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길게 말해 뭐 하겠어. 마음이나 심란해지지.”
타와누카가 간단히 통역하는 동안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으로 은근슬쩍 다가와 귀를 기울이던 노예들이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더 이상 묻지 못했다.
시간이 다 되어 노예들이 창고로 돌아가려고 일어섰다. 밧줄에 일렬로 발목이 묶인 그들이 에디스에게 특이한 자세를 취했다.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들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무슨 의미지?”
“인사하는 겁니다.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하는 가장 공손한 인사법이지요.”
“그렇구나. 고맙다고 전해.”
에디스는 살짝 고개만 숙여 줬다.
극존대하는 저들의 태도를 별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약을 줘서 고마워 저러는 거겠지. 그저 오늘처럼 얘기를 나눌 일이 또 생기면 잘해 줘야겠다는 마음만 가졌다.
“타와누카, 나도 원주민어를 배울 수 있을까?”
“예, 최대한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저도 아주 자세히는 모릅니다.”
“배우기 까다로워?”
“까다롭다기보다 언어가 워낙 다양해서요. 셀 수도 없이 종류가 많거든요. 저는 널리 쓰이는 몇 가지만, 그것도 기본적인 표현만 할 줄 압니다.”
“선원들 중에는 원주민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나?”
“제가 다 물어보고 다녔는데 노예와 얘기가 되는 사람은 저뿐이었습니다.”
“그럼 타와누카, 잘 부탁해.”
하루 일과를 마친 후 에디스는 고요한 밤바다를 완상했다.
문득 제 신세가 노예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던 땅에서 사냥당하듯이 잡혀 온 저들이나 자루에 담겨 납치된 자신이나 오십 보 백 보였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도 비슷했다.
노예들은 일생 중노동에 시달리다가 죽을 운명이다.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자신은 그보다야 낫겠지만 페이튼의 결정에 따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운명은 마찬가지다.
새삼스럽게 동질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친밀한 동료애가 아니라 같은 상황이라는 동질감이었다. 이건 분명히 달랐다.
대단한 박애주의자는 되지 못하는 에디스는 자신부터 살 궁리가 먼저였다. 노예를 돌보고 살리겠다는 자비로운 마음은 조금이었다. 자신의 안위가 더 많이 걱정됐다.
까만 바다와 밝은 별의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할 수만 있다면 다 때려치우고 클라이드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 * *
황제의 군대가 전열을 정비했다.
전장에 직접 모습을 드러낸 황제 클라이드는 나란히 선 군인들만큼이나 비장했다.
체르헨의 군대가 국경을 넘기 전, 먼저 쓸어버려야 할 적이 있었다. 귀족의 사병 수가 적지 않아서 여러 가문의 인원을 한꺼번에 모으니 황군에 맞설 수준이 되었다.
그래도 수적으로 황군이 많이 유리했다. 훈련 수준이나 사기도 압도적이었다.
“피해를 최소화한다.”
라그란드의 비옥한 땅에서 벌이는 첫 전투에서 황제 클라이드가 내린 엄명이었다.
전략도 민간인과 시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방향으로 짰다. 곡식이 무르익은 들판을 태우는 귀족 연합군과는 달랐다.
클라이드는 에디스가 소설로 읽은 ‘피의 숙청’ 대목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제는 그것이 작가가 임의로 만든 설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엇갈리는 별을 엿보며 상상력을 발휘해서 써낸 소설이다.
하지만 실제로 벌어질 수도 있는 미래였다. 그에게 중심을 잡아 주는 에디스가 없었더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복수에 혈안이 되었을 것이다. 전투에서 민간인의 피해보다 적을 섬멸하는 데 치중했겠지.
그는 새삼스럽게 각오를 다졌다. 놈들을 죽여 버리기보다는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자는 목표가 먼저였다.
귀족 연합군을 정리하는 데 고작 하루가 걸렸다.
황군의 일방적인 공세 속에서 일관된 지휘 체계도 없는 연합군은 쉽사리 무너졌다. 연합군의 우두머리와 귀족들은 어디로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체르헨 제국의 원군을 기다리는 듯했다.
그 와중에 적들은 독립을 선언했다. 엉뚱한 어린애를 황제로 추대해 페릴랜드라는 나라를 만들었다.
깃발만 세우면 나라가 되는 줄 아는지, 클라이드의 눈에는 한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통치자의 어려움을 그들은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놈들이 하는 꼴을 보니 돈 많은 집안 여럿이 뭉치면 저절로 나라가 만들어질 거라고 여겼다.
심지어 임시 수도를 육지에서 좀 떨어진 섬으로 정했다. 페이튼의 영지 중에서 면적이 제법 되고 해상전의 방어가 수월한 섬이었다. 그런 외진 곳을 본진으로 삼고 꼬리를 말 거면 대체 뭐하러 전쟁까지 일으켰는지 모르겠다.
클라이드는 야전 상황실에서 밤새 작전 회의를 하다가, 멀리 파견했던 정보원이 도착하자 먼저 보고부터 받았다.
“에디스의 흔적은 찾았나?”
“예, 폐하. 큰 성과가 있었습니다.”
“자세히 말하라.”
“새튼 항구에 공작님이 들르신 게 분명합니다. 굉장히 여러 가지 일을 하셨고 구매한 물건도 많습니다. 특히 고급 드레스를 싹쓸이하다시피 하셨습니다.”
“에디스를 본 사람이 있었나? 옷가게에 들렀을 것 아닌가.”
“옷가게에는 닉슨이 갔던 듯합니다. 가게 주인이 말한 인상착의가 일치했습니다. 그때 닉슨이 분명히 얘기했다더군요. 드레스를 입을 분이 배에 계시다고요.”
