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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96)화 (96/129)

96화

< 11장. 누구에게나 생은 소중하다 >

“겨울이 생각보다 안 춥네.”

출발할 당시에 겨울용 드레스를 살 수 없어서 난감했는데, 다행히 날씨가 푹해서 봄·가을용 복장에 망토만 잘 두르면 되었다.

에디스는 항구에 발을 내디디며 품위 있는 고위 귀족의 모습을 뽐냈다. 그녀를 주목하는 이가 많으니 한 치의 흐트러짐도 보일 수 없었다. 선착장을 벗어나 항구 번화가를 지나는 동안 그녀의 호위들이 물샐틈없이 주변을 살폈다.

신대륙의 그레이브즈 영지는 흙과 지평선이라는 이름대로 평야가 탁 트여 있었다. 농장이라는 소소한 표현만으로는 부족할 만큼 드넓은 면적에, 항구도 갖추고 몇 개의 도시도 있다고 들었다.

다만 치안이 굉장히 불안했다. 풍요의 요정 호에 있던 거친 뱃사람들까지 에디스에게 조심하라며 신신당부할 정도였다.

에디스는 한참이나 마차를 타고 달려 인근의 가장 큰 도시로 향했다.

나지막한 건물이 넉넉한 간격으로 자리 잡은 도시 분위기가 빽빽하고 혼잡한 라그란드 수도와 사뭇 달랐다.

선장의 안내를 받아 간 곳은 총독의 관저였다. 이곳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이 사는 곳일 텐데, 안타깝지만 에디스의 본가만큼도 못 되는 환경이었다.

응접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선장이 먼저 총독을 만나는 듯했다. 꽤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선장과 함께 육중한 체격의 중년 여성이 나타났다.

“먼 길 오시느라고 고생하셨습니다. 저는 총독인 제시카 말론입니다.”

에디스는 일부러 권위를 내세워 자기소개했다.

“긴 초록 뿔의 에디스 케츠모리스, 페들턴 공작 4세입니다. 실례지만 총독을 어떤 호칭으로 불러야 좋을지요?”

상대가 작위를 언급하지 않아서였다. 총독이 귀족이 아니라면 조금 더 분위기를 압도할 수 있을 듯했다. 이 세계는 뿌리 깊은 신분제가 사회라서 아무리 에디스가 인질이라도 신분을 무시하지 못했다.

“죄, 죄송합니다. 공작님을 몰라뵈었습니다. 저는 그냥 말론 총독으로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태도가 당장 달라졌다. 다행이었다.

옷차림에 신경 쓴 덕도 있었다. 총독은 에디스의 최신 레이스 장식에 관심을 보였다. 인사한 직후에 분명히 레이스와 옷자락을 유심히 살펴봤다.

선장이 총독과 친분이 깊지 못한 탓에 에디스가 미리 전해 받은 정보는 여성 총독이라는 것뿐이었다. 어떤 사람인지는 이제부터 신중히 접근하면서 알아봐야 했다.

“관저가 아주 드넓고 훌륭하더군요.”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구경하길 원하신다면 제가 꼭 안내해 드리고 싶습니다.”

호오, 이것 봐라. 친해지고 싶다는 뜻이네. 다른 사람이 아닌 총독이 직접 에디스에게 관저를 안내하겠다는 의미는 긍정적인 신호였다.

“기꺼이 받아들일게요.”

“앗, 그럼 지금 혹시 시간이 되십니까? 이 저택에는 호수도 있습니다. 경치가 아주 훌륭하지요.”

“집에 호수요? 그거 굉장하네요. 보고 싶어요.”

세 사람은 그길로 산책에 나섰다. 그냥저냥 꾸며진 응접실보다 바깥이 훨씬 나았다.

총독이 자랑했던 대로 호수가 꽤 멋있었다. 라그란드의 수도는 좁은 면적을 활용해 집을 지어야 해서 이렇게 탁 트인 정원을 볼 수 없었다. 황궁에만 유일하게 호수가 조성되어 있을 뿐이었다.

사소한 환담 중, 에디스는 총독의 비위를 맞춰 줄 만한 말을 곁들였다.

