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98)화 (98/129)

98화

어느새 그녀의 주위로 노예들이 여러 겹의 원형을 이루며 모여들었다.

에디스가 한심하게 무릎 꿇었다. 우세인은 그녀의 앞에 더 낮게 무릎을 내렸다.

“아니에요. 공작님은 정말 좋은 분이에요.”

“좋은 사람 아니야. 아무것도 못 한 채 이러고 있잖아.”

“저도 조만간 죽겠지만, 공작님만은 마지막까지 기억하고 싶어요. 라그란드 놈들 중에 유일하게 존경하는 분이에요.”

옆에서 타와누카가 중얼거렸다.

“여신님이지.”

“맞아요. 여신님이에요.”

에디스는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지만 주변의 반응은 달랐다. 풍요의 요정 호 출신 노예들이 특유의 인사법으로 넙죽 엎드려 절했다. 그녀가 누군지 몰라 호기심을 보이는 사람들한테 배에서의 일화를 전하는 이도 많았다.

그때 바깥에서 시끄러운 외침이 들렸다. 총소리와 말발굽 소리도 함께였다.

“누가 옵니다, 공작님.”

문을 지키고 있던 호위가 경고하자 에디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물을 닦고 몸을 일으켰다.

“들켰나 봐. 나 이제 가 봐야 해.”

“조심하셔야 해요, 여신님.”

“돌아가서 생각해 봐야겠어. 너희를 살릴 방법이 있는지 머리를 쥐어짜 볼게.”

점점 소란스러운 소리가 가까워졌다. 자물쇠가 부서진 문이 덜컹거리며 열렸다.

“여기다!”

농장 관리자들이었다.

“소란 떨 필요 없다. 볼 사람이 있어 잠깐 왔던 거니까, 이제 돌아가겠다.”

“공작님, 여기서 이러시면 저희가 곤란합니다.”

“총독에게는 내가 얘기하겠다.”

“저희도 총독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농장 관리자들은 아까만 해도 공손하게 굴더니, 밤에 무슨 명령을 받았는지 기고만장해서 에디스에게 눈을 부라렸다.

한 명이 우악스럽게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다른 관리자가 총부리로 등을 쿡쿡 찔러 떠밀었다.

노예들이 발끈해서 성난 모습을 드러냈다. 저들도 이곳으로 끌려오기 전에는 전사이고 사냥꾼이었던 탓에, 원거리 항해에서 살아남을 만큼 강인한 체력에 드센 기질을 가진 이가 대부분이었다.

“내 발로 가겠다.”

에디스는 당당한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총을 든 자가 기어코 무리해서 떠밀었다.

문을 넘는 순간 볼품없이 넘어지고 말았다.

“앗!”

“공작님!”

닉슨이 재빨리 달려와 부축했다.

관리인들은 에디스 일행을 끌고 가면서 난폭하게 문을 닫았다.

다시 어둠이 덮인 노예 숙소에서 형형히 빛나는 분노의 눈동자를 보지 못했다.

총독 관저로 돌아오니 말론 총독이 화가 잔뜩 나서 본관 한복판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었다.

에디스는 총독에게 미리 준비했던 변명을 늘어놨다. 멀리 도망가려 했던 것도 아니고 가까운 농장에 어떤 소년을 만나러 갔었노라고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러면 미리 말씀을 하시든지요.”

“농장 관리자들이 나를 노예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난 그 소년을 참 귀여워했거든요.”

“그 얘기 믿어도 됩니까?”

“사람을 보내 직접 확인해 보세요. 내가 준 사탕 상자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정말이죠?”

“왜 그리 나를 믿지 못하나요? 아, 그러고 보니 이참에 총독에게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부글부글 성질을 내는 총독에게 도리어 당차게 요구했다.

“우세인이라는 소년을 내 심부름꾼으로 썼으면 합니다.”

“네? 하, 내 참.”

총독은 기가 막혀서 하늘을 향해 콧숨을 내뿜었다.

“이 상황에서 심부름꾼이나 들먹이는 건 저를 얕본다는 뜻이지요?”