“어느 상회 소속의 배였지?”
“그레이브즈 상회였습니다.”
클라이드는 딱딱하게 말아 쥔 주먹으로 책상을 쿵 내리쳤다.
반란과 함께 에디스가 납치되었으니 범인은 적들이 분명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그녀와 관련이 깊은 페이튼을 지목했다. 그리고 결과는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배는 지금 어디에 있나?”
“신대륙으로 출발했습니다. 닉슨이 흙과 지평선으로 향한다는 얘기를 흘렸다고 합니다.”
“흙과 지평선이면 그레이브즈 가의 농장 맞지?”
“예, 맞습니다.”
납치 사건은 페이튼이 벌인 짓 중 가장 악질이면서도 클라이드에게 강한 충격을 안겨 준 행동이었다. 하필 에디스를 그 먼 곳까지 보낸 게 결정적이었다.
페이튼은 줄곧 에디스의 영지를 탐내 왔으니, 반란이 벌어지는 동안 그녀를 빼돌린다는 계산은 충분히 일리 있었다.
하지만 더 큰 파장은 따로 있었다. 그녀와 멀리 떨어지게 되어서 클라이드는 심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전쟁의 가장 불안 요소는 에디스였다. 겉으로는 멀쩡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초조하다 못해 일상을 유지하기 힘겨울 만큼 붕괴해 가고 있었다.
‘에디스가 부디 무사해야 할 텐데. 페이튼이 제정신 박힌 놈이라면 그녀를 온전하게 모셔서 숨겨 둬야 맞겠지만…….’
긴 초록 뿔 영지를 페릴랜드에 편입시킬 목적이 가장 클 테니, 함부로 죽여서 영지 승계권이 다른 이에게 넘어가면 납치해 봤자 소용없을 것이다.
‘하지만 혹시 어디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쩌나.’
험한 일이라도 당했을까 봐, 고통스러운 고문이라도 당했을까 봐 마음이 무거웠다. 생각만 해도 클라이드의 옆구리가 달군 쇠를 지진 것처럼 아팠다.
그녀가 사라진 날부터 한순간도 그립지 않은 때가 없었다. 걱정되고 보고 싶어서, 걷는 걸음마다 피를 쏟아 내어 만든 진창 속이었다.
‘다 내 잘못이야. 그때 에디스를 혼자 보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늘 내 옆에 뒀어야 해.’
딱 붙어서 살을 맞대고 있어도 부족한 지경에 세계의 반대편까지 헤어져 버렸다.
‘이대로 영원히 에디스를 별 너머로 떠나보내게 될…….’
클라이드는 혼자 하는 생각만으로도 몸서리쳐져 다급하게 머리를 털었다. 그런 일은 벌어져서는 안 된다. 가능성조차도 떠올려선 안 돼.
‘지지 않을 테니까. 반드시 별의 인력보다 더 강한 의지로 에디스를 내게로 오게 만들 테니.’
실패할 미래는 절대 떠올리지 않았다. 혼자만 남을 일은 무조건 없다.
그는 에디스가 별을 건너 떠나 버리면 자신도 살아남기 힘들게 되리라고 확신했다. 구태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지 않아도 저절로 시들어 가게 될 것이 분명했다.
클라이드는 정보원이 올린 자료에서 에디스의 행적을 빠짐없이 확인했다. 구매했다는 물품 목록을 읽어 보니 그녀가 제게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음을 어렵지 않게 간파했다.
케츠모리스 본가로 온 어음 청구서는 진작 클라이드의 선에서 처리했다. 그가 보낸 정보원이 본가에 상주하고 있다가, 회계사 앞으로 뜻밖의 서신이 오자마자 곧바로 황궁에 보고했다.
하지만 아무리 서둘러 봤자 어음 발행일은 거의 한 달이 지난 상태였다. 새튼 항구에서 연락이 오는 데 한참이 걸리고, 클라이드의 정보원이 급히 달려가 조사하는 데 다시 며칠이 걸렸기 때문이다.
제법 큰 액수의 사용 내역은 구조의 손길을 바라는 에디스의 뜻이 강하게 담겨 있었다.
그는 황군 총사령관을 불러 논의했다.
“신대륙의 적 영지에 군대를 파병해야겠네.”
“신대륙이라면…… 굉장히 먼 곳이 아닙니까.”
“우선은 한 군데만 공격해야겠어. 그레이브즈 가의 영지를 목표로 해서 말이지.”
구태여 에디스를 되찾기 위한 일차적인 목적을 먼저 들먹이지는 않았다.
그것 외에도 페이튼의 땅을 공격할 이유는 많았다. 자금줄을 끊어 놓는 효과도 있겠고, 반란자들에게 경고하는 의미도 담을 수 있겠다. 그들의 재산을 모조리 제국으로 흡수하겠다는 명분을 만들어도 좋겠다.
“폐하, 말씀드리기 송구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남하 중인 체르헨 군에게 전력을 집중해야 합니다.”
“소수의 병력만 보내면 어떨까 하네. 그곳은 사설 경비만 약간 있을 뿐 거의 무법천지라던데.”
“폐하의 뜻이 그러시다면, 이동 가능한 숫자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해군을 보낼 필요는 없네. 황가의 영지를 통해 육로로 접근하면 되니까.”
더불어 황제의 측근 시종인 케츠모리스 경이 그곳에 구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총사령관은 그의 뜻을 받들어 인질을 최우선으로 구출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짰다.
며칠 후 원정 인원이 정해지자 클라이드는 원정대 사령관과 참모를 직접 모아 놓고 에디스의 구출을 당부, 또 당부했다.
출항하는 배에 오른 황군의 수는 수백 명에 달했다.
인원수는 적지만 최신 무기와 화력으로 무장한 군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