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함께 하선한 군사령관 에스톤이 그녀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여기까지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일단 잠깐만 계시겠습니까? 제가 여기저기 사람을 보내 보겠습니다.”
“아닙니다. 이대로 황궁으로 돌아가면 돼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전쟁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지 않습니까. 폐하께선 전장에 계실지도 모릅니다.”
“설마 전세가 뒤집혀서 적군이 여기까지 밀려 내려왔을까 봐 그러십니까?”
에디스가 장난스레 묻자, 사령관은 머쓱한 태도로 맞받아쳤다.
“공작님을 안전히 귀환시키는 게 제 임무입니다.”
“알았습니다. 잠시 기다리지요.”
그런데 굳이 알아보러 갈 필요도 없었다. 한발 늦기는 했지만 근처에 있는 건물에서 웬 사람이 뛰어왔다. 새로 배가 입항한 것을 보고 확인하러 나온 듯했다.
“어디에서 온 배입니까?”
에스톤이 남자를 상대했다.
“흙과 지평선에서부터 왔다. 자네는 항구 관리소 직원인가?”
“오오, 드디어 그곳에서 배가 들어왔군요. 저는 궁에 고용된 사람입니다. 케츠모리스 공작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에스톤을 제치고 에디스가 곧바로 남자에게 다가섰다.
“궁에서 왔다고 했는가?”
긴 망토에 후드까지 덮어썼지만 체격과 말투만으로도 귀족 여성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는 모습이었다. 남자가 눈치 빠르게 허리를 굽신거렸다.
“예, 폐하께서 직접 명을 내리셨습니다. 여기에서 24시간 대기하면서 공작님이 오시는지 확인하라고요.”
“폐하께선 지금 어디에 계시지?”
“지금쯤 산에 오르셨을 겁니다. 궁 밖으로 나서실 때마다 저에게도 목적지가 전달되거든요.”
“산? 설마 전쟁 중인가? 산에 고립되기라도 했어?”
남자가 넉살 좋게 웃었다.
“전쟁은 진작 끝났습니다. 저희 제국이 체르헨을 싹 쓸어버렸는걸요.”
“다행이군. 폐하께선 무사하시고?”
“무사……하시다고 하기엔 좀 애매합니다. 저는 한낱 아랫사람이라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무슨 뜻인지 자세히 설명하게. 부상이라도 심하게 입으신 건가?”
“부상은 아닙니다. 하여튼 멀지 않은 산으로 가셨으니 조만간 뵐 수 있으실 겁니다. 폐하께서 돌아오시려면 며칠 걸릴 테니 공작님은 일단 댁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에디스는 불쑥 염려가 되기 시작했다.
클라이드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궁금해서 참기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항구를 지키는 남자에게 꼬치꼬치 따져 묻기도 뭣했다. 황제의 건강이나 사생활을 일개 심부름꾼에 불과한 자가 자세히 알고 있다면 오히려 더 문제였다.
여기까지는 호기롭게 왔는데 정작 클라이드가 있는 땅으로 내려서자 마음이 급격히 술렁거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얌전히 클라이드를 기다리는 건 체질에 안 맞아.
깊이 따질 것도 없이 에디스는 금세 결심했다.
“폐하께서 간 곳이 어디라고 했지?”
“동쪽으로 쭉 가면 나옵니다. 루폰 산이라고, 멀지는 않습니다만 산세가 험합니다.”
“내가 그곳으로 폐하를 마중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에스톤이 중간에 끼어들어서 물었다.
“공작님께서 직접 가시게요?”
“폐하는 나를 많이 걱정하셨던 듯합니다. 계속 기다리게 하는 것보다는 내가 당장 가야 도리에 맞겠지요.”
“그런 생각이시라면……. 루폰 산은 저도 잘 압니다. 종종 군사훈련 차 다녔던 곳이거든요. 몇 가지 준비물만 챙겨서 제가 모시겠습니다.”
수도 주변의 상비군 2대대에서 복무했던 사령관 에스톤은 인근의 지리를 훤히 꿰고 있었다. 그는 사령관으로서 황궁과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주변을 완벽히 숙지하는 게 필수라고 강조했다.
