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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101)화 (101/129)

101화

에디스는 머뭇거리면서 그에게 손을 겹쳤다. 클라이드의 느낌이 났다.

잠시 눈을 감고, 형태나 목소리가 아니라 그의 존재감 자체를 곱씹어 봤다. 이불 깃을 쥐었던 그의 손이 에디스의 손끝을 가만히 쥐었다. 낯선 몸이라도 분명히 그가 맞았다.

이 남자는 클라이드다. 그렇게 자기암시를 걸자, 조곤조곤 건네오는 말투가 약간은 별 너머의 클라이드와 비슷하게 들렸다.

“점성술사를 자주 불러서 물어보고 있어. 변화한 게 있는지 말이야. 아직 에디스가 이 땅에, 라그란드에 머물러 있다고 하더라. 네가 아직 바다 건너에 있다는 얘기가 내 가장 큰 희망이야.”

지금은 점성술사가 달라진 상황을 알아챘으려나.

“그래서 매일 밤 별과 싸우고 있지. 전쟁 중이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바깥에 나가 하늘을 보곤 해.”

“나도 자주 하늘을 보지만 너무 막막하더라고요. 그냥 하늘이고 별이던데요.”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라. 뭐든 해야 하니까.”

“점성술사는 또 무슨 얘기를 하던가요?”

“내가 절망적인 얘기는 아예 꺼내지 말라고 선을 그어 놨어. 그 외에는, 어설픈 무당 굿이나 제사가 도리어 악재를 불러올 수 있다고 하더군. 어차피 난 전장에 있어서 그런 거 할 수도 없었지만.”

“그랬군요.”

“다른 초현상 연구자도 수소문해 봤어. 몇 사람을 만나 봐도 아무도 이 현상을 아는 자가 없더라.”

결국 가장 능력이 뛰어나다던 점성술사 말고는 힌트를 준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소설에 등장하기까지 했으니 아마 맞는 얘기를 해 줬겠지.

클라이드가 겹쳐 쥔 손을 움찔거렸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허락을 구하듯이 물었다.

“이런 몸이라서 거북하겠지만, 한 번만 더 안아 보면 안 될까?”

처음 대했을 때보다 그의 느낌이 한결 와닿았던 덕분에 에디스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불을 둘러싼 채 클라이드의 긴 팔에 감겼다. 신선한 보디클렌저 향과 섞인 생소한 체취는 되도록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언제 또 재회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다른 몸에 깃든 영혼이라도 만나는 게 어디랴 싶었다.

마음을 고쳐먹자 지그시 어깨를 누르는 감각이 클라이드로 느껴졌다. 굳센 두 팔로 그녀를 올가미처럼 감싸던 행동이 익숙하게 와닿았다.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던 그의 각오가 에디스에게 전염되는 기분이었다. 그녀도 포기가 되지 않았다. 이 온기가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곳은 잠깐 머무는 정류장이며 언젠가 다시 만날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렇게 믿겠다고 다짐했다.

안 될 것을 알아도 될 거라고 믿고 우겨야 했다. 그래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푹 수그린 고개 아래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슬픔이라고 칭하지 않기로 했다. 뜻밖의 장소에서 우연히 만났으니 반갑고 기쁜 거다.

“너무 좋네요.”

클라이드가 에디스의 이마 위 새까맣게 찰랑거리는 머리칼을 쓸어넘겨 줬다.

“응, 좋아.”

“나중에 또 만나도 이렇게 안아 줘요.”

포개어진 몸 위로 클라이드가 그녀의 정수리에 뺨을 꾹 눌렀다.

“안아 주는 것뿐이겠어? 내가 널 되찾는 날에는 전부 다 줄 거야.”

“뭘 줄 건데요?”

“우선은 나를 꼭 가져야 할 거야. 거절해도 더는 소용없어. 무조건 내 아내이자 황후로 앉혀 놓을 테니까.”

옅은 웃음이 에디스에게서 새어 나왔다.

“좀 무서운걸요. 다른 건요?”

“더 커진 제국을 줘야지. 대륙을 통일하면 어때?”

“그건 별로예요. 할 일이 많아지잖아요.”

