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선원들은 아픈 사람을 위주로 해서 절반 이상을 갑판에 올려보냈다. 건강한 노예들이 창고에 남아 오물을 치우고 더러움을 닦아 냈다.
에디스도 내려가서 철창 너머로 작업하는 광경을 지켜봤다. 긴 초록 뿔 항구에서 출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창고 상태가 아주 심각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메탄가스가 얼마나 지독한지 금세 어질어질해졌다.
“타와누카, 저 안에서 분변 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거 맞아?”
“분변 처리가 뭡니까?”
어려운 라그란드 어휘를 알아듣지 못한 타와누카가 되물었다.
“똥오줌 말이야. 냄새가 왜 이리 독해.”
“선원들이 바로 치워 주지 않으니까요. 배변용 통이 꽉 차고 넘쳐도 가져가지 않을 때가 흔해요.”
“자주 치워 주면 좀 나을까?”
“제가 노예로 끌려올 때는 제때 배변통이 비워진 적이 없어서, 그런다고 냄새가 나아질지 장담 못 하겠네요. 배 바닥은 원래 환기가 안 되기도 하니까요.”
쾌적한 환경까지 기대하기는 힘들 듯했다. 에디스는 혹시나 해서 어떤 선원에게 다가가 물어봤다.
“이봐, 뭐 하나만 물어보지.”
“예잇! 공작님.”
“창고 청소가 잘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그런데 이 상태로 계속 깔끔하게 유지할 수는 없나? 냄새도 어떻게 좀 해결하면 좋겠는데.”
“글쎄요. 청소한 적이 처음이라서요.”
“뭐?”
“원래는 도착할 때까지 손대지 않는 게 보통입니다. 가끔 똥통이나 치워 주지.”
“아니, 대체 왜?”
“지금은 노예가 고분고분하게 굴고 있지만 여차하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거든요. 창고 밖으로 내보내는 건 솔직히 위험하지요.”
“반란을 일으킬 위험 때문이라고?”
“저기도 보세요. 다들 칼 들고 감시하느라고 바쁩니다요.”
주변의 선원들이 서슬 퍼런 태도로 노예를 감독하고 있었다. 굽은 만도를 옆구리에 차고 검 손잡이를 단단히 쥔 채였다. 다른 손에는 채찍도 들었다.
돌이켜 보니 어제 갑판에서도 그랬다. 에디스는 환자를 돌보느라 바빴지만 선원은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노예끼리 밧줄에 연결되어 있어도 마음을 놓지 못하는 듯했다.
에디스는 난감했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인류 평등을 외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노예는 모든 라그란드인을 증오했고 선장은 노예를 상품으로 여겼다.
일이 또 커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작은 일을 뻥튀기하는 재주가 있나 보다. 그렇다고 불쌍한 노예를 외면할 수도 없었다.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창고를 깨끗하게 유지하면 좋겠군.”
이런 희망사항이 쉽지 않음을 깨달아야 했다.
청소가 끝난 뒤 선장을 만나서 담판을 지었다. 노예 중 몇 명만 활용해서 그녀의 바람대로 배변통도 자주 비우고 청소도 하도록 청했다. 하지만 노예가 창고 밖으로 나오려면 감시도 바빠지는 탓에 선원을 잘 다독여야 할 텐데, 그 몫을 선장이 해 주지는 않았다.
결국 에디스가 움직여야 했다. 묵묵하면서도 열심히 일했던 선원에게 은화를 건넸다.
“청소를 돕느라고 고생 많았다.”
약간 쇼맨십도 곁들였다.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직접 돈주머니를 열어 선원의 손바닥에 예쁘게 얹었다. 포상이라는 느낌이 확실히 나도록 마무리로 방긋 웃어 주기까지 했다.
* * *
진료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에디스는 노예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의사들의 불평을 처리하고 꺼리는 일을 대신해 줬다. 그걸 반복하다 보니 자신이 조금 간호사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갑판에 올라오는 자들은 다들 고분고분했다. 반란의 기미는 엿보이지 않았다.
그녀도 선장과 선원들이 강력히 경고한 부분을 이해하고는 있었다. 다만 선원들의 삼엄한 감시하에 환자를 돌보는 자신의 몫에 충실할 뿐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상태가 위중한 환자는 일단락됐다.
소생할 만한 사람은 차도가 보이기 시작했고, 안타깝지만 사망자도 생겼다.
이젠 소수의 노예가 청소를 하러 배 바닥과 갑판을 오락가락하는 장면이 일상이 되었다. 의사들과 에디스는 한쪽에 테이블과 의자를 고정석으로 만들고 매일 환자를 봤다.
선장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노예를 돌보면서 항해하면 본전치기도 힘들다고 했다. 에디스가 사비를 털어 지원하기에 망정이지 장삿속으로 보면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상관치 않았다.
거창하게 라그란드 월드의 전 인류적 평화를 원해서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노예들을 전부 물에 빠뜨려 죽이는 장면을 목격하고, 양심상 가만히 둘 수 없었던 데에서 비롯했다. 그 상황을 눈앞에 직면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아닌 누구라도 참지 못했을 거다.
이번 환자 중에는 소년이 있었다.
그동안 선상에서 본 노예 중 가장 어렸다.
