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그리웠던 그 사람인데, 기억과 같지 않았다.
클라이드는 망가진 듯한 느낌이었다.
잔뜩 흐트러진 데다가 다듬은 지 한참 된 머리칼이 목덜미를 덮었다. 수염조차도 제대로 깎지 못해 턱 전체가 꺼멨다. 살이 안쓰러울 정도로 많이 빠져서 볼이 움푹 파였다. 뾰족하게 날이 선 턱선은 수염으로도 가리지 못했다.
퀭한 눈자위에 덮인 황금빛 홍채가 광기를 머금어 번뜩였다.
에디스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면서 야생의 짐승처럼 날카로운 안광을 쏘아 냈다.
방한용 망토가 펄럭여 그의 다리가 드러났다. 기억하던 굵기가 아니었다. 탄탄한 근육이 보기 좋게 잡혔던 허벅지는 어디로 가고 고목처럼 바싹 마른 다리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주변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 듯 에디스하고만 똑바로 눈을 맞추며 뛰듯이 걸어왔다.
클라이드가 몰고 온 바람이 피부에 먼저 닿았다.
“에디스, 맞아?”
잔뜩 쉰 목소리였다.
엉망진창인 음성 때문에 그가 더욱 피폐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뒷걸음질 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야 했다. 본능적인 두려움이 도망치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이 남자는 위태로우며 정상이 아니라고, 황금안의 시선이 따끔하게 꽂히는 피부마다 위험 신호가 울렸다.
마른침을 삼킨 후, 본능보다는 여태껏 품어 왔던 그를 향한 감정을 되새겼다. 무엇을 위해 그 먼 곳에서 돌아오려고 애썼는지 상기했다.
그와 재회하지도 못하고 서지우의 세계로 돌아갈까 봐, 잠들 때마다 조마조마했던 심정도 떠올렸다.
“응…. 다녀왔어요.”
클라이드는 폐인이 다 된 행색이면서도 절망하는 느낌은 없었다. 심한 부상을 당한 채로도 물러서지 않고 꼿꼿하게 버티는 짐승 같았다.
자신이 알던 클라이드가 맞았다.
한 걸음 앞에서 우두커니 멈춰 선 그가 움직이지 못했다. 에디스는 조심히 마지막 걸음을 옮겨 다가갔다. 우리가 늘 겪어 왔던 좁은 간격 안에서 옷자락이 스쳤다.
“클라이드, 몸이 많이 상했네요.”
까칠한 얼굴 위로 손을 뻗었다. 나무껍질 같은 촉감이었다. 이런 모습을 누가 승전국의 황제라고 믿을 수 있을까.
차갑고 굳은 얼굴이지만, 클라이드가 맞았다.
제가 정말로 좋아하는 남자다.
“하…….”
갑자기 그가 무너졌다.
풀썩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 쓰러져 버렸다. 가누지 못하는 몸이 서서히 에디스에게 기울었다.
살기 위해 허우적거리는 자처럼 클라이드가 그녀를 허겁지겁 붙들었다. 두 팔로 허리를 힘껏 끌어안았다. 얼굴은 복부에 푹 파묻었다. 바람 냄새와 차가운 체온이 한꺼번에 에디스에게 닥쳐왔다.
까칠하게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음성은 절규하는 듯했다.
“에디스. 에디스. 에디…….”
얼굴을 그녀의 복부에 파묻어 뭉개지는 소리였지만 큰 외침보다 호소력이 있었다. 한결 더 절절했다.
그는 정말로 휘청이고 있었다. 에디스가 지탱해 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쓰러질 듯한 상태였다. 꽉 끌어안은 채로도 몸이 조금씩 흔들렸다.
“만나게 될 줄 알았어. 의심하지 않고 늘 힘을 냈어.”
장담하는 말투에서 두려움을 엿볼 수 있었다. 클라이드는 자신이 오지 못할까 봐 두려웠던 거다.
“나도요. 힘냈어요.”
그가 그녀의 배를 얼굴로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문제는 열심히 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지만, 별을 넘어가 버리는 건 정말 겁났거든요.”
“겁내지 마. 지면 안 돼.”
“맞아. 지금 지면 너무 억울하잖아요.”
