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흐, 흐으, 2층.”
에디스는 쓰러진 채 헐떡거렸다.
“단층짜리 건물인데……. 아, 저기 다락방 쪽창에.”
부축하는 호위도 불꽃을 발견했다. 1층은 커다란 함성과 함께 난장판이 된 듯했고 다락방에서는 마구잡이로 사격이 계속되고 있었다.
“나를, 흑, 일으켜.”
에디스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총대로 지탱하며 일어났다.
“공작님, 제가 응사겠습니다.”
“아니, 내가.”
호위들도 사격에 능하기는 하지만 자신이 더 나았다. 옆구리를 부상당했다고 해도 정신은 맑았다. 제대로 쏠 자신이 있었다.
“그럼 빨리 쏠 수 있도록 저한테 총대를 걸어 주십시오.”
1초가 급한 순간이었다.
호위 한 명은 은폐물을 들고 방어했고, 다른 호위 한 명은 에디스에게 등을 돌리고 섰다. 그자의 어깨에 기다란 총대를 올렸다.
그녀는 호위의 어깨 너머로 건물 쪽창을 노려봤다.
사람의 실루엣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사살하려고 마음먹으면 충분히 죽일 수 있었다.
총을 쏴 대는 저놈은 에디스의 옆구리를 날려 버렸다. 내장 어디가 손상됐는지도 알 수 없어서 당장 자신의 명이 끊겨도 이상하지 않았다. 게다가 기절하게 고통스러웠다.
“젠장.”
욕을 된통 해 대며, 에디스는 하얀 칠이 발라진 창틀을 쐈다.
놈이 멈칫하면서 벽 뒤로 숨었다. 그녀는 곧바로 재장전하고 쉴 틈 없이 창 주변을 향해 사격했다.
‘적은 우리 동료를 죽였지만 우리는 적을 무조건 죽이지 않겠다.’
조금 전에 제 입으로 그딴 헛소리를 해댔더랬다. 적이 자신의 옆구리를 날려 버리기 전까지는 참 멋진 연설이라고 생각했다. 뻐기는 기분도 조금 있었다.
하지만 직접 당하고 나니 진짜 엿 같았다.
“으아, 이번 일만 끝나면 진짜 못되게 살 거야.”
버럭버럭 성질을 부리면서 사격을 계속했다. 에디스가 방아쇠를 당긴 순간부터 쪽창 안쪽에서는 한 발도 총알이 날아오지 못했다.
머지않아 실내에 또 다른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싸움이 벌어지는 듯하더니 금세 잠잠해졌다.
창밖으로 웬 옷이 펄럭거렸다. 타와누카의 옷이었다.
“타와누카가 잡았구나.”
다락방의 사격수를 마지막으로 에디스는 관리 건물을 온전히 점령하게 되었다.
급한 상황이 해소되자 몸에 힘이 풀렸다. 땅바닥에 풀썩 쓰러지려는 걸 호위가 받쳐 안았다. 닉슨이 부리나케 달려와서 피 흘리는 에디스 앞에 엎드렸다.
“공작님! 공작님, 정신 차리십시오.”
정신이 몽롱했다.
“하아, 흐. 다른 농장에도 사람들을 나눠서 보내. 내 뜻을 꼭 전하고 복수가 아닌 저항 운동을…….”
“공작님,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셨습니다. 일단 지혈부터 하고 당장 의사에게 보여야 합니다.”
“응, 지혈. 하지만 쉴 틈이 없어. 총독부까지 점거해야 우리의 거사가 성공할 수 있어.”
“제발 말씀을 그만 하세요. 피가 계속 납니다.”
“아아…….”
정신을 잃어 가는 에디스의 주변으로 노예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 * *
클라이드의 꿈을 꿨다.
단단히 혼나는 꿈이었다. 어쩌려고 이러는 거냐고 야단맞으면서 손을 들고 벌섰다.
딴생각하지 않고 클라이드에게 돌아갈 마음만 다잡고 있었어야 했는데, 자신은 왜 오지랖 넓게 나섰던 걸까. 도저히 못 본 체할 수 없는 상황이 왜 그리도 많았던 건지. 나서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할 때도 있었지만 결국 선두에 서고 말았다.
