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12장. 잠을 자지 않는 황제>
계절이 돌아 눈이 녹고 나무에 새싹이 돋았다.
체르헨과의 전쟁은 끝이 났다. 양국의 군대가 여전히 대치 중이지만 무력 충돌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황실 차원에서 협상이 이루어지는 동안 군대는 단순히 마주 보는 지역에 머물기만 했다.
국경선이 이전보다 한참 위로 올라가는 바람에 체르헨과 논의할 부분이 많았다. 받아 내야 할 전쟁 배상금도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체르헨은 되도록 손해를 덜 보려고 애쓰는 중이지만, 몇 주 내로 협상안에 사인하지 않으면 라그란드 쪽에서 군사 활동을 재개할 거라는 위협을 받았다.
그들은 황제 클라이드가 직접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제일 두려워했다. 협상은 아마 조만간 순조롭게 마무리될 듯했다.
하지만 정작 황제는 체르헨을 압박하는 부분에 관심이 없었다.
황궁으로 돌아왔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궁 밖에서 지냈다.
흐린 날이나 눈비가 오는 날에도 어김없이 외출했고, 며칠 일정으로 아주 멀리까지 다녀오는 경우도 흔했다.
하늘이 맑아지자 클라이드는 또 짐을 꾸렸다.
“폐하, 이러다가 몸 상하십니다.”
총시종장이 어쩔 줄 모르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말리고 싶어도 말릴 수 없다는 걸 익히 경험했기에 총시종장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간곡히 비는 일뿐이었다.
“날이 좋군. 이번에는 좀 오래 다녀오겠다.”
“폐하……. 제발.”
“목적지를 일러뒀으니 소식이 오면 곧장 내게 전하도록 해라.”
늘 하던 얘기를 반복한 클라이드는 소탈한 여행자처럼 훌쩍 말에 올랐다. 약간 명의 근위병만을 대동하고 황궁을 나서는 그의 태도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늘 지나는 길을 따라 긴 초록 뿔 지역의 항구에 들렀다. 하루도 빠짐없이 오는 곳이었다.
항구 뒤편의 언덕배기에 올라, 그사이 새로 정박한 배가 있는지 눈여겨봤다. 먼바다에도 눈길을 던졌다. 고기잡이배를 위한 항구가 아니라 대형 선박용 항구인 탓에 보통은 선착장만 부산하고 바다는 비어 있었다.
“오늘은 별거 없군.”
어제와 같은 수의 배들이 묶여 있는 풍경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예전에는 에디스를 애타게 기다리며 그가 일일이 선착장에 내려가 수소문하는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큰 바다 너머에서 연락이 오는 건 드문 데다가, 자신이 나서 봤자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걸 깨달았다.
마음만 앞섰던 시기를 지나 이젠 수도 주변의 항구마다 연락책을 보내 놓고 소식을 받게 되었다.
말머리를 돌려 인근의 산으로 향했다.
경사가 제법 가파른 산이라 중간부터는 말을 돌려보내고 올라갔다.
산등성이에 오르다가 중간에 발을 멈추고 지는 해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이따금 어깨가 들썩거릴 만큼 큰 한숨도 쉬었다.
그를 따르는 자들은 익숙한 태도로 곁에서 묵묵히 기다렸다. 탄식하는 사이사이 에디스의 이름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구태여 알은체하지 않았다.
탁 트인 정상에 다다를 즈음에는 어둠이 드리웠다.
야영지를 만들고 간단히 배를 채운 후, 홀연히 걸음을 옮겼다. 밤하늘과 별이 잘 보이는 곳을 여기저기 헤매고 다녔다.
클라이드는 싸우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 대치하는 중이었다.
일개 인간과는 비교도 안 되는 대우주와 별 무리에 맞서 혼자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악다구니를 쓰는 심정과 함께 밤의 산길을 걷자 새와 벌레 소리가 잦아들었다.
눈먼 점성술사가 알려 준 별의 상징을 증오의 눈길로 노려봤다.
엇갈리는 두 개의 별이더니, 하늘 꼭대기에 환한 빛의 별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실제로 저 별이 서지우의 땅은 아니고 운명을 읽는 창문에 불과하다고 듣기는 했다. 하지만 싸울 대상이 저것뿐이었다.
그는 늘 저 별들에 저주를 퍼붓곤 했다. 간곡히 두 손을 모아 기원하기에는 자신의 속에 붙은 불이 너무 뜨겁고 아팠다.
“에디스, 지금쯤 어디에 있니.”
부디 돌아가지 말았기를.
서지우의 세계가 아닌 이 땅에 그녀가 남아 있기를.
빌지 않고 싸우겠노라고 다짐했기에 공손히 두 손 모아 염원을 빌지는 않았다. 대신에 온 힘을 다해 바라고 희망했다. 비어 있는 밤하늘을 향해 주먹을 을러댔다. 미친놈처럼.
에디스를 끌어들이는 인력이 제게 있다면 이것이리라고 생각했다. 클라이드에게 있어서 목표를 이루는 방법은 복중에 뜻을 숨기고 홀로 갈고 닦는 것이었다. 우는소리를 하거나 타인에게 의지하는 법이 없었다. 평범한 황족 소년이었다가 황태자를 거쳐 이 자리에 오기까지 그런 방식밖에 몰랐다.
살아오는 동안 의지한 사람이 있기는 했다.
에디스.
“에디스…….”
거칠거칠하게 돌 긁는 소리가 목청을 지났다. 자신만 들을 수 있는 낮은 속삭임이었다.