에디스는 길게 자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로맨스 소설을 읽을 때 장발 남자도 꽤 좋아했지만 클라이드가 잔뜩 망가진 채 스스로 몸가짐도 정리하지 못한 건 충격이었다.
그래도 이 와중에 결은 참 좋았다. 귀 옆을 살살 만지니까 새까만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로 스르륵 빠져나갔다.
“부축해 줄게요. 그만 일어나요.”
클라이드는 몸속에 있던 숨을 한꺼번에 뽑아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곧이어 빈 폐에 새로운 공기를 채운 다음, 언제 흔들렸냐는 듯이 훌쩍 일어났다.
여전히 초췌하지만 한결 단단해진 모습으로 그가 에디스를 끌어당겨 팔꿈치를 잡았다.
“부축은 내가 에디스에게 해야지.”
“난 아픈 데 없어요.”
“아닐걸. 조금 전에 절룩거리던데.”
눈치도 빠르지. 그 잠깐 사이에 알아채다니.
“별로 절룩거리지 않았는데요.”
“아프긴 아프다는 얘기군. 어떻게 부상을 입었지? 우선 좀 봐 봐.”
근심을 한 보따리 짊어진 그가 에디스를 앉을 만한 곳으로 이끌려 했다.
이런 행동을 보니 원래 알던 클라이드와 똑같았다. 세게 잡으면 부서질세라 조심히 팔을 잡는 손길도 예전 그대로였다.
오래 떨어져 있던 동안 에디스가 어떻게 지냈는지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한 탓에 걱정할 법도 했다. 에디스도 그의 달라진 모습에 놀랐으니 피차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클라이드도 조금 다르게 걷는 그녀의 걸음만 보고 크게 다쳤을지 모른다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에디스는 슬쩍 웃음이 나왔다.
“구두 바람으로 산길을 걸어서 조금 불편해진 것뿐이에요. 이런 건 보통 부상이라고 부르지 않죠.”
“그런 거였군. 하지만 직접 봐야 마음이 놓이겠어.”
“별거 아니라니까요.”
“일단 앉아 봐.”
그가 부득부득 신발을 벗기고 발 상태를 확인했다. 별이 환하다고는 해도 세밀한 차이까지는 눈으로 볼 수 없어서, 손으로 조몰락조몰락 만지며 감촉을 느꼈다.
“간지러워요.”
“발가락에 물집이 잡혔네. 걷기 힘들겠군.”
“살살 걸으면 돼요.”
언짢은 탄성이 클라이드의 발아래로 흘렀다.
“누가 이런 짓을 했지?”
“네?”
그가 돌연히 옆을 홱 돌아봤다. 노여움을 가득 담아 에디스와 동행했던 사령관을 비롯한 호위와 군인을 차례차례 노려봤다. 범인을 색출하려는 태도였다.
어떻게 봐도 에디스가 제 발로 걸어 올라온 상황이었다. 그런데 비난의 화살이 주변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눈으로도 날카로워 보이던 인상은 다른 이에게 훨씬 맹렬하고 사나웠다.
“책임자가 사령관이지? 에디스를 모셔 오라고 내가 특별히 따로 불러 명했으니 말이다.”
바짝 각이 선 자세로 에스톤이 경례를 붙였다.
“예, 폐하. 제가 모시고 왔습니다.”
“케츠모리스 경이 다치는데도 이 험한 산길을 끌고 올라온 듯한데, 맞나?”
“그게…… 공작님께서 한시바삐 폐하를 뵙고 싶다고 해서…….”
클라이드가 말허리를 자르며 에스톤을 을러댔다.
“이 늦은 밤중에 말이야. 옷이며 신발도 도저히 거친 산을 오를 만한 상태가 아니었는데도 강행군을 한 거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공작님이.”
“케츠모리스 경이 날 만나겠다고 했으면 모시고 오는 게 맞지. 하지만 그런 경우에는 당연히 뭐라도 태워서 모시고 와야 하는 거 아닌가? 함께 온 건장한 군인도 많은데, 꼭 경을 걷게 해야 옳았나?”
내버려 두면 정말로 엄벌에 처할 기세였다. 괜히 으름장 놓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에디스는 사태가 더 번지기 전에 냉큼 끼어들었다.
