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사흘 뒤 한밤중. 총소리가 울리면 뛰쳐나오는 거야.”
“총은 어떻게 구하시게요?”
“으음, 빼앗아야지 뭐.”
여러 가지 난관 중에서 무기를 확보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그래도 해내야 하는 계획이었다.
“타와누카는 여러 농장에 내 뜻을 전하는 일에 집중해 줘. 네 역할이 아주 커.”
“명심하겠습니다.”
에디스의 진영에 조금이나마 유리한 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의사소통 능력이었다.
타와누카가 원주민 언어를 여러 가지 아는 덕분에 의사를 동반해 노예들과 만날 때 속닥거릴 수 있었다. 반면에 노예 관리인은 아예 대화를 단절하고 무력으로만 통제하곤 했다. 노예 중에서 영악한 자를 십장으로 정해 채찍을 쥐여 주긴 했지만, 그 십장들하고도 말을 트지는 않았다.
에디스는 관리인으로 10년을 일했다는 사람이 ‘노예들 말은 당최 뭐라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라며 손사래 치는 모습도 본 적이 있었다. 원주민어가 워낙 다양해서이기도 하지만 관리인들이 노예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 이유가 더 컸다.
다음으로 닉슨을 포함한 호위들과 계획을 공유했다.
호위의 역할은 거사 당일 밤에 무기를 탈취하는 것이었다. 에디스의 별관을 지키는 경비병이 어디에 몇 명 있는지 파악한 후, 그들을 습격해 총을 빼앗기로 했다. 요즘에 그녀를 감시하는 인력이 충원되어 한결 까다로워지기도 했다.
거사를 일으키려면 어차피 경비병부터 제압해야 했다. 유혈사태가 벌어질 게 확실한 데다가 지난번처럼 몰래 빠져나가려는 행동과는 완전히 달랐다.
단순히 일대일로 싸우면 우리 편이 유리했다. 세 명이 다 황실 근위병으로서 총검술에 능하고 체격도 좋았다.
문제는 인원수였다. 경비병이 지원을 요청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호루라기 소리를 듣고 총독부의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오면 끝장이었다.
모든 계획이 어그러짐이 없이 성공한 다음에는 명분이 필요하다. 페이튼을 끌어내리는 이유를 널리 알리고, 총독 대신 에디스가 권력을 잡아야 한다. 그때 사람들은 흙과 지평선 땅의 주인이 바뀐다는 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뜻대로 되지 않을 요소가 사방에 도사리고 있었다. 실패할 확률이 매우 높았다.
* * *
깔끔하게 각이 진 천장.
낯설지만 익숙한 환경이 그녀의 느리게 뜬 눈동자를 지나 각막에 맺혔다.
피부에 닿는 슬립의 감촉이 마치 안 입은 것처럼 부드러웠다. 다리를 감싼 이불은 보송보송했고 실내 온도도 최적이었다.
다리에 딱딱한 것이 닿았다. 길쭉하고 매끄러운 것이 종아리를 세로로 길게 훑고 지나갔다.
“앗.”
에디스는 흠칫 놀라 다리를 접었다.
그녀를 자극한 것은 남자의 다리였다. 우연한 접촉 이후로 상대방도 몸을 급하게 뒤로 물렸다.
남자가 상체를 절반쯤 들며 에디스에게 정면을 드러냈다. 유민준 팀장이다. 지금은 부장으로 승진했다던데 그녀의 기분에는 같이 일했던 당시의 팀장이 친숙했다.
졸음이 확 달아나서 동그래진 눈으로 민준을 탐색했다. 같이 잠들었다가 깬 듯 둘 다 옷차림이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민준이 이 상태로 제게 접근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지난번에 봤을 때 민준은 지우에게 굉장히 상냥하게 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간에 힘을 팍 줬다. 저조한 기분을 감추지 않으며 인상을 박박 썼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일어나 앉더니 거칠게 마른세수했다.
“서지우 씨?”
못마땅한 시선이 그녀의 오목조목한 턱에 머물렀다.
그는 에디스를 꼼꼼히 눈여겨보고 있었다. 다가오지 말라는 듯이 팔짱을 끼고 엄격한 자세를 고수했다.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절대로 같이 자고 일어난 연인 같지 않았다.
민준과 눈빛이 마주쳤다.