“황궁 호수를 본떠 만든 것인가 보군요.”

“공작님께선 황궁 호수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자주 들렀지요. 국정을 돌보다가 머리를 식힐 때면 호수 풍광을 보곤 했답니다.”

총독에게 서서히 존경의 눈빛이 생기기 시작했다. 관저 중 제일 자랑하고 싶어 하는 호수를 에디스가 극찬해 준 것도 기분이 좋은 듯했다. 실제로는 품격 면에서 볼 때 황궁과 이곳은 하늘과 땅 차이였지만, 어차피 일개 총독이 황궁 호수를 실제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화창한 햇살 아래 산책하는 분위기가 꽤 화기애애했다.

에디스는 뒤따르는 선장을 이따금 돌아봤다. 선장은 풍경에는 관심이 없고, 총독이나 에디스에게 뭐 하나라도 건질 게 있나 눈치 보는 중이었다.

저런 태도는 그녀에게 매우 유리했다.

납치 사건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따라서 총독 입장에서는 우리 일행의 방문을 예상하지 못했을 테고, 사정 얘기도 아까 선장에게서 처음 들었을 것이다.

선장은 총독에게 에디스를 좋게 소개했을 가능성이 컸다. 항해하는 내내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선장을 구워삶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페이튼이 서신을 써서 보냈을지도 모른다. 만약 서신이 존재한다면, 적어도 에디스를 과격하게 대우하라는 표현은 적혀 있지 않을 듯했다. 총독이 느긋하게 드레스에 관심을 주고 관저 구경도 시켜 주는 거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온건히 억류하라는 지시가 담겨 있지 않을까?

에디스는 먼저 나서지 않고 총독이 본론을 꺼낼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호수 구경을 실컷 하고 돌아오는 길에 총독은 이 지역의 소개와 함께 은근슬쩍 에디스의 얘기를 섞었다.

“관저를 중심으로 사방이 모조리 농장입니다. 마차로 며칠을 가도 전부 흙과 지평선 영역이지요.”

“굉장히 넓군요.”

“공작님께서 둘러보고 싶으시다면 언제든 나가 보셔도 됩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관사에서 나가 돌아다녀도 된다는 뜻이었다.

다시 말해, 에디스가 지낼 곳은 이 관사이며 외부 출입을 딱히 제지하지는 않겠다는 의미였다. 사방이 전부 페이튼의 땅이니 탈출할 생각은 말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농장의 모습도 궁금해지는군요. 하지만 바쁜 총독을 어떻게 매번 부를 수 있나요.”

“공작님을 모실 사람도 넉넉히 드리겠습니다. 이곳은 딴 건 몰라도 인력만큼은 풍부하거든요.”

외부 출입을 할 때 감시자를 많이 붙이겠다는 속뜻이 담긴 얘기를 듣는 동안에도 에디스는 고상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감사해요. 고맙게 받을게요.”

“그리고 되도록 넉넉한 만찬을 준비하겠습니다. 제 요리사의 솜씨가 공작님의 입맛에 맞으면 좋겠습니다.”

“어머, 기대되네요.”

“저녁 식사는 되도록 저와 함께하시지요.”

이건 좀 민감한 문제였다. 매일 저녁을 총독과 먹어야 한다면 식사 시간 전까지 귀가해야 하겠지.

넓은 영지 외부로 나가지 못하게 감시하려는 뜻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사실상 강제적인 조건을 총독이 돌려 말한 것이니, 그녀에게는 거절이라는 선택지가 없었다.

에디스는 별다른 생각이 없는 척하며 선선히 되물었다.

“그렇게 하지요. 식사 시간은 황궁에서와 같겠지요?”

“네? 여기는 5시부터 식탁에 앉습니다.”

“5시면 내가 황태자 전하를 모시느라 한창 바쁠 때였는데요. 배가 안 고플 것 같아요.”

“그럼 황궁에서는 언제 저녁을 먹습니까?”

“전하께서는 7시부터 시작해서 디저트와 음주를 늦게까지 즐기세요. 궁마다 만찬 시각이 다르지만요.”

총독은 잠시 당황한 기색을 띠었다. 황실의 법도가 그렇다니 고민하는 듯했다.

