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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104)화 (104/129)

104화

“그럼 그 교지도 미리……?”

“물론입니다. 실은 병력과 함께 오려고 했는데 페이튼이 갑작스럽게 제 뒤통수를 쳐서 말입니다.”

총독에게 의심의 기색이 전혀 없었지만 에디스는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황제 폐하의 군대는 아마 지금쯤 남쪽 흰 바다 지역에 도착했을 겁니다.”

“폐하의 군대가 와 있다는 겁니까?”

“머지않은 시일 내에 말론 경도 황군을 만나게 될 겁니다. 같은 황실 영지니까 양쪽 지역을 통합해야겠지요.”

교지를 미리 받아 왔다고 거짓말해야 하는 탓에 이 문서에는 노예의 처우 개선에 대해 적을 수 없었다. 황실에서 신대륙 식민 영지의 한 군데만을 콕 집어 노예를 해방해 주겠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대신에 이제부터는 자신이 총독이라서 적극적으로 조치할 수 있었다.

에디스는 노예를 향해 돌아섰다.

이번에는 원주민어를 썼다. 힘이 다 빠져서 거친 숨을 색색거렸지만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이제부턴 내가 이 땅의 총독이다.”

괴상한 함성이 새벽하늘을 찔렀다. 승리한 전사의 외침과 같았다.

“너희를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주고 싶지만, 남쪽 대륙은 여전히 노예사냥이 이루어지고 있다. 고향에 가 봤자 다른 농장으로 다시 붙잡혀 가게 될 거다.”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 대해 다들 그럭저럭 수긍했다. 하지만 고향 땅이 그 지경이 되었다는 점에 울분을 토하는 자가 많았다.

“그래서 너희를 이곳에서 잘 살게 해 주고 싶다.”

에디스의 목소리가 점점 사그라들었다. 어쩔 수 없이 타와누카가 같은 말을 소리 높여 반복했다.

“첫째, 먹을 것을 잘 주겠다.”

노예들이 하루에 한 끼도 먹지 못한다고 들어서 제일 먼저 조건으로 내걸었다.

“둘째, 때리지 않겠다. 이 땅에서 노예 체벌이 사라지도록 하겠다.”

에디스의 가느다란 음성을 타와누카가 힘차게 외쳤다. 수천 명의 노예가 몰려 있는데 그녀의 목소리를 듣느라고 주변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셋째, 라그란드 제국 차원에서 단계적으로 노예 해방을 이루도록 건의하겠다.”

이 부분은 사유재산 문제라든가 여러 걸림돌이 있어서 함부로 장담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그녀의 시각에서 제일 까다로운 부분을 공표했는데도 불구하고 노예들의 반응이 그다지 선명하지 않았다. 신분 변화가 그들에게는 별로 와닿지 않는 듯했다.

그래도 에디스는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은 개선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넷째, 너희와 내가 함께 이뤄야 할 목표가 있다.”

숨을 한번 내쉬었다.

“이제 농장으로 돌아가 일을 해라. 그러면 나는 총독으로서 이 지역 유지들과 논의해 임금을 책정하겠다.”

원주민어로 할 말이 마땅치 않아 엉터리로 표현했다. 타와누카가 정리해서 전달하기에도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아주 간단하고 명쾌하게 줄였다.

“일하는 만큼 돈을 주겠다.”

고요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노예들의 눈빛을 보니 그녀의 말을 이해하기는 한 것 같았다. 하지만 꼼짝하지 않으며 수많은 안광을 에디스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진심을 담아 감정에 호소했다.

“이곳에서 노인이 될 때까지 살 수 있도록 서로 도우며 땅을 일궈라. 감독관의 채찍질이 없어도, 너희가 자력으로 농장의 밀과 사탕수수와 커피를 키우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이 얘기를 노예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걱정됐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앞서 설명했던 대로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도 좋지 않았다. 에디스 나름으로는 최선의 길을 생각한 거였다.

여기까지가 자신의 한계일까.

침묵하는 군중을 앞에 두고 그녀는 고개를 떨궜다.

“그럼 이만.”

비척거리며 자리를 뜨려고 할 때, 거대한 함성이 그녀를 중심으로 쏟아졌다. 전투에서 승리한 직후에 터진 함성과 비슷했다.