장난스럽게 대거리했다. 그 역시 웃음을 흘리는 바람에 그녀의 머리칼이 입바람에 살랑 나부꼈다.

“알았어. 영토를 너무 넓히지는 않을게.”

“……지금 그 말 진심이었어요?”

“응.”

“정말? 전쟁 중이라던 게 대륙 전체로 확장되었나요?”

클라이드가 그녀의 고개를 받치고 젖은 눈가를 손끝으로 닦았다. 조금 진정되는 기미가 보이자 차분히 그동안 일어났던 일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재회의 감동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알아 둬야 할 점이 많았다.

에디스는 우선 페이튼을 비롯한 귀족파가 완전히 망해 버렸다는 사실을 귀담아들었다.

경제력과 군사력의 차이를 혼동한 결과였다. 전쟁을 시작할 때 그들은 클라이드보다 훨씬 자금이 넉넉했지만 그걸 군대로 만들지 못했다. 황실에 충성하며 수년간 복무해 온 군대와 전투력에서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 결과 황군은 단시일 내에 귀족파의 영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더불어 남의 곳간 털듯이 귀족파의 재산을 살뜰히 챙겼다. 전쟁 중 민간의 피해를 최소화하라는 엄명 또한 큰 도움이 되었다.

곧이어 반란자가 된 귀족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몰수하는 단계를 거쳤다. 공장과 창고, 선박, 농경지가 고스란히 황실의 재산으로 귀속됐다.

전쟁의 상황을 아는 이들은 반란군의 우두머리였던 놈들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조롱하기에 바빴다. 돈만 많으면 세상이 다 제 것인 줄 아는 놈들. 그렇게 술자리에서 잡담거리로 오르고 인형극에서 우스갯거리가 되는 신세로 전락했다.

“에디스, 체르헨 먹고 싶지 않아?”

“아니요! 그게 치즈케이크처럼 한입에 먹는 건가요?”

“밀고 올라가려면 지금이 기회야. 원한다면 너 줄게.”

“과욕은 좋지 않아요. 적당히 이득을 취하고 빠지는 편을 추천하고 싶네요.”

“알았어, 네 뜻이 정 그렇다면. 체르헨의 황제는 에디스 덕분에 살겠군.”

에디스가 머무는 흙과 지평선 지역의 사정도 클라이드에게 전했다.

이곳에서 만난 총독과 제국 출신의 인사들, 노예들에 대한 경험을 길게 풀어 놓자니 다소 감상적인 기분이 되었다.

대양을 항해하는 동안 노예를 살렸던 일을 회상했을 때는 클라이드도 중간에 실소하면서 한마디 했다. 에디스의 상황이 그 지경인데 사비를 털어서 식비와 치료비를 댈 생각이 나더냐고.

그녀도 좀 머쓱했다. 제 입으로 말하고 나니 스스로 앞가림도 못 한 느낌이 들었다. 클라이드가 격려와 걱정을 섞어 다독이자, 앞으로는 제 잇속부터 악착같이 챙기겠다고 큰소리쳤다.

물론 죽어 나가는 노예가 에디스의 눈앞에 펼쳐진다면 또 태도가 달라지겠지만.

제일 시급한 문제인 총독부 소속의 지역방위군에 대해서는 그에게 진지하게 조언을 구했다. 방위군의 군세가 그다지 견고하지 못한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처지가 워낙 보잘것없어서 반격의 기회를 노리기 어려운 현실을 토로했다.

“황군을 태운 배가 진작 출발했어. 너무 무리하지 말고 기다리면 그들이 에디스를 구해 낼 거야.”

“언제쯤 출발했어요?”

“에디스가 탄 배와는 한 달 남짓한 간격으로 출항했지. 당시에는 전쟁 초반이라서 인원을 넉넉히 태우지 못했어. 먼저 백여 명을 보냈고, 다시 한 달 뒤에 이백 명씩 태운 배 세 척을 보냈지.”

“나랑 한 달 반 간격이면 머지않아 도착하겠네요.”

“그러니까 안전하게 총독부 관저에 있어. 흰 바다 지역에서부터 진군하게 될 거야.”