“그럼 7시에 맞춰 준비하겠습니다.”

새빨간 거짓말이었지만 절대로 들키지 않을 것이다.

평소에 클라이드는 에디스와 저녁을 함께했다. 늦은 오후부터 별실로 올라와 각자 개인 업무를 정리했고, 저녁 식사는 방에 들여서 마주 보고 먹었다. 식사 시각이 6시라는 걸 아는 자는 황태자 궁의 측근뿐이었다.

어렵사리 두 시간을 확보한 에디스는 안도하는 심정을 깊이 감췄다.

선장이 돌아갈 때는 따로 몇 가지 당부를 했다. 우선 배에서 내린 노예들을 무사히 농장으로 보내 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데리고 온 의사들도 잘 챙겨 달라고 부탁했다.

선장은 에디스의 말을 아주 잘 따랐다. 교역품을 팔게 되면 둘이 수익을 나눠야 하니, 머지않아 그가 다시 방문하기로 했다.

에디스의 거처는 별관이었다. 아담한 건물 한 채를 통째로 쓰게 되어 있었다.

그녀를 모시는 사람들은 시녀와 하녀, 노예로 나뉘어 있었는데 다른 계층과 사이좋게 지내지 않는 분위기였다. 라그란드에서부터 함께 온 수하들이 서로 친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고도의 심리전을 펼쳤던 식민지에서의 첫날을 마치자 에디스는 진이 쭉 빠졌다. 그래도 대접은 꽤 괜찮았다.

이곳에서 총독의 행동을 보며 페이튼의 의도를 여러 가지로 추측해 봤다.

두 가문 간의 정략결혼이 목적일까? 그렇다면 강제로 서명한 혼인서약서만으로는 효과를 볼 수 없다. 강력히 의심한 클라이드의 반대에 부딪힐 테니, 영지를 허투루 빼앗지는 못할 것이다.

멀리 떨어뜨려 두고 저를 천천히 설득해 식을 올리려는 의도일까? 그래 봤자 자신이 납치범 페이튼에게 마음이 넘어갈 가능성은 없지만, 페이튼의 자신감은 다를 수도 있다.

지금쯤 클라이드가 저를 많이 찾고 있을 테니, 심리적인 허점을 노린 귀족파가 국정 운영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도 있겠다.

‘클라이드가 제일 걱정이야.’

라그란드에 반란이 일어난 줄 모르는 에디스는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한 이유에 대해 정답을 내리지 못했다.

에디스가 식민지에 발을 디딜 때쯤, 라그란드는 전쟁이 한창이었다.

전략적 요충지인 긴 초록 뿔 영지는 중립 상태였다. 가주인 에디스가 사라진 탓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급하게 본가로 돌아오긴 했지만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페이튼은 에디스를 납치한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군사적인 힘으로는 황군이 압도적이었지만, 수도 바로 앞의 지역이 중립인 탓에 귀족 연합군이 체르헨 원군과 함께 저항을 계속했다.

* * *

에디스는 연약한 레이디처럼 마차만 타고 다녔다.

수준급의 승마 실력과 최고의 사격 실력은 철저히 감췄다. 저녁 식사 시간에 총독이 총솜씨를 물었을 때도 미리 준비했던 대로 이야기를 꾸며 둘러댔다.

“공작님, 이번에 입항한 배에서 들려온 얘기가 있습니다. 공작님께서 제국의 총사 대회에 준우승을 하셨다면서요?”

“총독도 얘기 들었나 보군요.”

“보기와는 다르게 총을 잘 쏘시나 보지요?”

“그건 황실의 체면을 차리기 위해서였어요. 전하께서 시종인 제게 대회에 나가라고 명을 내리셨거든요. 그냥 총을 들고만 있었는데, 높은 순위를 주시더라고요.”

“아, 그렇게 된 거였군요.”

에디스가 화약 냄새가 지독해서 힘들었다고 너스레를 떨어 대자 총독은 그다지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어차피 인질인 에디스의 손에 무기가 쥐어질 일은 없을뿐더러, 총을 조금 다룰 줄 안다고 해도 고작 호위 몇 명의 비호만을 받으며 탈출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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