사람들이 앞줄에서부터 독특한 자세로 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에디스를 향한 최고의 예의였다. 신에게 하는 절이라고도 했다.

한동안 침묵했던 건 그녀의 얘기가 다 끝났는지 알지 못해서였던 듯했다.

다행이다.

그녀의 작은 중얼거림이 함성에 묻혔다.

너무 기운을 빼서 이젠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다. 에디스의 작은 몸뚱이가 기울고, 결국 호위에게 부축받아 도로 널빤지에 누워야 했다.

별관의 침실로 돌아가면서 그녀는 몽롱한 상태로 거듭 중얼거렸다.

다행이다, 정말.

못 해낼 줄 알았는데.

* * *

라그란드 제국군 제2군단장이자 신대륙 원정의 사령관 에스톤 남작은 한창 전투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사령관 에스톤이 탔던 배가 바람을 잘 타지 못하는 바람에 일정보다 조금 늦게 신대륙에 도착했다. 그래서 더욱 초조하고 급해졌다.

흰 바다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이곳의 총독에게 황제의 교지를 전했다. 총독은 성대한 의식을 치르듯이 공손히 황제의 명을 받들었고, 가능한 한 많은 군대를 긁어모았다.

출정 준비는 순조로웠으나 문제는 시간이었다. 납치되었다는 케츠모리스 공작을 구출해 하루빨리 본국으로 송환하라는 어명을 직접 받은 탓에 마음이 조급했다.

에스톤은 황제가 그만큼 엄중하고 강하게 명을 내리는 걸 본 적이 없었다. 황태자 시절부터 오래 모셔 왔지만 이번에는 정말 심각해 보였다. 반란자가 황제의 측근 시종을 끌고 갔으니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황실의 극비 사항도 노출될 수 있는 데다가, 소문에 의하면 폐하께서 마음에 두신 분이라고 했다.

그는 반역자의 식민 영지를 점령하고 무훈을 세울 욕심으로 피가 끓었다. 케츠모리스 공작을 무사히 본국으로 모셔 가면 큰 포상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계절이지만 날씨가 포근했다.

흙과 지평선 지역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보낸 첩자가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 현재는 군대를 영지 경계에 주둔시키고 대기 중이었다. 첩자에게 보고를 받는 즉시 진군할 계획이었다.

에스톤은 부푼 가슴을 안고 직접 순찰대와 함께 영지 경계까지 나갔다.

탁 트인 들판과 언덕 너머 울창한 숲이 내다보였다. 전체적으로 풍경이 아주 훌륭했다.

시야가 닿는 곳에 인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에스톤의 순찰대 십여 기만이 아름다운 들판을 달렸다.

그때 높은 언덕배기에 수상한 움직임이 보였다.

또 다른 기마대였다. 흙과 지평선 경계에서 만났으니 적이 분명했다.

에스톤의 순찰대보다 인원이 두 배는 되어 보였다. 그는 생사의 위기가 찾아왔다고 느꼈다.

“전원 공격 태세를 갖추고 적을 경계하라.”

마른침을 삼키며 전투를 위해 은폐할 지형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적이 더 빨랐다. 우측의 바위 덤불 지대로 말을 달려 이동할 때 적군이 훨씬 빨리 달려 접근해 왔다. 총의 사정거리에 이르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그 너머에 멈춘 후, 에스톤의 순찰대를 희롱하듯이 지켜봤다.

“각오를 단단히 해라. 죽음을 불사하고 싸워야 한다.”

거친 심장 박동과 함께 그가 외쳤다.

적 기마대에서 한 명이 따로 떨어져 나왔다. 흰색 손수건을 높이 든 모습을 보니 대화를 하자는 뜻이었다. 에스톤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전령을 맞이했다.

그런데 점점 가까워지는 전령의 옷차림이 낯익었다. 분명히 황실 근위대 복장이었다.

전령이 에스톤에게 깍듯이 경례했다.

“저는 라그란드 황실 근위대 소속의 총사 닉슨 콜입니다. 그쪽의 신분을 여쭙고 싶습니다.”

“나는 제국군 제2군단의 사령관 에스톤 파크일세.”

“사령관님이시면 이번에 오신 분입니까?”

“이번?”

그는 섣불리 상대에게 저희 군의 상태를 노출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통성명하는 것까지는 받아들이겠지만 그 이상의 정보는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닉슨이라는 자는 의심스럽게 노려보는 에스톤의 태도만으로도 대번에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맞나 보군요.”

