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머리를 쥐어짜 냈다. 틀린 답이라도 내놓아야 남작 부인이 고쳐서 알려 줄 것이다.
“같은 가문 사람인가요? 돈 문제가 걸려서였다든가……?”
“어머, 전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맞혔구나.
“혹시.”
같은 가문 사람이면서 이곳에서 불량배를 동원할 힘이 있는 자.
성정이 이기적이고 잔인한 자.
핏줄을 죽일 만큼 성격이 모진 자.
떠오르는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
예전에 주워들은 풍문이 생각났다. 페이튼의 이중적인 성격에 관해서였다. 잘생긴 외양과 달리 이기심과 탐욕에 끝이 없어서 아버지인 선대 공작의 눈 밖에 났다고. 그래서 아버지는 후계를 페이튼이 아닌 조카에게 넘길 뜻을 밝힌 적이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후에 선대 공작 부부가 흙과 지평선으로 사업차 떠난 바람에 소문은 소문으로 끝나고 말았다.
빵을 쥐던 에디스의 손끝이 새하얗게 질렸다.
표정을 추스르기가 어려웠다.
“저도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아무 말 안 했고요.”
범인을 지정하지 않고 빙빙 말을 돌렸다. 그것만으로도 남작 부인을 비롯한 사람들이 에디스에게 공감의 눈초리를 보내 줬다. 정답을 찍었다는 뜻이었다.
페이튼.
햇살 같은 이미지에 썩은 늪과 같은 속내를 숨긴 남자.
에디스가 그와 만날 때는 늘 화사하고 멋있는 매너만 봤다. 앞으로의 만남을 기대한다는 얘기도 자주 들었다.
온갖 호의를 다 보여 주고선 저를 납치해 이곳까지 보냈다.
그런 놈이다. 능히 죄악을 저지를 개새끼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사건의 수사도 이루어지지 않았느니 이 범죄를 뒤늦게 들추기는 쉽지 않을 듯했다.
에디스는 간신히 오찬을 마치고 총독부의 거처로 돌아왔다. 이후로 당분간 외출을 자제하며 갖가지 구상을 했다.
자신에게 쓸 만한 것만 따지자면, 실제로 누가 죽였느냐의 진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이곳 사람들이 어떻게 믿느냐가 더 의미 있었다.
사람들은 선대 공작을 죽인 범인이 페이튼이라는 점에 묵시적으로 공감하고 있다. 여론을 몰아서 당시 사건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으려나? 페이튼을 범죄자로 걸고넘어져 영주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도 있을까?
사실 페이튼이 저지른 잘못은 무수히 많다. 결정적으로 내란죄가 있다. 내란죄는 무조건 사형이다.
그래도 남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쉬운 것으로는 존속살해죄가 최고로 자극적이다.
‘부모를 죽인 살인자로 수사를 벌이게 된다면 아주 볼만해지겠어.’
다들 쑥덕거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총독을 구슬려 사건을 수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흙과 지평선 지역을 발칵 뒤집어 놓을 욕심이 생겼다.
에디스는 이곳의 분위기를 바꿀 계획을 세우는 동시에 단독 탈출의 길도 꼼꼼히 찾아봤다. 혼자 달아날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 직접 확인했다.
며칠 후 짬을 내어 시내의 서점에도 들렀다. 인근 지역의 지도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총독이 달려 보낸 자들은 그녀가 오랫동안 책을 읽는 게 지루했던지 밖에 나가서 기다렸다. 사무적인 측면으로 도움이 많이 되는 타와누카가 에디스의 곁에 있었던 탓에 신분 차별을 중시하는 자들은 얼씬하지 않았다. 이곳이 라그란드 제국보다 신분에 더 엄격한 듯했다.
덕분에 에디스는 무사히 흙과 지평선 지역을 중심으로 한 상세 지도를 찾을 수 있었다. 주변의 다른 지역도 포함된 지도였다.
총독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서, 재빨리 구매한 후 품 안에 숨겼다.
