국혼을 마친 황후라도 된 양 클라이드에 버금가는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그녀를 위해 입궁한 시녀도 시종 에디스라면 있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정작 가장 큰 호사는 따로 있었다. 손수 그녀를 돌보고 싶어서 안달이 난 클라이드가 있으니.

“내 드레스룸에도 잠깐만 와서 있어 줘.”

“그럼 나도 시중을 들게요.”

“그럴 필요 없어. 난 평소에도 시종의 옷시중을 받지 않거든. 공식 행사가 있어서 정복을 입어야 할 때만 남의 손을 빌리지.”

복도 건너 황제의 치장 방으로 넘어가는 동안 둘이 실랑이했다. 에디스가 이길 수는 없었다. 오늘 완전히 날을 잡은 듯 클라이드의 태도가 강경했다.

에디스는 그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칸막이 너머에서 잠시 기다렸다.

그녀가 드레스에 달린 온갖 끈과 리본, 버튼으로 시간을 끌었던 데 반해 클라이드는 금세 스스로 옷을 갈아입었다. 사각사각 소리가 들리고 얼마 되지 않아 칸막이를 돌아 다시 나타났다.

칙칙한 여행자용 복장을 벗어 던진 그가 새하얀 셔츠블라우스를 걸치니 한결 인물이 살아났다.

“앗, 내가 할 일을 찾았어요. 잠깐만 있어 봐요.”

어지간히도 급했던지 칼라가 안쪽으로 말려들어 가 있었다.

네크라인이 명치까지 트인 옷이었는데, 입으며 세게 잡아당겨서 V자 형태로 가운데가 벌어졌다.

에디스는 살살 칼라를 꺼내어 목둘레를 정리해 줬다. 잔뜩 늘어진 끈도 아래쪽 구멍부터 당기며 올라와 리본을 곱게 묶었다.

그의 목 근처에서 손을 놀리는 동안 이마 위로 뜨거운 시선이 쏟아지는 게 역력히 느껴졌다. 여차하면 선을 넘을 듯한 분위기였다.

때마침 밖에서 시종의 음성이 들렸다.

“폐하, 면도와 목욕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오므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만 더 두 사람에게 시간이 주어졌다면 목욕이고 뭐고 사건이 벌어질 뻔했다.

“지금 가겠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그의 숨결이 무척 더웠다.

* * *

클라이드는 헤드 레스트가 있는 안락의자에 힘을 빼고 앉았다. 대기하고 있던 전담 미용사가 어떻게 수염을 밀지 황제에게 여쭙고 면도 거품을 저었다.

“잠깐만 기다려, 에디스. 보기 흉한 것부터 먼저 밀어 버릴게.”

“흉하지 않아요. 그리고 클라이드가 면도하는 거 신기해서 좋은데요.”

그는 에디스의 자리를 제 옆에 딱 붙여 놨다. 미용사도 지나다닐 수 없을 만큼 가까웠지만, 알아서 피해 다니라는 식으로 신경 쓰지 않았다. 에디스가 비킬 여지도 주지 않고 손목을 붙들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가. 그는 분리불안에 시달리는 사람 같았다.

상태가 중증이었다.

에디스는 며칠 지나면 나아지겠거니 여기면서 그가 하자는 대로 순순히 따랐다. 물론 자신도 매우 달가웠다.

“머리는 내일 잘라야겠어. 시간이 걸릴 테니까 말이야. 일단은 에디스를 쉬게 하는 게 먼저잖아.”

“피곤하긴 해요. 입항하기 직전에 너무 들떠서 며칠 잠을 못 잤거든요.”

밤새도록 산행했던 여파도 있었다. 씻고 베개에 머리를 대면 바로 잘 것 같았다.

그녀는 클라이드의 귀 뒤를 덮은 머리칼을 살금살금 만졌다. 단정히 올려 친 헤어스타일일 때는 몰랐는데 이만큼 기르니 옅게 웨이브가 생겼다. S자로 굽은 머리가 손가락 사이로 실크처럼 흘러내렸다.