사람은 분명히 유민준인데 뭔가 달랐다. 새까만 눈동자 너머에 제가 아는 느낌이 풍겼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유민준 팀장은 그녀를 서지우 씨라고 부르지 않았다. 꿀 떨어지는 말투로 ‘지우야’ 했던 것 같다.
“클라이드?”
무슨 소리냐고 그가 되물으면 잠꼬대라고 둘러댈 셈이었다. 그런데 민준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둘 사이에 스파크가 튀는 것 같았다. 느낌이 강렬하게 와닿았다.
동시에 그가 거의 날아서 에디스를 덮쳤다. 날개처럼 두 팔을 펼치더니 그녀를 얼싸안아 뒹굴었다. 푹신한 침구를 구르며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하, 에디스.”
그가 원래 클라이드의 음색과 다른 소리로 탄성을 터뜨렸다.
“클라이드……. 맞군요.”
“응, 나야. 어떻게 이렇게 만나지?”
에디스도 눈물이 찔끔 날 만큼 반가웠다. 이게 얼마더라. 몇 개월이나 지나 계절이 바뀌어 있었다.
헤어지기 전의 마지막 순간은 황궁 집무실에서였다. 클라이드가 바로 항구로 따라가겠다고 했고, 저는 별생각 없이 손을 흔들며 등을 돌렸다. 이렇게 멀리 떨어지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심지어 다시 재회한 곳이 별을 건너 서지우의 세계라니.
유민준의 몸은 숨소리도 체격도 달랐다. 그에게 안기는 감촉이 뭐라 형용하기 힘들게 낯설었다. 이런 식으로 만난 건 너무 벅차고 기쁘지만 클라이드가 아닌 다른 남자와 얼싸안은 기분이라서 좀 찝찝했다.
지우의 육신도 어색했다. 서지우로 태어나 훨씬 긴 세월을 살아왔지만 최근 4년간은 다른 몸으로 지내 왔으니 기분이 새로웠다. 에디스보다 조금 더 늘씬한 다리가 남의 것 같았다.
“일단 팔부터 풀어 줄래요?”
불편한 티를 내자 클라이드는 마지못해 약간만 몸을 틀었다. 그래도 놔주지는 않았다.
“에디스. 널 다시 보겠다고 짬 날 때마다 얼마나 각오를 다졌는지 몰라. 정말 만나니까 너무…… 너무 좋다.”
“응, 나도 반가운데 잠시만.”
겨드랑이 아래로 쓰윽 빠져나가려는 그녀를 알아챈 그가 곧바로 허리를 당겨 안았다.
“왜 그래.”
전혀 다른 외모를 받아들이고 마음을 추스르려고 해도, 에디스에게 잠깐의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으니 당황스러웠다.
시야 가득히 새까만 눈동자에 얼굴선이 유려한 남자가 가득했다. 이 모습이 클라이드라고 곱씹어 보려 했다. 머리로 이해하지만 감각으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가 에디스를 끌어당겨 자신을 안게 했다. 손에 남자의 옆구리가 닿았다. 자갈밭처럼 울퉁불퉁한 갈비뼈 근육이 아니라 모델을 연상시키는 허리선이었다.
움츠러드는 에디스의 행동을 그가 간파했다.
“무슨 일 있어?”
가만히 그녀의 등줄기를 쓸어내리는 그의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외면해 버렸다. 낯설었다. 서지우에게는 남친일지 몰라도 에디스하고는 아무 사이 아니었다.
“클라이드가 이 속에 있다는 걸 알지만, 다른 얼굴을 보니까 기분이 묘해서요.”
굴곡이 다른 그의 가슴팍의 살짝 밀어냈다.
“내가 다른 얼굴이라서?”
“일단 나 건드리지 말아 볼래요? 눈 감고 얘기만 하면……. 아니지, 목소리도 다르니까 역시 몰입이 잘 안 되네요.”
“난 상관없는데. 여기에 있는 영혼이 에디스라는 게 느껴져서 괜찮아.”
“정말요? 나라는 거 느껴져요?”
“어떤 몸속에 있든 너이기만 하면 돼. 감각은 약간 달라도 에디스라면 다 좋아.”
클라이드는 아쉬운 듯 그녀의 어깨를 토닥인 후 물러났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잠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보고 싶었어.”
