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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102)화 (102/129)

102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노예 제도이지만, 사람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장면을 직접 지켜보기가 버거웠다. 바다 건너편에서 들려오던 이야기와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전혀 다르게 체감되었다.

에디스는 측은한 마음이 드는 한편으로 클라이드의 충고도 되새겼다. 노예를 폭동이 아닌 저항 운동으로 이끌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 이후의 수습 과정은 훨씬 더 어려울 테지.

닉슨과 근위병들도 함께 얘기를 나눴다. 별관을 지키는 총독부의 병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처치할지는 근위병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닉슨은 황실 근위병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머지 둘은 상당한 고참이었다.

운명의 주사위를 던진 후 그녀는 밤이 오기를 숨죽여 기다렸다.

가만히 있으면 꽃밭일 텐데, 제 발로 가시밭길로 접어드는 기분이었다.

* * *

총독을 비롯한 가족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친 에디스는 별관으로 돌아왔다. 시각은 9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처음 이곳에 와서 저녁 먹는 시간을 미뤘을 때는 낮에 도망갈 틈을 노리려 했다. 승마에 자신도 있어서 말을 훔쳐 타고 달리면 탈출에 성공하겠거니 여겼다. 그런데 알고 보니 지역방위대는 도망 노예를 추격하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단독 탈주는 상당히 위험했다.

결과적으로 졸지에 저녁 시간만 애매해지고 말았다.

식사를 일찌감치 해 버렸으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는 시각도 일렀을 텐데. 이렇게 될 줄 몰랐던 패착이다.

한참이 지나서야 별관에서 내다보이는 본관이 불이 꺼졌다. 별관도 고요해졌다. 에디스의 침실 바로 바깥에 경비가 서지는 않지만, 달아날 여지가 있는 길목마다 따박따박 경비병이 있었다. 1층 현관과 정원, 후문 등 곳곳에 2인 1조의 경비병이 돌아다녔다.

그녀를 호위하는 황실 근위병들은 낮에만 곁을 지켰다. 저녁에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 후에는 절대로 나오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불 꺼진 침실에 홀로 남은 에디스는 활동하기 편한 옷을 갖춰 입은 채 침대가에 조용히 앉아 기다렸다.

약속된 시간이 다 되었는데, 바깥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초조했다. 저도 모르게 다리를 달달 떨었다.

경비병이 한 명이라도 경보를 울리면 이번 거사는 끝이었다. 호루라기 소리가 들릴까 봐 조마조마하던 찰나 때마침 창밖에서 새가 울었다. 새 소리에 어찌나 놀랐는지 딸꾹질이 잠깐 났다.

와락, 침실 문이 열렸다. 노크도 인기척도 없이 갑자기 닉슨이 뛰쳐 들어왔다.

“나가시지요.”

주변을 감싼 어둠과 고요가 사라지지 않도록 신중히 움직였다.

발소리를 죽여 계단을 뛰어 내려갔더니 현관과 정원에 경비병이 여럿 쓰러진 게 보였다.

에디스의 충직한 근위병이 말을 끌어왔다. 도시 사방으로 펼쳐진 농장을 돌아다니며 저항 운동을 벌이려면 말이 필수였다.

각자 총과 검을 챙긴 후, 별관에서 총독부 정문까지는 말을 타지 않고 끌고 갔다. 이동하는 도중에 순찰 도는 경비를 또 만났는데 근위병이 몸을 날려 재빨리 처치했다.

총독 관저를 벗어나자마자 말에 올랐다.

말발굽 소리가 울리지 않도록 조용히, 그러나 서둘러서 속도를 올렸다.

먼저 목적지로 삼은 곳은 지난번에 들렀던 노예 숙소였다. 말을 탄 덕분에 금세 도시를 벗어나 탁 트인 농장에 접어들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짐승의 등허리와 같은 모습의 움막집이 나타났다.

숙소 측면으로 접근한 에디스의 일행은 몸을 숨기며 말에서 내렸다.