“기른 머리도 멋있어요.”

“일부러 기른 건 아니야. 에디스가 없다고 자기관리가 소홀했던 게 들통나서 좀 그러네.”

“그럼 지금이 지나면 이 모습을 볼 기회가 없겠네요.”

살짝살짝 그의 귀밑머리를 쓸어내렸다. 손가락 두 마디쯤 자란 머리 길이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산속에서 시커먼 배경으로 봤을 때는 피폐해 보이더니 하얀색 블라우스를 입고 화사한 조명 아래에 누운 순간에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꽤 근사했다.

“진짜 괜찮아? 부랑자 같지 않아?”

“부랑자라니, 전혀요. 꼭 모델 같은걸요.”

“모델?”

“내가 살던 세계에 그런 직업이 있었어요. 맵시 내는 전문가? 대충 그 비슷한 사람이에요.”

그녀는 의자에 고개를 젖혀서 더 홀쭉해진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준비가 다 되었는데도 손을 대지 못하는 미용사를 모르는 척하면서,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처럼 전체적으로 거뭇한 하관을 만져 봤다.

“신기해. 이렇게 보니까 되게 터프한 인상이에요.”

연신 감탄하자 클라이드의 귀 끝이 줄곧 불그스름한 채 원래 색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앞으로는 이런 모습 보이지 않을게.”

“진짜 괜찮아서 하는 말인데.”

“그래도……. 얼굴이 까칠하면 너한테 키스할 수 없잖아.”

그가 에디스의 손을 끌어다가 제 입술 위에 올렸다.

까칠한 턱수염의 감촉 사이로 부르튼 입술이 느껴졌다. 촉, 소리가 나게 손바닥에 입맞춤이 지나갔다.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지난밤부터 클라이드는 제게 입을 맞추지 않았다. 안아 주고 업어 줬지만 그 이상의 접촉은 자제했다. 그의 얼굴 상태가 되게 신경 쓰였나 보다.

보기 좋다고 몇 번이나 강조하고 나서야 겨우 면도를 시작할 수 있었다.

황제의 전담 미용사가 스팀 타월을 쓰고 거품을 바른 후 쓱쓱 날을 밀자, 순식간에 말끔한 얼굴선이 드러났다. 전문가의 솜씨는 역시 탁월했다. 야수를 연상시키던 얼굴이 어느새 동안 외모로 돌아왔다. 덥수룩한 껍질을 한 겹 벗겨 낸 느낌이었다.

그녀가 놀라움의 감탄사를 내뱉을 때 미용사가 황제에게 거울을 대령했다.

“마음에 드십니까?”

“내 얼굴을 봐 줄 사람의 마음에 들어야지, 나야 상관있나.”

그러면서도 에디스의 눈이 동그래진 걸 보며 만족스러워했다.

미용사마저 내보낸 후에는 둘만 남았다.

클라이드가 그녀를 욕조로 이끌었다. 혼자 쓰던 욕조의 몇 배쯤 되는 크기였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목욕물이 후끈한 기운을 안겨 줬다.

“옷 벗겨 줄게.”

에디스의 어깨에서 가운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나한테 시중을 맡기기로 약속했으니까 이대로 가만히 있어.”

언더 드레스까지 그의 손길이 닿았다. 타인의 시중을 받을 때는 목욕하면서도 벗지 않는 옷이었다. 같이 물에 들어가더라도 마지막 한 겹은 남겨 두겠거니 싶었지만, 인제 보니 그의 생각은 에디스와 달랐다.

“클라이드, 이건…….”

그가 호소하는 눈빛을 던졌다. 면도만으로 눈부시게 탈바꿈했지만 마른 턱선은 도리어 선명하게 드러난 모습이었다. 에디스가 없어서 이렇게나 수척해졌다고 시위하는 듯했다.

“우리밖에 없잖아. 뭐 어때.”

