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에디스는 이후로 며칠 동안 주변을 탐색했다.
주목적은 식민지에서의 탈출이었다. 솔직히 가망이 적지만 방구석에서 넋 놓고 세월을 죽이기보다는 바깥으로 나가는 게 나았다.
그녀는 가까운 농장도 돌아다니고, 배에서 내린 의사들도 만났다. 의사는 다음 배로 본대륙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저들과 함께 에디스도 돌아갈 방법이 있는지 고심해 봤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의사들과는 계약 기간이 아직 남아 있었다. 진료할 때 까탈을 부리기는 하지만, 아예 노예를 인간 취급도 하지 않는 의사가 흔한 환경에서 그나마 생각이 트인 사람들이었다.
에디스는 농장에 시찰 나갈 때마다 의사를 동행했다.
농장 상태는 열악했고, 관리인이 노예를 가혹하게 다루는 게 뻔히 보였다. 죽기 직전의 사람이 너무 많은 데다가 모든 노예의 몸에 채찍질 자국이 가득했다.
풍요의 요정 호에서 노예 환자를 세심히 돌보던 분위기와는 딴판이었다.
그래도 에디스가 지켜볼 때 매질하지는 않았다. 그녀에게는 농장에 어떤 권한도 없었지만 ‘채찍 좀 치워 주게.’라고 싫은 티를 내면 관리자들이 알아서 조심했다. 화려한 드레스 차림의 귀족이 황실 제복을 입은 근위병과 함께 있다는 점이 시각적으로 큰 도움이 됐다.
거의 대부분의 노예는 접근하기조차 까다로웠다. 그중에 살릴 수 있는 자 한둘을 추려 의사에게 보여 줄 뿐이었다.
전반적인 환경이 도저히 그녀가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처참한 지경이었다.
그래서 몇 명에게 도움을 줘 봤자 결국 자기만족에 불과한 걸까 하는 자괴감이 생기기도 했다.
사흘째 되던 날 어느 농장에 들렀다가 풍요의 요정 호에서 내린 노예들을 만났다. 먼바다를 건넌 것치고 건강 상태가 좋다며 관리자들이 만족스러워하는 소리를 들었다. 에디스는 직접 노예를 만나지는 못하고 타와누카를 보내 잘 지내는지 확인했다.
나중에 듣는 귀가 없을 때 타와누카와 은밀히 얘기했다.
“농장 환경은 어떻대?”
“죄송하지만 공작님. 여긴 최악인 것 같습니다. 제가 살았던 지역보다 훨씬 심합니다.”
“그래?”
타와누카의 출신지는 페이튼의 식민 영지 중 다른 곳이었다.
“노예 대부분이 1년도 못 버티고 죽는 것 같습니다. 오래 일했다는 사람을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저 사람들을 몇 개월이나 살려서 데려왔는데, 그런 거 다 소용없이 금세 혹사당해 죽을 운명이라는 거네.”
에디스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세상을 통째로 뒤바꾸지는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은 이 세계에서 이방인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낫게 도와줄 수 있지 않나. 보통 사람의 평균 수명까지 맞지 않고 멀쩡히 살게 하는 길은 없나.
자신부터 탈출할 궁리를 먼저 해야 하는데 죽어 나가는 노예들이 자꾸 눈에 밟혔다.
심각하게 고심하다가 에디스가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내가 그들을 만나 볼 길은 없을까?”
타와누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굉장한 위험을 감수하셔야 합니다. 들키기도 쉬워요.”
“들킬 때를 대비해서 핑곗거리가 있어. 내가 사탕을 줬던 소년 있지? 우세인 말이야. 걔가 걱정돼서 찾으러 갔다고 둘러댈까 해. 사탕 통을 갖고 있을 테니까 증거도 될 테고, 어린애니까 정이 들었다는 말에 설득력이 있겠지.”
“그래도 총독의 감시가 심해질 겁니다.”
“그 정도 불이익은 받아들여야지 뭐.”
“몰래 총독 관저를 빠져나갈 수 있다면, 이참에 차라리 멀리 달아날 방법은 어떻습니까?”