“……?”

“폐하께서 보내셨지요? 무척 기다렸습니다.”

저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긍정으로 받아들이는 닉슨의 태도가 영 수상쩍었다. 처음 보는 사람을 과하게 반기는 것도 이상했다.

닉슨이 순박한 얼굴을 헤벌쭉 벌려 웃었다. 그러고는 품에서 신호용 피리를 꺼내어 불었다. 긴 호흡으로 두 번 내는 높은 소리는 라그란드 군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오케이 사인이었다.

멀리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적 기마대 전원이 흰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거리낌 없이 손수건을 나부끼면서 말을 달렸다.

순찰대는 총구를 내리지 못하면서도 적을 공격할 수 없었다. 평화의 표시를 역력히 드러낸 적 기마대를 예의주시할 뿐이었다.

적의 선두가 바뀌었다. 제일 뒤에서 달리던 말이 앞으로 나오자 기수의 남다른 외모가 눈에 확 띄었다.

아담한 체격에 길게 나풀거리는 백금발 머리칼. 하얗고 고운 얼굴. 미인형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에스톤의 표정이 차츰 경악으로 물들었다.

“초, 총을 내려라.”

총사 대회를 구경하지 못해 공작의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귀가 따갑게 얘기를 들어서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었다.

이웃 영지에 갇혀 있어야 할 공작이 대체 어떻게 여기에 나타난 걸까.

“케츠모리스 공작이시다. 다들 예를 갖춰라.”

나는 듯이 말을 달려온 에디스가 순찰대의 목전에서 멈췄다. 말의 앞발이 높이 올라가자 능숙하게 고삐를 당기며 균형을 잡았다. 말이 진정하느라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 때 그녀는 상큼한 시선으로 순찰대 전체를 둘러봤다.

에스톤을 향해 정중하지만 활달하게 머리를 숙였다.

“오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에디스 케츠모리스입니다.”

때마침 그녀의 손수건이 말 안장에서 미끄러졌다. 허둥지둥 다가간 에스톤은 하얀 손수건이 땅에 떨어져 먼지가 묻기 전에 낚아채는 데 성공했다.

“여기, 손수건을…….”

“고맙습니다.”

공손히 손수건을 돌려주면서 공작의 우아한 미소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폐하께서 사령관님을 보내셨지요?”

“예,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는 폐하의 측근 시종인걸요. 그분이 뜻하는 바를 많이 알고 있지요.”

그는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에디스가 하는 말이 왠지 맞다는 기분이 들었다. 폐하께서 가장 아끼는 시종이자 공작 작위를 지닌 분이니 당연히 그렇겠지. 사건의 전후와 상관없이, 당당하고 화사한 분위기로 그녀가 하는 얘기는 전부 일리 있게 들렸다.

“그런데 늦으셨군요.”

“예?”

“흙과 지평선 땅은 벌써 제가 총독을 맡고 있거든요.”

“총독이라니요. 그렇지 않아도 경께서 구금 상태라고 해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경을 구출하기 위해 진군하려던 중이었는데.”

“아쉽지만 진군하실 필요는 없겠네요. 시간 되신다면 저의 총독부로 초대해도 되겠습니까?”

“하지만 그곳은 적진이나 다름없는데.”

당장 오라는 듯이 그녀가 고개를 까딱였다.

“지난 몇 달간 제가 몸이 안 좋았던 데다가 여러모로 바빴지만, 이젠 대충 정리가 됐거든요. 농장 분위기도 많이 안정되어 가는 중이고, 노예에게 제공할 식량 문제도 대책을 세웠고.”

에스톤은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어서 눈만 끔뻑였다.

“총독부 사람들과 지역수비대도 온전히 제 휘하에 들어왔고. 지역 유지들도 변화를 받아들였지요. 이젠 홀가분하게 떠날 준비가 됐답니다.”

나머지 얘기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예상한 상황과 전혀 달라 황당하기만 했다. 공작이 해냈다는 이런저런 일을 건너뛰어 들으며 마지막 말만 앵무새처럼 따라했다.

“떠날 준비가 됐다고요?”

에디스가 서두르듯이 말의 발을 굴렀다.

“네, 본국으로 돌아가야지요. 폐하께서 계신 곳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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