거처로 돌아와 밤을 새워 지도를 눈에 담았다. 남쪽으로 황실 소유의 영지가 맞붙어 있다는 점이 희망적이었다. 단지 굉장히 거리가 멀어 단시간 내로 그곳까지 가기는 어려웠다.
아무리 승마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지도로 본 길만 더듬어 달리기는 무리였다. 클라이드의 영지까지 가기도 전에 추격당하기에 십상이었다. 무작정 달아나기보다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지도를 확인하고 단독 도주 계획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자, 미묘하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생사의 기로에 놓인 노예를 나 몰라라 하고 혼자만 달아날 수는 없다는 현실을 깨달으니, 속상하다기보다 다행스러웠다. 그들을 위해 선뜻 위험을 무릅쓸 용기는 없지만 상황이 이 지경이라서 부족한 용기를 끌어 올릴 형편이 되었다.
겁이 나면서 동시에 피가 끓었다.
자신은 그들과 여전히 비슷하게 억압당하는 입장이었다. 혼자만 느끼는 동질감이 반복되었다.
에디스는 최선을 다해 암기하고 익힌 후 지도를 불태웠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머릿속에 지도를 완벽히 새겼다.
* * *
라그란드 제국의 군대가 진군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 북상해서 귀족들의 소유였던 영지를 지나고 국경선까지 도달했다.
사령관 출신으로서 오랜 세월 원수를 향해 칼을 갈았던 클라이드와 군사적인 면에 문외한만 모인 귀족 연합은 너무나 힘의 차이가 컸다.
클라이드는 맹추위가 닥치기 전에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
귀족 연합군은 진작 궤멸했지만 적의 핵심 인물이 모조리 페릴랜드 섬으로 피신했다. 체르헨은 라그란드와 화친을 원하면서도 페릴랜드와의 동맹을 끊지 않았다.
시일을 끌 필요 없이, 클라이드가 이끄는 황군이 국경을 넘었다. 원래 두 나라의 경계로 삼았던 강을 건너는 데 성공하자 파죽지세로 밀어붙일 수 있었다. 이제 체르헨 국은 잘못된 판단으로 원군을 파병했다가 자기 영토까지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반란을 일으킨 주동자와의 관계를 끊고 라그란드 제국에 입힌 전쟁 피해를 보상하라. 일주일 내로 결정하지 않으면 체르헨 국 수도에 입성하겠다.」
황제 클라이드가 체르헨에 보낸 친서였다.
* * *
에디스는 흙과 지평선에서의 목표를 정했다.
지배자인 페이튼을 끌어내리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곳을 장악해야겠어. 클라이드에게 돌아가려면 그 수밖에 없어.’
어렵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총독이 거느린 지역방위대는 수가 적은 데다가 그리 군기가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병력의 상당수가 도망 노예를 잡으러 영지 멀리까지 돌아다니곤 했다.
싸워 이겨야 할 총독 진영은 분명히 강하지 않았다.
문제는 에디스에게 아무런 힘이 없다는 점이었다. 병력이라고는 닉슨, 타와누카, 호위 둘이었다. 무기는 총도 아닌 검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뿌려 둔 씨앗은 많았다. 싹을 틔우고 잎을 키워서 언젠가 수확을 할 만한 여지가 넉넉했다.
에디스가 이 땅을 차지하려는 건 반란이라고 볼 수 없었다. 반란이라는 말은 페이튼이 제국에 반기를 드는 행동에나 어울렸다. 그녀는 황태자 클라이드의 뜻을 받들었으니 황실이 귀족의 영지를 몰수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 계획을 점령전으로 일컫기로 했다.
페이튼의 영지를 뒤엎겠다고 결심이 서고 나자, 에디스는 할 수 있는 일을 차근차근 실행에 옮겼다.
우선 타와누카를 비롯한 호위들을 불러 은밀히 작전을 짰다.