“그것도 생각 중이지만 꽤 꼼꼼하게 계획을 세워야 해. 말도 훔쳐야 하고, 영지를 벗어날 만큼 오랫동안 도망가야 하지. 길도 모르는 상황에서 추격자를 따돌리기는 쉽지 않을걸.”
“그런 거였군요. 과연 공작님의 생각은 제 둔한 머리와 비교도 할 수 없네요.”
“아냐, 나도 헤매고 있어.”
인질 신세에서 벗어날 방법부터 찾아야 할 판에 노예들이 신경 쓰여 한밤의 외출을 하겠다고 덤비고 있으니, 아둔하기는 타와누카보다 자신이 더한 듯했다.
한숨지으면서도 그날 밤 에디스는 경비병이 순찰하는 시간을 피해 은밀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시트를 길게 이어 창밖으로 타고 내려갔다.
닉슨, 타와누카를 비롯한 호위들이 나가는 길을 앞장섰다.
사실 무사히 다녀올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다. 에디스의 침실 옆방에 시녀들이 머물면서 자주 들여다보곤 했다. 그래도 밤 외출이 들키지 않기를 마음으로 간절히 빌며 관저 밖으로 달렸다.
매번 마차로만 다녔던 길을 따라 두 다리로 뛰었다.
총독 관저를 벗어나니 인적이 뚝 끊겼다. 황량하다시피 하게 넓은 도시에 에디스 일행 말고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달린 끝에 겨우 농장에 도착했다. 선사시대 움막을 방불케 할 만큼 허름한 숙소가 노예들의 잠자리였다. 그곳도 인적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에디스는 농장 관리자들이 노예 숙소 주변에 직접 보초를 서지는 않는다는 걸 미리 들어 알고 있었다.
라그란드 본국 출신의 관리자는 소수였고 노예는 압도적인 다수였다. 달아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할 수가 없는 구조였다. 따라서 관리자는 멀지 않은 그들의 숙소에 살며 노예의 움막 외부에 잠금장치를 달았다.
또한, 농장 관리자는 노예를 공포로 다스렸다.
탈출했다가 잡혀 온 자는 굉장히 잔인한 방법으로 고초를 당하다가 죽었다. 인간의 몸에 가해질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서서히 목숨을 잃었다. 그 장면을 다른 노예도 봐야 했다.
두려움에 떨며 탈출 시도를 하지 못하는 노예들이 흙벽의 움막에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공작님, 자물쇠가 달려 있네요. 어쩔까요?”
닉슨이 소곤소곤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문을 열면 방울이 울리게 연결해 뒀구나. 부술 수 있겠어?”
“저기 보이는 건물이 관리자 숙소지요? 들킬지도 모르지만 시도는 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부탁해.”
우선 방울 달린 줄을 문짝에서 떼어 냈다. 그다음에 닉슨이 옷을 벗어 자물쇠 주변을 칭칭 감쌌다. 커다란 돌덩어리로 자물쇠를 내리치자 걸고리가 기다란 못과 함께 부서졌다.
와그작, 소리가 고요한 하늘에 울렸다.
관리자 숙소에서 인기척이 들리는지 귀를 기울였다. 잠시 숨을 멈추고 기다리는 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아무도 못 들었나 봐. 다행이다.”
호위가 앞장서고 에디스가 두 번째로 숙소로 들어섰다.
숨이 턱 막힐 듯 답답한 공기 탓에 잠시 멈칫했다.
새까만 실내는 창문조차 없었다. 허술한 천장 틈으로 들어오는 약간의 공기만으로 겨우 질식사를 면하는 곳이었다.
수많은 노예가 맨바닥에 줄줄이 누워 잠들어 있었다. 한밤의 방문객에 놀란 자들이 꿈틀꿈틀 몸을 일으켰다. 이 숙소에 풍요의 요정 호 노예가 상당수 머물고 있음을 알고 온 탓에 에디스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원주민의 언어로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모두 조용히 있어. 나는 ‘공작님’이다.”