에디스는 일행과 함께 말을 달려 산으로 향했다.
곧 그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속도를 올렸다. 별이 가득한 밤하늘 위로 한꺼번에 말이 달리는 소리가 멀리 퍼졌다.
산 아래에 도착했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밤에 짝짓기하는 새들이 독특한 소리로 울어 댔다.
“어디로 올라야 하지요? 엄청 큰 산 같아서 자칫하다간 만나기는커녕 서로 어긋나기만 하겠습니다.”
“이쪽으로 가면 무난할 것 같습니다.”
방향을 잡은 에스톤이 자신의 부사관들을 앞세우고 그녀와 함께 산길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에디스를 달래듯이 찬찬히 대화도 건넸다.
“못 뵈어도 궁으로 돌아가서 기다리면 됩니다. 며칠 내로 폐하께서도 돌아오시겠지요.”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공작님께서는 폐하를 빨리 뵙고 싶으신가 봅니다.”
“그렇죠. 좋은 분이잖아요.”
에스톤이 고개를 외로 꼬았다. 무슨 소리냐는 듯 얼굴 가득히 의문을 품었다.
“어디에서 좋은 분이라는 느낌을 받으셨는지?”
“네? 그야 친절하고 다정하고…….”
“네?”
“에?”
서로 물음표만 가득 띄운 채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에스톤은 못 들을 얘기를 들었다는 태도로 체면에 어울리지 않게 뒤통수를 긁었다. 지엄한 황제 앞이라면 무례할 행동이지만 에디스하고는 항해하는 동안 친분을 쌓은 덕에 거리낌 없이 개인적인 소견을 내보였다.
클라이드와 헤어진 지 한참이 지나 자신이 잘못 기억하는 걸까.
분명히 상냥하고 살갑고, 이것저것 챙겨 주는 것도 많았던 것 같은데.
특히 디저트를 잘 챙겨 줘서 저녁밥 먹은 다음에는 메인 요리보다 빵빵하게 갖가지 간식을 차려 줬다. 클라이드는 먹지 않으면서 오로지 에디스만을 위해 호화찬란한 케이크와 제과제빵류를 대령했더랬지. 그녀의 포크가 어디로 향하는지 지극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늦어서 자연스럽게 씻고 클라이드의 침대로 기어들어 가곤 했지.
어느새 클라이드의 농간에 휘말려 집에 못 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다시 생각해 보니 상관으로서 되게 모시기 좋았던 건 아닌 듯해요.”
클라이드를 향한 마음이 강하기는 하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가 무척 좋아.
그런데 그때를 되새겨 보면 그는 물불 가리지 않고 자신을 곁에 두기 위해 애썼다. 그 정도로 집요하게 구애를 받았으면 돌부처도 돌아앉았을 거다.
에디스도 처음에는 별생각 없고 하루빨리 시종직을 관두고 싶었다가 어느 순간 호로록 그에게 말려들고 말았다.
한마디로 코 꿰인 거지. 인제 와 무를 수도 없고.
클라이드와 티격태격하면서 싸움과 장난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툼도 많이 했다. 그가 아드리안한테 질투한 적도 있었지. 페이튼과 혼담이 진행될 때마다 막 성질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페이튼의 집에 다녀오던 중에 클라이드에게 처음 고백받았네. 그가 잠깐을 참지 못하고 궁에서 뛰쳐나와 에디스의 마차를 따라잡았다.
“하아, 보고 싶어라.”
자신의 입에서 그리움 섞인 한숨이 튀어나올 때, 에디스는 일방적인 고백을 받은 게 아니라 스스로 그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집착하던 행동도, 질투하던 말투도 어서 다시 만나고 싶었다.
코를 꿰였지만 싫지 않았다. 쌍방 간에 꿰고 살면 괜찮을 듯싶었다.
같이 살 수만 있다면…….
산길이 계속 이어졌다. 에스톤은 앞장서서 가며 길도 나지 않은 오르막을 가리켰다. 일행의 앞과 뒤로 간단한 짐을 진 군인이 따랐다.
“이쪽 길이 황궁에서 오면 접근하기 쉬운 길입니다. 아마 폐하께서도 이리로 올라가셨겠지요.”