흰 바다 지역은 그녀도 얼마 전에 자력으로 탈출이 가능할까 싶어서 지도로 길을 암기해 둔 곳이었다. 흙과 지평선에서 남쪽으로 며칠을 달리면 황실 소유의 영지인 흰 바다로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탔던 배의 선장은 우리가 바람을 굉장히 잘 타서 일찍 도착했다고 했어요. 황군의 함선이 평균 속도로 온다 치면 두 달은 차이가 날걸요.”

“두 달이라……. 흰 바다에서 전열을 정비해 흙과 지평선을 치려면 넉넉히 석 달쯤 걸리겠군.”

골똘히 생각에 잠긴 에디스에게 그가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에디스, 거기에서 급한 일이라도 있어?”

“급하다기보다…….”

“내가 직접 가지 않아서 그래? 이곳의 전쟁을 마무리 짓고 출발했다가 여차하면 길이 어긋날까 봐 움직이지 못하고 있어.”

“황제 폐하께서 제국을 놔두고 배를 타는 건 무리예요. 염려하는 대로 길이 어긋날 수도 있고요.”

“그러면 왜?”

에디스는 한창 작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을 클라이드에게 털어놨다. 전부 취소하고 총독부 별관에서 얌전히 구출을 기다리는 방법도 있지만, 기왕 저질러 놓은 걸 계속하면 어떨까 싶었다.

위험한 상황이고 에디스도 목숨을 걸어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얘기는 뺐다. 그러면 클라이드가 무조건 반대할 게 뻔했다. 노예의 처지가 지나치게 형편없어서 저항 운동을 벌이려 한다고만 설명했다.

“노예와 함께 이곳을 뒤엎는 계획을 클라이드가 보기엔 어때요?”

“에디스만 무사하다면 시도해 볼 만해. 하지만 절대, 반드시, 싸움터에 나서지 마.”

“조심할게요.”

“꼭 몸을 사리도록 해.”

“알았다니까요.”

“네 화려한 전적을 아니까 하는 말이잖아.”

속으로는 심하게 뜨끔했다. 비밀스러운 속마음을 들킨 기분이었다.

해맑은 웃음으로 때우는 에디스를 그가 미심쩍은 눈초리로 바라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황군이 공격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낫겠다. 에디스는 말만 조심한다고 하면서 물불 안 가리고 나설 수도 있어.”

온갖 걱정을 늘어놓는 그가 조금 귀여워 보였다. 진짜 클라이드의 몸이었다면 먼저 입맞춤했을지도 모른다.

“정말로요. 약속.”

거듭되는 당부와 함께 클라이드는 군대식의 전략 전술을 간단히 조언해 줬다.

우선 라그란드 제국민과는 사고방식이 전혀 다른 노예가 충동적으로 분노를 일으킬 때 어떻게 될는지 예상했다. 그리고 저항 운동이 아니라 아무나 공격하는 폭동으로 번질 위험성도 경고했다.

에디스는 단단히 충고를 들으면서 새삼 현실을 자각해야 했다. 나고 자란 환경이 워낙 딴판이라 돌발 행동이 일어날 우려가 있는 자들을 통솔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클라이드를 통해 다시 한번 각오를 다지게 됐다.

* * *

서지우의 세계에 오래 머물지는 않을 듯한 느낌이 들더니, 아니나 다를까 에디스는 하룻밤 만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클라이드도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사이에는 광대한 바다가 놓여 있어서 건너편의 소식을 들으려면 몇 개월이나 시간 차이가 생겼다.

타와누카에게 은밀한 지시를 내린 다음 날 다시 밀담을 나누게 됐다.

“주인님, 농장마다 흩어져 있는 풍요의 요정 호 출신 사람들을 만나 봤습니다. 다들 적극적으로 나오던데요. 기필코 함께하겠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정말? 결심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마침 심각한 얘기도 들었습니다. 며칠 전에 죽은 노예들이 처참한 상태로 들에 버려졌다고 합니다. 주인님이 갔던 숙소뿐만 아니라 여러 농장에서 자주 노예들이 체벌을 받고 시신이 버려진다고 하네요.”

황군이 자신을 구하러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저야 속 편하게 이곳의 제국 출신 사람들에게 여왕 노릇 하면서 몇 달을 놀면 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누군가는 생사의 기로에 놓일 테고 무력하게 죽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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