“얕보다니요. 난 진심입니다. 어렵사리 내 손으로 살려서 데려온 노예들이 잘살았으면 좋겠어요. 우세인을 포함해서 말이지요.”

성질을 참지 못한 총독이 버럭 소리 질렀다.

“그렇게는 못 해 드리겠습니다. 공작님이 총애하는 노예는 제가 꼭 눈여겨볼 겁니다.”

에디스는 혀를 차며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안도하고 있었다. 총독이 눈여겨보겠다고 했으니 이번에 만났던 노예들이 관리인에게 함부로 보복당하지는 않을 듯했다.

용건을 모두 마친 에디스는 여전히 분노한 총독을 뒤로하고 별관으로 고분고분 돌아갔다.

* * *

한밤에 농장에서 벌어졌던 소란은 외부로 퍼져 나가지 않았다. 총독과 농장 관리자 선에서 조용히 마무리된 듯했다.

하지만 에디스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활동 영역을 농장뿐만 아니라 시내까지 넓혔다. 이건 입항 첫날에 총독이 허가한 부분이었다.

그녀는 거의 매일 본국 출신의 상류층 인사를 만났다. 식민지를 통틀어 귀족은 남작만 두어 명 있을 뿐이라 다들 공작인 그녀를 공손히 모시기에 바빴다.

지위와 행동거지, 복장, 뒤따르는 호위들. 이런 외적인 요소가 에디스의 가치를 높여 줬다.

에디스는 사업상의 용무가 있어서 신대륙까지 온 거로 알려져 있었다. 강제로 끌려온 사정을 아는 총독의 입장에서도 그녀를 험하게 인질로 대우하기보다는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편이 감시 관리에 편한 탓이었다.

덕분에 그녀도 볏 세운 수탉처럼 최선을 다해 으스대며 다녔다.

아직 상류층 인사들과 친분을 깊이 쌓지는 않았지만 잘만 하면 총독보다 그녀에게 충성할 사람도 생길 듯했다. 이해타산적으로 봐도, 그들은 나중에 본국으로 돌아갈 때를 대비해 총독보다 에디스에게 비벼 두는 편이 훨씬 나을 테니까 말이다.

어느 날 에디스는 본국 출신의 남작 부인으로부터 오찬 모임에 초대받았다.

이곳의 상황을 되도록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선뜻 초대에 응했다.

넓은 응접실에서 열린 점심 식사 테이블에 제법 많은 사람이 둘러앉았다. 전부 다 라그란드 사람이었다.

그들은 식민지에서 산 세월이 얼마가 되었든 자신이 신대륙 사람이 아니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라그란드 제국민만의 사회를 만들면서 똘똘 뭉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본국의 소식을 듣기를 강렬히 원했고 유행에도 민감했다.

그 속에서 에디스는 꽃이나 마찬가지였다. 암묵적으로 여왕 대접을 받았다.

황궁 시종 서열로만 따져도 한 손안에 드는 지위에 있다가 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좌우에 누가 앉느냐로 한바탕 시비가 붙을 정도였다.

본국에 대한 열망은 영지의 주인에 대한 담화로 이어졌다.

“그레이브즈 공작님께선 요즘 어찌 지내시는지 궁금하네요.”

남작 부인이 부채를 흔들며 에디스에게 운을 띄웠다. 부인은 본국 수도의 흔한 부채를 턱없이 비싼 값에 사들여서 굉장한 물건인 양 흔들어 대고 있었다.

“잘 지내시지요. 늘 바쁘시고요.”

에디스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납치범과 인질의 관계가 되어 이젠 원수지간이라는 사실은 절대 비밀이었다.

남작 부인은 말을 아끼는 그녀를 보며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이곳에 관심 좀 많이 주시면 좋을 텐데요. 영주로서 여러 가지 배려도 해 주실 법한데…….”

먼 나라의 가십도 좋지만 현실적으로 이들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도 중요한 듯싶었다.

“어떤 점에서 먼저 배려가 필요할까요?”

“어머, 케츠모리스 공작님께서 그분께 말씀 좀 넣어 주실 수 있나요?”

