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실랑이하는 동안 어느새 산 아래까지 내려오고 말았다. 결국 한 걸음도 걷지 않고 클라이드의 등에서 말 등으로 바꿔 타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
에디스는 이곳까지 타고 왔던 말에 오르려 했다. 그런데 클라이드가 자신의 말을 끌어왔다.
“여기에 타.”
“내가 탔던 말도 나쁘지 않아요.”
“같이 타려고 그래.”
“왜요? 구태여 그럴 필요가.”
의아해하는 에디스를 재촉해 먼저 말에 오르게 한 후, 그가 뒤쪽에 탔다. 허벅지가 닿을 만큼 가까이에 붙어 앉더니 속닥속닥 달곰한 귓속말을 건넸다.
“너랑 떨어지기 싫어서.”
역시, 인상만 날카로워졌다뿐이지, 하는 짓은 예전 그대로였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적극적이다.
황제의 말은 품종이 좋아서 그런지 굉장히 덩치도 크고 다리도 길었다. 두 명이 타도 달리는 속도가 거의 줄지 않았다. 덕분에 약간의 휴식 시간을 제외하고 줄기차게 달릴 수 있었다.
* * *
날이 밝고 해가 높이 솟을 때쯤 황궁에 다다랐다.
황제의 귀환을 맞이하며 정문이 활짝 열렸다. 좌우로 넓게 만들어진 창살 대문은 마차 여러 대가 동시에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넓었는데, 에디스는 그 문이 끝까지 열리는 걸 작년의 황실 연회 이후로 처음 봤다.
잠행 다니던 시절의 황태자와 지금의 황제 클라이드는 여러모로 달랐다.
이젠 선황의 대리청정이 아니었다. 황실과 대립하던 귀족파도 사라졌다. 그의 행보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터였다.
활기찬 도시 풍경과 익숙한 궁 내부를 둘러보니, 제국이 큰 전쟁을 거친 후에도 안정적으로 꾸려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떠나 있던 동안에도 클라이드는 이곳을 잘 지켜 왔음이 분명했다.
둘은 태운 말은 속도를 줄여 중앙 정원의 반듯한 벽돌길을 지났다.
“클라이드, 혼자 봄맞이 나들이를 다녀오느라고 심심했겠네요. 마음 맞는 사람들이랑 같이 가지 그랬어요.”
에디스는 수도 인근의 산에 있던 그를 만나고 함께 돌아오면서 곰곰이 생각해 봤다. 왜 거기에 있었을까? 바람이라도 쐬러 나갔나? 그것 외에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나들이 아니었어.”
“그럼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별을 보러 갔었어. 네가 무사히 내게로 돌아오도록 인력을 끌어올렸지. 눈에 보이지 않고 믿기도 힘들지만, 쥐어짜 내서라도 인력을 만들려고 애쓰면서 말이야.”
말고삐를 잡은 그의 손등에 에디스의 손이 살짝이 얹혔다.
“우연히 날이 맞아떨어졌네요. 내가 오는 날 마침 클라이드가 별을 보러 나갔잖아요. 어쩌면 효험이 있는 걸까요?”
“그럴지도.”
클라이드는 반 이상의 시간을 궁 밖에서 보내는 요즘 근황을 구구절절하게 고백하지는 않았다. 웬만해선 에디스가 돌아올 때와 그가 황궁 밖을 헤맬 때가 겹쳤을 거라는 얘기는 빼고, 그저 그녀의 온기를 느끼며 차분히 맞장구치기만 했다.
재회한 에디스가 그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앞뒤 가리지 않고 광인처럼 황야와 산지를 헤매던 나날을 구체적으로 밝히면 그녀에게 꺼리는 기색이 엿보일 게 분명했다.
그는 에디스와 다시 만날 순간을 의심한 적 없었다. 의심하면 지는 거니까 반드시 돌아오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마주칠 줄은 몰랐다. 항구에 배가 도착하면 궁이나 야외에 있을 클라이드에게 소식이 먼저 전달되겠거니 예상했다.
이렇게 그녀가 직접 온 상황은 허를 찔린 거나 같았다.