결전의 순간이 닥치자 그녀는 도리어 차분해졌다. 별이 박힌 하늘을 보고 잠시 클라이드를 떠올렸다.

저 멀리에 자리 잡은 관리인 건물을 감시하며 총구를 허공에 겨눴다.

타앙—.

밤하늘에 총성이 메아리쳤다.

한 발만으로 사람들이 곧장 움직일 수 있으려나? 낮에 중노동을 했으니 깨어나지 못할지도 몰랐다. 지난번에 자물쇠를 부수고 잠입했을 때도 촛불을 켜고 나서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에디스는 염려스러워 몇 발을 더 쐈다.

숙소 안에서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산하게 움직이는 인기척이 허술한 흙벽을 넘어 에디스의 귀에 꽂혔다.

머지않아 문짝을 부수며 노예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총소리에 맞춰 뛰쳐나오긴 했지만 먼저 뭘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며 공터를 두리번거렸다. 에디스가 다시 신호탄을 쏘자 그들의 이목이 한 곳으로 집중됐다.

“모두들……. 깨어났는가?”

에디스가 세 가지 원주민어를 반복했다.

“드디어 함께 싸울 때가 됐다. 우리의 살길을 찾을 시간이다.”

그때부터 사람들의 기세가 달라졌다.

피로에 찌들고 채찍질에 다쳐 웅크렸던 몸을 폈다. 마주 보며 기합을 모으고 소리를 질렀다. 관리 건물에서 잠든 관리인들이 외침을 들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어둠에서 벗어나 나아가야 할 순간이 왔다. 우리 편의 기운을 북돋아 주는 게 중요했다.

“관리 건물로 돌진한다. 하지만 무조건 적을 죽여서는 안 된다.”

에디스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사방에서 터졌다. 느낌만으로도 불평이나 욕 같았다.

노예들의 이런 태도는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래서 시작 전에 설득부터 필요했다.

“관리자들은 너희 동료를 잔인하게 죽였겠지만,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의 생존을 위해서다. 라그란드인을 함부로 죽였다가는 더 큰 후환이 따를 것이다. 우리가 몰살당한다는 말이다!”

후환이라는 표현은 원주민어로 대체할 만한 게 없어서 타와누카가 설명을 보충했다.

“우리는 살기 위해 저항하는 것이다.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다.”

여전히 노예들은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노예 관리인을 비롯한 라그란드인을 싹 다 죽여 봤자 그들의 앞날에 도움이 안 되리라는 사실만은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내 뜻을 따를 자가 있나? 그렇다면 함께 가자.”

한창 소란을 떨었던 탓에 그사이 저 멀리 관리 건물에 불이 밝혀졌다.

들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원래는 몰래 잠입해 관리인들을 제압하는 계획도 생각해 본 적이 있지만, 그것보다 노예들에게 저항 운동의 방법을 설명하는 게 더 중요했다. 조용히 제압당한 관리인은 죽임을 당할 게 뻔했다.

선두에는 타와누카가 섰다. 에디스도 노예의 무리 앞줄로 나왔다. 닉슨은 엄호 사격을 위해 뒤에서 따라왔다.

사람들이 농기구를 들고 돌진했다.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달리는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에디스가 열심히 달음박질해도 다른 이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무거운 총을 메고 있어서 더욱 차이가 났다. 제법 먼 길을 따라 관리 건물 앞에 도착할 때쯤에는 거의 꼴찌가 되어 있었다.

“멈춰! 잠깐 멈춰라.”

비명을 지르듯이 꽥 소리쳤다. 더 다가가면 사격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갈 위험이 있었다.

타와누카가 제자리에 서자 다른 노예들의 걸음도 느려졌다.

사람들은 극도의 흥분 상태였다. 당장 뛰쳐들어갈 듯 거칠게 씨근덕거렸고 무기를 든 자세에는 전사로서의 본능이 움텄다. 말을 듣지 않고 전진하려 하는 노예도 있었다.