“클라이드, 난 괜찮아요. 발도 말짱해요.”
“아니야.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어.”
안 되겠다. 특단의 조치를 해야겠어.
“나 얼른 쉬고 싶어요!”
클라이드의 소매를 당기면서 단호히 외쳤다. 여차하면 애꿎은 에스톤에게 탈이 나게 생겨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다시 에디스에게 집중하면서 신발을 신기고 옷 사이로 찬 바람이 들지 않도록 추슬러 줬다.
“그래, 돌아가자.”
때마침 클라이드가 나타난 덤불 쪽에서 근위병들이 달려 내려왔다. 그를 뒤따라온 눈치였다. 에디스 일행을 보자 다들 간단한 예를 표했다. 언뜻 감격에 겨운 표정도 엿보이는 걸 보니 그동안 황제를 보필하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클라이드는 주변에 아랑곳없이 에디스를 꽁꽁 싸매기에 바빴다. 밤공기가 차갑기는 하지만 그의 망토까지 얻어 입으니 몸놀림이 둔해졌다.
“망토가 끌리네요. 이러고는 움직이기 힘들어요.”
“다친 발로 어딜 움직이겠다는 거야.”
걱정 섞인 말투와 함께 그가 에디스에게 등을 돌려 앉았다. 황제답지 않게 쪼그려 앉은 자세였다.
“업혀.”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기까지 했다. 에디스의 두 발아래에 등을 밀어 넣는 행동에 순순히 업힐 때까지 꼼짝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나 무거운데.”
“에디스를 들어서 옮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안 무거운 거 뻔히 알아.”
“당신 컨디션도 안 좋아 보이는데.”
“내 컨디션?”
넓은 등이 고집스러운 바위처럼 펼쳐졌다.
“전혀. 완전히 멀쩡해.”
도저히 말릴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까칠하고 날카로운 인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음 놓이는 등을 바라보는 동안 에디스는 자신이 아는 클라이드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잠깐만.”
팔을 그의 든든한 목덜미에 두르며 포근히 업혔다.
“클라이드, 조금만 내려가다가 내려 줘야 해요. 실내에서 잠깐 안아 옮기는 것과는 다르니까요.”
“생각해 보고.”
클라이드는 그녀의 엉덩이 밑으로 손을 엇갈려 받친 후 가뿐하게 일어섰다. 휙 들어 올리는 힘에 에디스의 몸이 살짝 틈을 벌려 나풀거리다가 그의 등에 안착했다. 힘이 되게 세다.
확실히 체격은 말랐다. 업힌 팔다리에 닿은 그의 몸이 예전과 차이가 크게 났다. 반년 넘은 기억을 떠올려도 알 만한 정도였다.
그래도 뿌듯했다. 두 팔 안에 그의 존재가 가득하다는 사실이 새롭게 느껴졌다. 산길을 내려가는 동안 규칙적으로 들썩거리는 리듬도 흐뭇했다.
“좋아…….”
에디스는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하체를 받친 클라이드의 팔뚝에 움찔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손목 옆으로 툭 튀어나온 목울대가 급한 속도로 흔들렸다.
클라이드는 뭐가 좋다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가 제게 건네는 고백인지, 업혀 있는 순간이 마음에 든다는 뜻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느 쪽이든 그 역시 좋았다.
그녀를 업은 상태가 무색하리만치 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빈손으로 산행한다고 해도 믿을 속도였다.
업힌 채 풀썩풀썩 몸이 날뛰는 바람에 에디스는 그의 목덜미를 두른 팔을 바짝 조여야 했다.
“왜 이리 서둘러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뭘요.”
“너무 벅차서, 심장이 폭발할 것 같아서 미치겠어. 업고 있는데도 이 순간이 믿어지지 않는 기분 알아? 아마 안고 있어도 마찬가지일 것 같지만.”
커다란 바위를 훌쩍 뛰어넘어 나는 듯이 가파른 비탈을 달렸다.
“이제 내려 줘요.”
“안 돼.”
“계속 업혀 다니면 내 맘이 불편하단 말이에요.”
“어림없어.”
단호한 거절과 함께 그가 제 목선 앞으로 에디스의 손을 맞잡게 했다. 따뜻하게 열기가 솟아나는 등줄기가 힘차게 불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