에디스가 잠깐 뒤를 돌아봤다. 갈피를 못 잡는 초록 눈동자로 흘끔거리다가 재빨리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손톱만큼 자란 수염이 입 주변과 뺨까지 덮여 있으니 오죽하겠는가. 클라이드는 이런 제 모습이 부끄러웠다. 몸단장할 시간도 없이 그녀와 마주친 현실이 암담했다. 창피하지 않은 척하려고 고개를 뻔뻔하게 치켜들었지만 사실은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붉어진 귀 끝이 제법 자란 머리칼에 감춰졌다. 몸에 밴 자세가 황제답게 당당했다. 하지만 마음은 잔뜩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목소리조차 잔뜩 쉬어서 에디스에게 말을 건네기가 민망했다. 입을 열면서 노인네처럼 헛기침해서 목소리를 가다듬어야 했다.
“에디스, 앞으로 우린 황제 궁에서 살게 될 거야.”
“맞아, 사는 곳이 달라질 수밖에 없겠네요. 황태자 궁은 비어 있겠군요.”
“네 직책으로는 시종장이 적당하겠어.”
“시종장은 너무 높은 자리 같은데요.”
“원래 황태자 궁에서 시종장직을 맡았던 제레미언 경은 총시종장으로 승진했어. 선황께서는 총시종장 아래로 시종장을 세 명 두셨으니까, 에디스한테도 시종장이 딱 맞다고 생각해.”
“음, 그 정도면 뭐…….”
에디스는 잠시 고심하다가 제의를 받아들였다. 가장 높은 자리는 책임이 막중해서 꺼려진 탓이었다. 책임이란 곧 일이 많다는 뜻이다. 클라이드의 측근 시종으로 있는 동안에도 업무가 차고 넘쳤던 기억이 많아서 윗자리는 별로 원치 않았다.
황궁의 중심부에 크게 자리 잡은 궁에 도착했다. 클라이드가 먼저 내려 에디스의 손을 잡아줬다.
“먼저 할 말이 있어.”
의미심장한 태도로 그가 에디스의 양쪽 어깨를 붙들었다. 정색하면서 둘이 얼굴을 마주했다.
“우리, 궁에서 같이 지낼 뿐만 아니라 계속 가까이에 있었으면 해.”
“물론이죠. 내가 본가로 퇴근하겠다고 할까 봐 그래요?”
“출퇴근 문제만 얘기하는 게 아니야.”
“그러면요?”
클라이드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잔뜩 부르튼 입술은 건조하고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 심지어 물어뜯어서 피딱지가 군데군데 앉았다.
초췌한 모습으로 소원을 빌었다.
“한시도 빠짐없이 에디스 옆에 내가 있고 싶어.”
에디스는 그가 잔뜩 분위기를 잡은 것만큼 심각한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예전에도 늘 같이 있었는걸요.”
“부족해. 그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아. 옷 갈아입을 때도 지켜보고 싶고, 목욕도 같이하고 싶어.”
24시간 한 몸처럼 붙어 있자는 건가? 예상을 넘어선 바람이었다.
에디스가 옷을 갈아입을 때는 혼자가 아니었다. 복잡한 드레스는 보통 혼자 입기 까다로워서 시중드는 궁인 여럿이 도와주곤 했다. 치장을 위한 사적인 공간에 클라이드의 방문을 허락하는 건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목욕은 더 어려웠다. 역시 여러 명의 궁인이 더운물을 수시로 보충해 주고 세신을 도와줬다. 케츠모리스 저택에서 일손이 부족할 때는 에디스가 혼자 잘 닦았지만 궁에서는 돌봄을 사양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주어지는 혜택을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클라이드, 잠깐만요.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워 그런 것 같은데…….”
하지만 클라이드의 태도는 완강했다. 아예 한술 더 떴다.
“화장실도 따라갈 거야. 나한테 손가락질할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누가 뭐라든 난 황후의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고 말 테니까.”
“싫어요. 창피하다고요.”
“그럼 한 발짝 떨어져 있을게. 더는 안 돼.”
“클라이드.”