꿈속의 클라이드는 그녀가 너무 제 생각을 해 주지 않는다며 원망했다. 사랑하는 그를 위해서라면 몸을 사렸어야 했다고 불평했다.
그리운 그와 만나는 꿈에서 문득 생각했다.
인생을 회귀해 다시 풍요의 요정 호에 납치되는 날로 돌아간다면, 노예들이 익사하는 장면을 외면할 수 있을까?
아마 못 할 것 같다.
결국 저항 운동을 이끌게 되는 건 피할 수 없는 결과인가.
‘미안해요, 클라이드.’
‘보고 싶어.’
‘보고 싶어요.’
‘돌아와. 제발 어서 돌아와.’
그의 모습과 목소리를 꿈에서 되새겼다.
눈을 뜨니 달이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딱딱하고 평평한 것에 묶인 채였다.
“여긴?”
닉슨의 얼굴이 불쑥 시야를 가렸다.
“공작님, 깨어나셨군요. 다행입니다.”
“어떻게 된 거야?”
“꼼짝하지 말고 계셔야 합니다. 지혈은 어찌어찌 되었지만 여전히 위중하십니다. 지금 문짝에 눕혀 드리고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했습니다.”
“아, 이 딱딱한 게 문이구나.”
여전히 통증이 심했고 아까보다 더 아파진 느낌이었다.
에디스는 고개만 간신히 돌릴 수 있는 상태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총독부 앞이었다.
처음 농장에서 모였던 인원에 비해 몇 배는 늘어난 노예들이 주변을 메우고 있었다.
그들은 에둘러서 돌담을 뛰어넘기도 하고 정문에서 총독부 병사들과 대치하기도 했다. 병사들은 총을 가졌지만 수적으로 열세였다. 반면에 노예 진영은 무리해서 정면 돌파하기보다 은폐물을 내세우며 서서히 총독부 병사를 압박해 들어갔다. 에디스가 처음 농장에서 지휘했던 전투와 비슷한 양상이었다.
닉슨은 가까이에 있던 의사부터 불러 부상 상태를 확인했다. 큰 고비는 지났고 무엇보다 안정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에디스가 닉슨을 붙잡고 물었다.
“내가 실신했던 동안 어떻게 일이 진행됐어?”
“말씀대로 했습니다. 다른 농장까지 차례대로 점령했고, 최대한 노예 관리인을 살려 뒀다고 합니다. 도시와 가까운 곳은 거의 다 정리된 상황이고, 이제 총독부만 남았습니다.”
“관리인을 살려 두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대단하네.”
“저는 공작님을 돌보느라고 얘기를 전해 듣기만 했습니다. 얼마나 살려 뒀는지가 의심스럽기는 합니다.”
“다른 라그란드인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라든가.”
“그쪽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피해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양쪽 중 누구의 편을 들기보다는 최선의 결론을 얻고 싶은 마음이었다.
노예가 생존할 길이 생겼으면 좋겠고, 죄 없는 라그란드인이 다치지 말았으면 했다. 무력 충돌이 심해지면 나중에 제국군이 노예를 공격할 것이다. 최대한 원만하고 손실이 적게 마무리되어야 노예들도 무사할 수 있다.
총독부를 공격하는 상황을 지켜보니 거의 승기가 우리 편으로 기울고 있었다. 총알도 동이 난 듯 이제 총성이 뜸해졌다.
“닉슨, 지금 전투 지휘는 누가 맡았지? 타와누카가 여전히 힘을 내고 있나?”
“예, 타와누카가 애쓰는 중입니다.”
“혹시 내 말을 전할 수 있을까?”
“어떤?”
“총독부를 점거한 후에는 지역수비대 병사와 총독, 관리들을 모두 호숫가 잔디밭에 모아 달라고.”
호위 한 명이 에디스의 지시를 전하러 잠시 곁을 떠났다.