배에서는 모두가 그녀를 공작님으로 불렀다. 거기에 에디스라는 이름을 부를 만큼 지위 있는 사람은 없었다. 선원이 다들 공작님, 공작님, 하고 부르며 자주 아부했던 탓에 노예들도 이 호칭에 익숙했다.
실내에 부스럭거리던 소리가 뚝 그쳤다.
에디스는 다른 원주민어로도 속삭였다.
“모두 조용히 있어. 나는 ‘공작님’이다.”
항해하는 동안 세 가지의 언어를 배워 뒀다. 한 번 더 다른 언어로 같은 얘기를 했다.
“모두 조용히 있어. 나는 ‘공작님’이다.”
오오오…….
감동하는 목소리가 저 멀리에서 들렸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깨달아서 감탄한 것인지, 원주민어를 구사해서 놀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에디스는 문을 닫게 한 후 품에서 초를 꺼내어 불을 밝혔다.
어둠이 걷히자 그녀의 앞에 처참한 광경이 펼쳐졌다.
군대의 침상처럼 멀쩡한 곳에서 나란히 누워 자는 게 아니었다. 거적때기조차 깔리지 않은 흙바닥이었다. 비가 오면 지붕에서 빗물이 새는지 군데군데 습기까지 찼다. 채찍질과 중노동에 시달리며 다친 몸은 습한 바닥에서 곪아 가고 있었다.
흙과 지평선에 도착한 노예가 거의 다 1년 이내에 죽는다던 얘기가 이해되는 장면이었다.
“세상에 이게 다 뭐야.”
라그란드어로 혼잣말했다. 노예들은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촛불에 비친 그녀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진 채 눈물까지 맺히는 걸 볼 수 있었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낯익은 소년이 다가왔다.
“공작님.”
그 아이였다.
“아, 우세인.”
“여기 웬일이세요?”
“너희들이 걱정되어서 말이야.”
솔직히 에디스도 대책 없이 움직인 거였다. 밤 나들이를 한다고 해도 이들을 도울 방법은 없었다.
우세인에게 큰 상처가 보였다. 얼굴 반쪽에 피떡이 지고 눈두덩이도 퉁퉁 부었다.
“다쳤구나. 무슨 일 있었어?”
어두운 표정의 우세인이 울분을 토했다.
“이유 없이 맞았어요.”
“뭐?”
“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늘 카칸 아저씨하고 두와난 아저씨가 죽었어요.”
“대체 왜……. 어제만 해도 건강했잖아.”
“놈들이 먹을 것을 안 줘서 받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농땡이 피운다고 트집을 잡더라고요. 먹을 걸 달라고 했더니 그때부터 때리기 시작했어요. 결국은 본보기로 삼겠다면서 매달아 죽였어요.”
에디스는 욕이 터져 나오려는 입을 틀어막았다. 짤막한 한마디가 작은 손을 넘었다.
“나쁜 새끼들.”
마음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왜 이런 상황이 연거푸 닥치는지 불편하기도 했다. 처절한 노예의 상황을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이걸 모른 척한다면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자신은 인류애 따위 없는데. 클라이드에게 돌아가고만 싶은 마음만 가득한데.
“나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꽉 막힌 말투를 내뱉었다.
“나는 힘이 없어. 너희를 도울 능력이 되지 못하는걸.”
비겁한 변명을 둘러댈 때, 그녀의 눈꼬리에 맺혔던 눈물이 끝내 뺨에 선을 그었다.
맞닥뜨려야 하는 현실이 버거웠다. 모른 척하고 싶은 이기심이 자신의 마음을 괴롭혔다. 이기심이 못돼 먹었다는 걸 너무 잘 알아서 자괴감도 더해졌다. 그러고 나서도 자신이 무력해서 또 괴로웠다.
“못난 공작님이라서…… 미안해.”
결국 마음속 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길이 없다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사과해야 했다. 자신도 인질로 매인 처지라는 걸 절감해야 했다.
“내가 힘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노예를 살릴 지위와 권력이 있었다면 뭔가 조치했을까? 분명히 했을 것이다. 주저앉아 좌절하지만은 않았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