“나도요.”
“네 옆에 내가 없는 사이 별 너머로 사라져 버릴까 봐 얼마나 두려웠는지.”
그런 염려는 에디스도 많이 했다. 격하게 공감하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부둥켜안았을 때는 나오지 않던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흘렀다.
클라이드는 손끝만 살짝 대어 젖은 얼굴을 닦아 줬다.
“차라리 이 세계에서 너와 내가 아예 살았으면 좋겠다.”
“라그란드에서 우리는 너무 머니까요.”
“그리고 에디스만 있으면 어디든 상관없기도 해.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지만, 다 내려놓고 너만 보면서 살고 싶어.”
에디스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유민준에게서 서서히 클라이드의 느낌이 커지는 듯했다. 달라진 외모든 별을 건너뛴 장소든 상관없다는 얘기가 그녀의 가슴을 짜르르하게 울렸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하지만 이대로 머물기 어려우리라는 걸 우리는 깨닫고 있었다.
지난 시간, 운명이 멋대로 엉키고 삶이 뒤바뀌었다. 별들이 흐르면서 우리를 멋대로 저쪽 자리로, 그리고 다시 이쪽 자리로 옮겨다 놨다.
현실은 늘 가혹했기에 앞으로 느닷없이 꽃길이 나타날 기대는 할 수 없었다. 말도 제대로 붙여 보지 못한 채 제자리로 돌아가 버릴지도 몰랐다.
“클라이드.”
낯 가리다가 말고 그와 작별하게 된다면 너무 허무하잖아.
“눈물 그쳐 줘, 에디스.”
엉뚱하게 유민준의 몸과 교감을 나눌 수는 없지만, 시야가 번져 검은 눈의 남자 속에 든 클라이드를 깨닫지 못하는 건 속이 상했다. 벅벅 눈두덩이를 비비고 그를 올곧게 바라봤다.
무서운 생각이 더럭 들었다. 이 순간이 설마 우리의 마지막은 아니겠지?
아냐, 마지막일 수도 있다. 클라이드와 나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사이다. 변덕스러운 우주와 별이 우리의 비감한 만남에 화려한 대미를 장식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클라이드와 자신을 한자리에 모아놨다가 드라마틱하게 종지부를 찍으려는 걸까.
우리를 이 지경으로 만든 원흉이 사실은 무생물이며 자연현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잔인해서, 아무런 의지가 없다면 정말 이럴 리가 없어서 별에 인격이라도 부여해 원망하고 싶었다.
당장 각자의 세계로 돌아가 버린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가슴이 무너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아무런 힘이 없는데. 클라이드를 잡을 수 없는데.
입술을 꼭 깨물었다.
흐느낌과 함께 입을 연 순간, 뭉치고 억눌렸던 마음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사랑…… 흐윽, 사랑, 해요.”
사랑하는 게 너무 아프다. 힘들고 속이 너덜너덜해지는데, 지쳤으면서도 관둘 수 없는 감정이다.
그가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놨던 손을 세게 주먹 쥐었다. 손마디가 하얗게 되고 손목이 덜덜 떨릴 만큼 힘이 더해졌다. 그 느낌 안다. 부글부글 끓는 기분을 어찌할 수 없는 거다.
“사랑해, 에디스. 내 모든 걸 바쳐서…….”
클라이드는 손대지 말라는 그녀의 부탁에 차마 다가오지도 못했다. 턱을 단단히 굳히고 치아를 앙다물면서 격한 감정을 드러냈다.
벌겋게 눈자위가 충혈된 채 그가 그녀를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바라봤다. 그녀의 어깨가 좁혀들며 가늘게 흔들리자 이불을 끌어다가 따뜻하게 둘러 줬다. 온기가 더해지자 에디스는 자신이 떨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클라이드가 그녀의 가슴 앞으로 이불을 꼭꼭 겹쳤다. 마치 옷깃처럼 좌우를 당겼다.
“포기 못 해.”
각오를 다지듯이 그가 중얼거렸다.
“우리 헤어지는 거, 절대 안 돼. 그러니까 울 수도 없지.”
이불 깃을 잡은 그가 피눈물을 쏟다시피 절박한 표정으로 에디스를 응시했다.
검은 눈동자가 왠지 황금안으로 반짝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