얇은 천을 만지작거리는 그의 행동을 당황스럽게 지켜보며 에디스는 망설였다.

떨리는 마음이 그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이 이 세계에 많이 물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지우로 살 때는 다 벗고 샤워하는 게 당연했다. 남녀 사이에 있어서도 알 만큼 알았던 데다가 19금 소설은 밥 먹듯이 읽었더랬다.

심지어 그와는 동침도 한 사이였다.

거리낄 게 없어야 맞을 텐데.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날것의 느낌이 풍기는 이 남자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간이 오그라들고 심장이 갑자기 빨리 뛰었다. 피가 솟구쳐 뒤통수까지 콕콕 쑤셨다.

둘이 목욕하더라도 언더 드레스를 입은 채 품위 있게 물에 들어가리라고 짐작했을 때와는 기분이 전혀 달랐다.

기대되는 한편으로 부끄러움이 솟구쳤다.

가슴 앞섶에 얹혔던 클라이드의 손이 느슨해졌다.

“싫다면 오늘은 억지 부리지 않을게. 언젠가 허락받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

에디스는 그의 손에 겹쳤던 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용기를 내어 스르륵 손을 내렸다.

“싫지 않아요.”

어색함을 이기며 억지로 눈웃음지었다. 눈꼬리에 경련이 이는 듯했고 얼굴도 홧홧한 느낌이 역력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맘을 표현했다. 자신도 그를 원한다는 것을.

클라이드는 함부로 옷자락을 헤치지 않았다.

“그럼…… 내가 먼저 벗을까?”

둘의 가슴이 닿을락 말락 한 간격에서 그가 야성적으로 심호흡했다. 꾹 다문 입 안을 잘근잘근 씹을 때는 마치 굶주린 수컷 같았다.

툭 불거져 나온 목울대가 턱까지 솟구쳤다가 가라앉았다.

황금 펄을 뿌린 듯 은은하게 반짝이는 눈동자는 갓 데운 욕탕보다 더운 열기를 그득 품었다.

그가 느릿하게 두 팔을 엇갈려서 들었다. 손가락이 구부러지면서 리넨 셔츠를 아랫단을 끌어 올렸다. 신체 내부의 소소한 움직임마저 에디스의 눈으로 읽을 수 있을 만큼 느린 몸놀림이었다.

마지막 기억보다 확연히 마른 상체가 온전히 드러났다.

서지우의 세계 대중매체에서 흔히 보던 상의 탈의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클라이드는 헬스로 키운 몸매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팍팍했고 근육 사이사이에 고난의 상징처럼 근섬유가 드러나 있었다.

건장한 남자의 품에 안기게 될 순간은 분명히 짜릿할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원초적인 욕망의 불길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동시에 더 늘어난 흉터에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오른쪽 가슴의 바로 아래에 수술로 꿰맨 자국이 불긋하게 남아 있었다. 지난가을만 해도 말끔했던 자리다.

“이건.”

“별거 아니야. 딱 봐도 알 수 있잖아.”

“어떻게 부상당한 거예요?”

“그냥 참전 중에.”

“클라이드가 전장에 직접 나선 건가요?”

“손실은 줄이면서 최대의 효과를 거둘 방법을 선택했을 뿐이야. 대단치 않아.”

그가 어영부영 넘어가려고 하자 에디스의 다그치는 음성이 조금 커졌다.

“어떻게 다쳤냐고요!”

한 번 더 말 돌리기를 하면 화내려고 했다. 그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떠도 물러나지 않았다. 이건 꼭 알고 넘어가야 했다.

“방탄복을 뚫고 총알이 얕게 박혔어. 바로 수술해서 보다시피 말짱해졌지.”

가슴 아래의 붉은 자국을 손끝으로 건드렸다. 그는 괜찮다고 해도 에디스는 괜찮지 않았다. 사람을 죽이려고 쏘는 총에 맞았는데 어떻게 ‘그냥’이라는 말로 넘어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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