“내가 감정 조절이 힘들어서 그래. 에디스가 없는 동안 너무 힘들었어. 조금만……. 조금만 내 사정 좀 봐주면 안 될까?”
살집이 절반은 줄어들어서 퀭한 얼굴로 그가 에디스에게 간청했다. 어깨를 잡은 손마저도 말라 손가락이 살을 파고들었다. 혼자였던 나날 그가 얼마나 피폐하게 지내 왔는지 여실히 보이는 모습이었다.
차마 도리질 칠 수 없었다. 그녀는 입술을 꼭 물면서 꺼져 가는 불꽃 같은 그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고마워. 네가 불편하지 않게 잘할게.”
나란히 발을 맞춰 황제 궁으로 입성했다. 클라이드가 손을 깍지 껴서 빈틈없이 잡았다.
낯익은 시종들이 줄지어 뛰쳐나와 황제 앞에 머리를 숙였다. 간간이 에디스에게 곁눈질하면서 귀환을 환영하는 눈빛도 보냈다. 하지만 황제를 먼저 받들어야 하는 탓에 반가운 인사는 나중으로 미뤄야 했다.
“에디스가 쉴 수 있도록 서둘러 준비해라. 그리고 나도 씻어야겠구나.”
“명 받듭니다, 폐하.”
“목욕을 같이하겠다. 2인분의 큰 욕조를 준비하고 궁인은 물리도록 해라.”
“예?”
시종이 놀라서 반문하려다가, 두 사람의 분위기를 읽고 태도를 바꿨다.
“예! 준비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드나들지 않아도 될 만큼 한꺼번에 갖춰 놓으면 되겠습니까?”
“아, 면도는 도움을 받아야겠군. 목욕 전에 미용사만 부르면 되겠다.”
에디스의 드레스룸에 그가 함께 들어가겠다고 했을 때도 시종은 놀라워하면서도 냉큼 대답하는 처세술을 발휘했다.
황제의 침실 옆방은 변함없이 에디스의 치장 방이었다. 장소만 황태자 궁에서 황제 궁으로 바뀌었다뿐이지 배치는 비슷했다. 한결 화려해지고 더 많은 드레스와 귀물이 가득 찼다는 것만 달랐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에디스를 위해 오래전부터 선발되어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이 차례차례 인사를 올렸다.
“케츠모리스 경, 만나 뵈어서 반갑습니다. 저는 카티네스 백작 부인입니다.”
“저는 해밀턴 백작 부인입니다.”
“저는 제리언 자작 부인이에요. 드디어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다들 반가워요. 궁에 계속 계셨던 건가요? 제가 언제 돌아올 줄 알고요.”
“폐하께서 명하셨어요. 경이 언제 오시든 이곳에 생활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준비하라고요.”
하지만 클라이드의 따가운 눈총 탓에 시녀들과 에디스는 간단히 첫 대면만 하고 헤어져야 했다. 얼른 물러가라는 눈치를 못 알아챌 수 없는 분위기였다.
갈아입을 옷만 골라서 꺼내 놓은 시녀들이 총총히 뒷걸음질 쳐 물러났다.
문이 닫히자, 클라이드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시녀 대신에 내가 시중들게.”
은근한 손길로 망토의 매듭을 풀려 했다. 땀이 나도록 두 겹이나 두른 망토 중 하나를 그가 벗겨 냈다. 부담스러워라. 에디스는 또 다른 매듭을 당기려는 클라이드의 손을 쥐었다.
“내가 할게요.”
“아냐. 내가.”
“여기서부터는 내 손으로 할게요. 옷 갈아입을 때도, 씻을 때도. 그 밖의 개인적인 용무를 볼 때도 늘 같이하자는 조건을 받아 줬잖아요. 그러니까…….”
“시녀를 물렸으면 그만큼 보상해야지. 에디스를 힘들게 할 생각은 없어.”
“힘들지 않아요. 서지우의 세계에서는 원래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사는걸요.”
잡은 손가락을 떼어 내려 했지만, 빤히 쳐다보는 클라이드의 시선에 못 이겨 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