“길이 안 보이는데요.”
“사람이 충분히 다닐 수 있는 길인걸요. 군사 훈련할 때 이 정도면 편한 축에 속하지요.”
“저 군인 아니에요. 제 또래의 다른 귀족은 레이디로 불립니다만.”
사령관의 발걸음이 살짝 삐끗했다. 앞뒤로 줄을 섰던 사람들도 속으로 큭큭 웃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께서 워낙 사격이 출중하셔서 착각했습니다. 조금 전에 말도 제일 잘 달리시길래.”
어련하시려고. 에스톤의 고정관념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큰 바다를 건너는 동안 지루할 때마다 갑판에 나가서 총으로 점수 내기 놀이를 했다. 파도에 흔들리는 배 위에서 갑판 반대쪽 끝에 표적지를 붙여 두고 쏘는 방식이었다. 에스톤은 그 많은 내기에서 에디스를 이긴 적이 거의 없었다.
“쉬었다가 가자는 뜻이었어요. 발이 좀 아파서요.”
일행이 당장 쉴 곳을 찾았다. 커다랗고 밋밋한 바위에 말끔히 흙을 털어 낸 후 앉을 자리를 마련했다.
그녀는 항구에 도착할 때에 맞춰 편하면서도 맵시가 나는 옷을 입은 채였다. 신발도 구두였다. 굽은 낮지만 산에 오르기는 무리였다. 얼마 올라오지 못했는데 앞꿈치에 물집이 잡힌 느낌이 들었다.
쉬는 동안 에스톤이 신호탄을 쏘라는 지시를 내렸다. 군인이 짐에서 신호탄을 꺼내 밤하늘에 쏘아 올리자, 노란색 연기가 곡선형의 기다란 꼬리를 만들었다.
“밤이라서 신호 색이 눈에 안 띄면 어떡하죠?”
“산을 오르면서 계속 쏘아 올리면 됩니다. 신호탄이 의외로 멀리서도 잘 보이거든요.”
목적지도 정하지 못하는 상황인 데다가 급할 건 없어서 천천히 아픈 발을 풀며 기다렸다. 이제 다시 길을 재촉해 볼까 싶은 찰나 먼 산등성이에서 같은 색의 신호탄이 올라왔다.
클라이드가 분명했다. 노란 연기 꼬리의 끝에 그가 있겠지.
육안으로는 찾을 수 없겠지만 그녀는 새카맣게 우거진 나무들을 유심히 뜯어봤다. 살피다 보면 마치 그가 망원경으로 보듯 확대되어 나타날 것만 같았다.
“우리도 저기로 갈까요?”
“폐하께서 내려오는 게 훨씬 빠를 테니까 기다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바위에서 일어나려는 에디스의 자세가 영 불안했던지 다들 산행을 말렸다.
잠시 후에 또 다른 신호탄이 올라왔다. 먼젓번보다 한결 가까워진 거리였다. 물 한 모금 마시고 망토 좀 추스르고 나니 또 신호탄이 올라왔다.
이렇게 빨리 산에서 내려올 수도 있을까? 아스팔트 깔린 길을 차로 올 리도 없고, 데굴데굴 굴러오나? 산꼭대기에서 몸을 던졌나? 기대감에 잔뜩 부푼 에디스의 마음에 즐거운 상상이 가득했다.
어렴풋이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군인이 신호로 쓰는 호루라기였다. 우리 쪽에서도 호루라기를 불어 위치를 드러냈다.
클라이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매 순간 소리가 커졌다.
만나면 꼭 안아 주고 싶었다. 자신이 먼저 다가가면 그가 되게 좋아하겠지.
부드러운 눈웃음을 볼 수 있을 거다. 클라이드는 많이 보고 싶었냐고 저를 놀릴지도 몰랐다. 장난기 어린 얼굴도 얼른 만났으면 좋겠다. 가끔 환하게 웃으면 보이는 하얀 치아도.
삐이—
삐이이—
호루라기 소리가 바로 덤불 너머에서 들렸다. 부스럭부스럭 나무 헤치는 잡음과 함께 시커먼 인영이 나타났다.
“클라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