주변에서는 클라이드를 정신 나갔다고 손가락질했다. 상사의 병이 깊어져 머리가 잘못됐다고 쑤군거리는 소리를 그도 자주 듣곤 했다. 전쟁 직후이고 한창 황권이 최고조에 오른 시기라, 누구도 그의 뜻을 거스를 수 없기에 이런 기행에 관한 소문이 황궁 담을 넘지 못할 뿐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대로 가다간 진짜 미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정신을 차려 보려고 애썼다. 에디스는 이 시각에도 그에게 돌아오는 중일지도 몰랐다.
큰 바다를 건너는 여정은 변수가 너무 많아서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에디스를 구출하라고 뒤따라 보낸 황군이 두 달 만에 도착했을지 넉 달 만에 도착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를 잠깐 만난 하룻밤 이후로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했다.
돌아오는 길은 바람과 해류의 영향으로 평균적으로 더 오래 걸린다고 했다. 에디스가 수완 좋게 이른 시기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해도 라그란드 본국으로 돌아오려면 아직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다.
물론 모든 기다림은 그녀가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전제 아래에 이루어졌다.
머나먼 별 너머로 떠나 버렸을지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지고 죽을 것 같아서, 클라이드는 이런 광인의 짓을 할 수밖에 없었다.
* * *
아드리안은 국제 정세가 안정되자마자 배에 올랐다.
신대륙에 직접 가 보는 건 처음이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가 보고 자신의 식민 영지도 살펴야겠다고 마음먹어 왔다. 그곳에 가는 건 분명히 가문과 상회의 입장에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진짜 속셈은 에디스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때마침 신대륙의 영지 관리라는 핑계가 있었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아드리안이 탄 배는 곧바로 레이먼드령으로 가지 않고 그레이브즈령을 경유했다. 흙과 지평선 땅의 끝자락에 위치한 항구에 배가 정박했다.
그는 활기가 넘치는 항구를 벗어나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로 향했다. 그다음에는 총독부까지 찾아가는 용기를 발휘했다. 아드리안은 이 땅의 주인인 페이튼과 전혀 친하지 않았지만 이곳에서는 친분이 깊은 척하려고 꾀를 냈다.
총독이 직접 나와 아드리안을 맞이했다. 제시카 말론이라는 이름의 중년 여성이었다.
“아드리안 레이먼드입니다. 이렇듯 불시에 들러 총독님께 폐를 끼친 건 아닌가 싶습니다.”
“레이먼드 백작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두 팔을 벌려 환영하는 총독의 태도가 예상 밖이었다. 제 얘기를 어디서 들었단 말인가. 공연한 인사말일 거라고 치부하며 아드리안은 예의를 차린 태도를 고수했다.
“저도 그레이브즈 공작님께 이곳에 관한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총독이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레이브즈 공작님이라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페이튼 그레이브즈 말입니다. 라그란드 본국에서 저와 자주 만난 사이라서요.”
아드리안은 가만히 눈치 보던 총독은 뭔가 알아챘다는 듯이 경쾌하게 손뼉을 쳤다. 만면에 웃음기를 감추지 않은 채 시원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케츠모리스 공작님께 백작님의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공작님……께서는 건강하십니까?”
총독이 먼저 얘기를 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아드리안은 잘됐다 싶어서 냉큼 화제를 에디스 쪽으로 돌렸다.
“건강하시지요. 이 땅을 들었다 놨다 할 만큼 활기차셨답니다.”
“……?”
“어디 보자. 날짜를 계산해 보니 경께서는 아무 소식도 듣지 못하고 항해하셨겠군요. 황제의 군대처럼 케츠모리스 공작님을 구출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신 건 아닙니까?”
“그, 그렇다기보다 에디스와는 사적으로 아는 사이라서요.”
총독이 허심탄회하게 웃었다.
“너무 저를 경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공작님을 가둬 놓은 간수가 아닙니다. 워낙 바쁜 공작님께서 저를 임시 총독으로 다시 임명해 이곳을 통치하고 있을 뿐입니다.”
“공작님이 총독을 임명했다고요?”
“예, 그러고 나서 곧바로 이곳을 떠나셨지요.”
아드리안의 푸른 눈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격렬히 흔들렸다.
“에디스가 떠났다니요?”
“아쉬우시겠지만 그렇습니다. 출항하신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길이 어긋난 것 같네요.”
그는 에디스가 노예의 저항 운동을 이끌고 흙과 지평선의 땅 주인을 바꾼 사건을 장황하게 설명 들으면서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총독은 에디스에게 피습당한 자신의 경험을 상당히 재미있게 각색해서 이야기했다. 피해자라기보다 신기한 사건을 겪었다는 듯 밝은 태도였다.
총독 역시 노예를 사들이고 죽이는 과정을 더는 반복하지 않는 걸 만족스러워했다. 소출은 예전보다 적을지언정 이곳이 사람 사는 곳답게 바뀌어 가고 있다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그래서 공작님은 황군과 함께 한창 대양을 건너는 중이십니다.”
마지막 결론이 아드리안을 기쁘지만 허탈하게 했다.
* * *
멀리 항구의 등대 불빛이 하얀 선을 그리며 아스라이 반짝였다.
긴 초록 뿔 항구의 밤바다를 헤치며 커다란 함선이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에디스는 풍요의 요정 호를 타고 돌아왔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레이브즈 상회에서 보유한 배는 무척 성능이 뛰어나고 선장도 유능했다. 덕분에 항해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모두가 잠든 시각.
선착장에는 입항 관리인조차 찾을 수 없었다.
오랜 항해에 지친 선원들이 서류 절차보다 먼저 하선하겠노라고 아우성쳤다. 선장은 그들의 성화에 못 이겨 배에서 내리기를 허락했다.
함선 측면에 계단이 연결되고 나서 제일 먼저 에디스가 지상에 발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