“그동안 상류층 모임에도 참석하고 따로 생각도 많이 해 봤는데 말이야. 노예를 살릴 방법이 쉽지 않아도 있기는 있는 것 같아.”
“어떻게 하시려고요?”
“노예와 함께 저항 운동을 일으킬까 해.”
“저항 운동이 뭡니까?”
“더는 못 버티겠다고 단체로 저항하는 거야. 한꺼번에 들고일어나면 지역방위대나 노예 관리인도 이길 수 없을걸.”
“그거, 꽤 위험한 방법처럼 들립니다.”
“맞아. 아주 위험해. 사상자도 많이 생기겠지. 나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고.”
타와누카가 턱을 쓸면서 고민했다.
“노예 중에서는 어차피 죽을 거, 마지막으로 덤비고 나서 죽자는 사람들이 꽤 됩니다.”
“아니야. 죽지 않고 살아야지. 같이 살자고 벌이는 일인데.”
에디스도 노예에게서 저항의 의지를 자주 엿봤다. 끊임없이 맞고 농장 일에 혹사당하면서 아예 절망에 매몰되어 버렸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실제로 보니 내면에 밀림의 전사 본능을 남겨 둔 듯 싸울 마음이 있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이 저항 운동을 하겠다면 에디스가 길을 열어 줄 작정이었다.
“타와누카, 난 이제 노예 숙소에 갈 수 없어. 그들에게 얘기를 전하려면 어떻게 하지?”
“제가 의사분들을 모시고 매일 여기저기 농장을 돌아다니니까, 그 길에 얘기를 전하면 어떨까요?”
의사 진료도 총독이 못하게 막으려는 걸 겨우 우겨서 유지했다. 그나마도 며칠 말미만 받은 지경이었다.
“날짜가 얼마 없어.”
“예, 촉박하네요.”
“지난번에 갔던 숙소는 내 뜻을 따라 줄 확률이 높지만 다른 농장 숙소도 가능할까?”
자신에게 던지는 물음이었다. 난감해하며 대답하지 못하는 타와누카를 대신해 스스로 부족한 답을 내렸다.
“안 되더라도 해 보고 싶어.”
풍요의 요정 호 출신이 많은 농장은 그나마 에디스를 따라 저항 운동에 나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모르는 노예만 가득한 농장은 움직이게 하기 어려웠다.
낮에 농장으로 시찰 다닐 때면 에디스는 일하는 노예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 가까이 오지 말라는 관리인의 경고를 자주 들은 탓이었다.
쓸데없이 알짱거리는 공작님으로 비칠 자신은 노예들에게 고작해야 우아한 드레스와 모자, 양산쯤으로 인식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의기소침해하는 그녀에게 타와누카가 머쓱한 태도로 용기를 줬다.
“다른 농장도 주인님을 좋게 보고 있는 듯합니다.”
“그럴 리가 있나.”
“농장마다 서로 오가면서 해야 하는 작업이 있다고 하더군요. 풍요의 요정 호 사람들부터 시작해서 서로 얘기를 퍼뜨리는 모양입니다.”
“정말?”
“주인님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모두를 살릴 방법을 찾겠다고요. 그걸 기다리는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그때 감정이 격해진 상황에서 툭 튀어나왔던 말을 기억하다니.
에디스는 새삼스럽게 어깨가 무거워졌다. 그동안 자신과 노예가 함께 살 길을 궁리해 온 건 맞지만, 그들도 때가 오기를 기다린다는 얘기에 부쩍 책임감이 와닿았다.
“네 말대로 되도록 많은 노예가 저항 운동에 참여했으면 좋겠네.”
“저항 운동이 뭔지 몰라서 그렇지, 주인님께서 하자고 하면 아마 많이들 따르지 않을까요?”
“이건 극비리에 이루어져야 해. 알지?”
“물론입니다.”
“우선 노예에게 계획을 알려야 해. 네가 의사와 함께 그들의 숙소를 순회할 때 은밀히 얘기를 퍼뜨려 주면 좋겠어.”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의 목소리가 신중하게 낮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