이곳 사람들의 희망 사항을 편지에 적어 페이튼에게 보낼 일은 절대로 없을 거다. 하지만 에디스는 차를 홀짝이며 잔잔히 미소 지었다.

남작 부인은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반색하면서 부채를 흔들어 댔다.

“솔직히 새 공작님은 영지에 관심이 약간 적으신 것 같아요. 딱히 불만이라기보다, 그저 그분의 사업적인 번창을 위해 우려하는 마음이랍니다.”

“새 공작님이라……. 여기선 페이튼을 그렇게 부르는군요.”

에디스가 그를 간단히 이름으로 칭하자 호기심 어린 시선이 점점 늘어났다. 페이튼과 에디스가 친하다고 여기는 듯했다.

덕분에 남작 부인도 말투가 차츰 느슨해지고 조심성이 줄어들었다.

“새 공작님이 작위를 이어받은 게 바로 올해잖아요. 이곳에선 지난달에 들어온 배로 소식을 전해 들었지요.”

“그렇게 따지니 별로 안 됐네요. 제 체감으로는 한참 된 것 같은데.”

“선대 공작님은 흙과 지평선에 큰 꿈을 갖고 계셨어요. 바다 건너 직접 오시기까지 한걸요. 그에 비하면 새 공작님은…… 으음, 가업을 물려받은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조만간 이곳에 관심을 주시겠죠.”

“선대 공작이 신대륙 개척에 열성적이었다는 얘기는 예전에도 들었어요. 내외분이 같이 오셨다면서요. 그러다가 실종되셨다던데.”

“맞아요.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지요. 말이 나왔으니 하는 얘기인데, 이곳의 치안도 좀 신경 썼으면 좋겠어요.”

“선대 공작 내외가 사라진 게 치안 문제 때문인가 보지요?”

“항구에 특히 부랑자가 많고요, 이 도시도 만만치 않게 험해요. 저희가 살기엔 위험한 환경이지요.”

에디스는 쓸만한 정보를 건지겠다는 느낌이 팍 왔다. 빵을 조금씩 떼어 먹으며 남작 부인에게 계속 말을 붙였다.

“알겠어요. 꼭 적어서 보낼게요. 그런데 공작 내외가 어떻게 실종됐는지 물어도 될까요?”

“그분들은…… 크게 습격받은 듯하더라고요.”

“습격이요?”

“예, 늘 여러 명의 호위를 데리고 다니셨는데 사고가 난 그날에는 부랑배들이 굉장히 소란스러웠다고 해요. 항구 전체에 걸쳐서요.”

“항구에서 실종되셨군요. 조직 폭력배나 그런 부류들일까요?”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어요. 애초에 여긴 범인을 잡은 경찰이 따로 없어요.”

“총독부에 군인이 제법 있던데요.”

“총독 소속으로 지역수비대가 있기는 한데, 사실상 도망 노예를 잡는 일을 주로 해요.”

에디스는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곳은 경찰도 없고 군대도 유명무실한 곳이었다. 오로지 사설 호위를 통해 각자의 안전을 지켜야 했다.

그 와중에 지역수비대는 노예를 잡아들이는 데 특화한 듯했다.

멋모르고 달아나면 얼마 못 가 잡힐 가능성이 매우 컸다.

“선대 공작 얘기는 너무 안타깝네요. 여기서 그리 허무하게 돌아가셨다니.”

남작 부인은 부채 안으로 잠시 뜻 모를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에디스에게 고개를 기울이고 속닥거렸다.

“사실은 암살이라는 소문이 돌았어요.”

“암살이요? 대체 누가 그런 짓을.”

“글쎄요. 여기는 그레이브즈 가문의 땅이고, 바닷길로만 사람이 들어오니까 적이 갑자기 나타날 리는 없죠.”

“누구인지 감도 안 잡히네요.”

둘이 목소리를 낮췄어도 주변에서 다 듣는 상황이었다. 테이블 옆과 건너편에 앉은 사람들이 알은척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범인을 대충 짐작하는 눈치였다.

에디스 혼자만 모르고, 이곳에서 쭉 살아온 사람들은 아는 듯했다.

“혹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