총독부는 워낙 면적이 넓어서 날이 밝을 무렵이 되어서야 사태가 진정이 됐다. 웅성거리는 인파의 소리를 듣고 그녀는 흐릿한 눈을 떴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닉슨의 얘기와 함께 에디스가 누운 판자가 높이 들렸다.
여러 명의 노예가 머리 위로 에디스를 들었다. 기묘한 노랫소리와 함께 발을 맞춰 총독부 정문을 넘고 큰길을 직진했다. 그녀의 주변으로 거대한 물결처럼 노예들이 함께 움직였다.
그녀는 날아다니는 양탄자를 타듯이 옅은 흔들림을 느낄 수 있었다. 낯선 노래를 타고 대기 위를 떠다니는 나무 양탄자였다.
기분이 묘했다.
나무 문짝에 누워 하늘을 보니 연노랑 햇빛이 푸른 새벽을 밀어내고 있었다.
호숫가 잔디밭에는 총독부 사람들 전원이 무장 해제한 상태로 바닥에 앉아 있었다.
앞자리의 말론 총독이 눈에 띄었다.
잠옷 차림에 낭패한 기색의 총독은 황망한 표정으로 에디스를 바라봤다.
“공작님…….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우선 에디스는 닉슨에게 부탁했다.
“날 일으켜 세워 줘.”
“공작님,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잠깐이면 돼. 일어나야 해.”
닉슨이 마지못해 나무문을 바닥에 내려놓고 묶어 놓은 줄을 풀었다.
에디스는 호위와 닉슨이 좌우에서 부축한 상태로 간신히 일어설 수 있었다.
바로 서서 주변을 둘러보니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노예가 호숫가를 메우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됐다. 도시 주변의 노예는 다 모인 듯했다.
양쪽 진영을 번갈아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승리감에 도취할 때가 아니었다. 에디스는 라그란드인을 적으로 둘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럴 목적으로 저항 운동을 일으킨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품을 뒤졌다.
미리 작성했던 문서가 피에 흠뻑 젖은 채 손에 잡혔다.
황제 클라이드의 교서였다.
“라그란드 제국의 황제 클라이드 매튜 피이스 마이스라이언. 흙과 지평선의 제국민에게 이른다.”
최대한 음성을 키우려고 노력했지만 힘이 달렸다. 그래도 위엄을 유지하기 위해 중간에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 땅의 주인이었던 그레이브즈 공작은 공적, 사적으로 영주로서의 자격이 없다.”
“우선 공적으로는 공작이 라그란드 제국에 반기를 들었다. 반란을 일으킨 죄는 죽음으로 물어야 할 것이다. 더불어 그레이브즈 가문의 작위를 삭탈하고 재산을 몰수하겠다.”
“사적으로는 공작이 자신의 부모를 죽인 죄가 의심된다. 있어서는 안 될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르고 은닉하려 한 정황을 흙과 지평선의 제국민은 면밀히 조사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전 공작인 페이튼 그레이브즈가 흙과 지평선의 총독으로 임명한 제시카 말론도 직위 해제한다.”
“새 총독으로는 황실 선임 시종인 에디스 케츠모리스 공작을 임명한다. 케츠모리스 총독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는 반란의 동조자로 받아들이겠다.”
에디스는 황제 클라이드의 인장이 찍힌 교지를 말론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목걸이로 늘 차고 다닌 인장이 당당히 찍혀 있었다. 새벽의 빛에 비춰 두 황금사자의 문양이 새겨진 인장을 확인한 말론은 사색이 된 얼굴을 덜덜 떨었다.
“말론 경. 황제 폐하의 뜻을 받들겠습니까?”
아니라고 하면 반역자가 되는 것이다. 당장 목을 베일 위기에서 말론은 무조건 고개를 주억거렸다.
“바, 받들겠습니다. 황제 폐하 만세.”
“혹시 말론 경이 혼동할까 봐 하는 말인데, 폐하께서는 지난가을에 황제의 자리에 오르셨습니다. 경이 알고 있는 선황 폐하의 성함과 달라 놀라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공작께서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출항 전에 미리 알고 있었지요. 당시에는 대관식이 치러지기 전이었지만……. 아시지 않습니까? 전 폐하의 측근 시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