하지만 에디스의 눈대중으로는 이 이상 다가가면 큰일 날 듯했다.

안간힘 써서 새된 소리를 질렀다.

“멈춰! 총에 맞는다고!”

탕, 타탕― 총성이 울렸다. 관리 건물에서 총을 쏜 것이다.

선두가 아슬아슬하게 사정거리 밖이었다.

노예들은 총에 맞은 자가 아무도 없는 걸 보고 태도가 확 달라졌다. 그녀의 지휘 덕분에 죽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더욱 에디스의 말에 귀 기울이며 순순하게 굴었다.

“장애물을 가져와. 판자나 짚단같이 몸을 막을 것 말이야.”

광분해서 무작정 뛰쳐 들어가려던 노예들은 크게 탄성을 지르며 지시를 따랐다. 누구나 떠올릴 만한 방법이지만 분위기에 휩쓸려 맨몸으로 덤볐던 탓이다.

각자 들어 옮길 수 있는 부피 중 가장 큰 짚단으로 몸을 가렸다. 에디스도 호위들과 한 조가 되어 앞으로는 은폐물을 들고 뒤로는 총을 조준했다.

“닉슨, 우리가 뛰쳐나가면 엄호 사격을 부탁해.”

“공작님도 여기에서 지원하십시오. 가까이 가면 위험합니다.”

“내가 벌인 일이야. 지원이 아니라 내가 할 몫이라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외치면서도 에디스 역시 뒤에 숨어 있고 싶었다. 자신은 절대 용감하지 않았다. 직접 앞장서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할 뿐이었다.

빠르게 준비가 끝났다. 달리느라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데다가 광란의 분위기에 묻혀 아드레날린이 뇌를 절이는 기분이었다.

에디스는 벌써 절반쯤 쉰 목소리로 외쳤다.

“단숨에 돌파한다. 지금! 달려!”

멋진 군대 사령관이라면 이보다 그럴듯한 명령을 내리겠지만 그녀는 군대 작전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클라이드에게 들은 조언만이 전부였다. 게다가 서투른 원주민어까지 써야 했다.

볼품없는 지휘에 맞춰 사람들이 일제히 튀어 나갔다.

에디스도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렸다.

턱이 덜덜 떨리고 당장이라도 넘어질 듯이 다리가 후들거렸다. 건물 창을 통해 빼꼼히 보이는 총구가 제 머리를 노리는 듯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가장 칙칙한 옷을 골라 입었지만 걸레 같은 옷을 걸친 노예에 비해서는 굉장히 눈에 띄었다.

앞으로 달려 나가면서도 뒤돌아 달아나고 싶었다. 매 순간 갈등하면서 뛰었다.

출입구 너머에서 시퍼런 불꽃이 튀었다. 귀를 찢는 총성과 함께 선두의 노예 한 명이 쓰러졌다.

에디스는 발이 얼어붙으려 했다.

허위허위 달리는 걸음 끝에 죽음이 기다리는 느낌이었다.

앞뒤로 총알이 날아다녔다. 닉슨이이 뒤에서 엄호하고 건물 안에서는 노예 관리자들이 마구 총을 쏴 발겼다.

그때 에디스의 옆구리에 얼얼한 감각이 일어났다.

“어엇!”

발이 삐끗하면서 쓰러지려는 걸 호위가 붙들었다.

“공작님! 옆구리가…….”

아픔은 조금 후에 밀려왔다. 축축한 피가 옆구리에 흐르는 감촉과 함께, 얼얼하게 이물감이 드는 부위에 갑자기 화끈한 열감이 치솟았다.

갑자기 미치도록 아팠다. 눈물도 나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몸을 가눌 수가 없어서 호위에게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시야도 흐릿해지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노예들이 픽픽 쓰러지고 있었다.

1층으로 진입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딘가에서 앞뜰을 향해 총을 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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