의사가 소년의 엉망인 피부에 바를 연고를 처방했다. 발라 주는 건 에디스 담당이었다.
“약이 따가울 거야. 잘 참을 수 있지?”
연고를 묻힌 솜을 핀셋으로 집어 소년의 피부에 톡톡 발랐다.
“히익!”
“저런, 많이 따가워?”
에디스는 소년이 제 말을 못 알아들을지라도 어투로 감정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랐다. 여태껏 돌본 다른 환자도 이런 식으로 말을 붙이곤 했다.
외계어같이 이상한 언어로 소년이 화가 난 듯 크게 소리 질렀다. 전혀 이해 못 할 말이었다.
“타와누카, 얘가 뭐라는 거야?”
“아프다네요.”
애잔한 눈빛으로 소년을 바라봤다.
“잘 참고 열심히 치료하면 나을 거라고 전해 줘.”
타와누카가 소년에게 통역했다. 소년이 또 뭐라뭐라 떠들었다. 이번에는 화난 말투가 아니었다.
“뭐래?”
“주인님 예쁘대요.”
그녀는 작게 키득거렸다.
“고맙다고 해 줘. 이 아이도 귀엽다고 전해 줄래?”
“얘는 귀엽다고 하면 싫어할 텐데요. 주인님 눈에야 어려 보이겠지만 부족에서는 전사였을걸요?”
“그런가?”
잠시 망설이던 타와누카가 소년에게 얘기를 던졌다. 소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한 걸 보니 귀엽다는 말까지 해 버린 것 같았다.
진료가 끝난 후 노예들은 곧바로 돌아가지 않고 바깥바람을 쐬었다. 에디스가 시간을 아예 정해 둔 탓이었다. 노예가 창고에서 나왔다가 돌아가기까지 일정한 시간이 걸리도록 못 박아서 이 과정을 날림으로 해치우지 못하도록 했다.
선원들은 지루한 표정으로 노예를 감시했다. 의사는 시간이 남아도 자리를 뜨지 못해서 저희끼리 잡담을 나눴다.
에디스도 오늘의 포상 은화를 선원에게 준 후에는 할 일이 없어졌다.
그러다가 문득 쓸 만한 생각이 떠올랐다.
급히 선실에 가 소지품 상자를 열었다. 여행을 대비한 각종 필수품이 많았다. 어디에 뒀는지 기억나지 않아 한참이나 뒤진 끝에 손바닥만 한 나무 상자를 찾았다.
“여기 있었구나.”
원하는 물건을 찾은 후에는 여러 개의 소지품 상자에 꼼꼼히 자물쇠를 잠갔다. 만약을 대비해 넉넉하게 챙겨 둔 금화와 은화가 상자들의 제일 깊숙한 곳에 나뉘어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항해 중에 이렇게나 돈이 요긴하게 쓰일 줄 몰랐던 탓에 도둑맞지 않도록 주의했다.
다시 갑판으로 올라가 소년에게 다가갔다.
“자, 이거.”
소년의 손에 단순한 모양의 상자를 쥐여 줬다. 뚜껑을 열고 꼼꼼히 덮여 있던 기름종이를 펼쳤다. 안에는 왕사탕이 한 개씩 종이에 싸여 가득 담겨 있었다.
“먹어.”
에디스는 손짓으로 밥 먹는 시늉을 했다. 이 정도는 바디 랭귀지로 소통할 수 있을 듯했다.
소년의 눈동자가 왕사탕만큼 커다래졌다.
“먹는 거야. 맛있어.”
한 개 까서 소년의 입에 넣어 줬다. 바싹 말라서 홀쭉한 볼이 사탕 모양으로 볼록해졌다. 미친 듯이 지진을 일으키는 까만 눈을 지켜보자니 그녀는 마음이 흐뭇해졌다. 사탕이 제 주인을 찾아간 기분이었다.
어쩔 줄 모른 채 사탕만 물고 있던 소년이 빨개지다 못해 시커메진 얼굴색이 되어 웅얼거렸다. 여전히 못 알아들을 언어였다.
“감사하다고 하네요.”
타와누카가 통역해서 전해 주자 에디스는 슬며시 웃었다. 사탕 상자를 꼭 쥔 소년의 손이 수줍게 꼼지락거렸다.
“내려가서 다른 사람들이랑 나눠 먹어.”
“먹지 않고 가지고 있으면 안 되냐고 묻는데요?”
“좋을 대로 해. 선원들한테는 뺏지 말라고 전해 둘게.”
주변에는 다른 노예도 많았다. 갑판 바닥에 앉아서 햇볕도 쬐고 몸에 바른 약도 말리고 있었다.
에디스와 소년의 기묘한 대화에 귀 기울이던 누군가가 앉은 자세로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며 타와누카에게 말을 걸었다. 타와누카는 이내 에디스에게 통역했다.
“이 사람이 묻네요. 에디스 님이 자기들을 잡아 온 사람이냐고요. 주인이 될 건지 궁금한가 봅니다.”
그녀는 선선히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소개하려니 할 말이 궁했다. 신세 한탄하듯이 길게 늘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도 여기에 잡혀 온 처지야.”
타와누카가 말을 전하자 노예들 사이에 탄식이 길게 터졌다. 다른 사람이 또 물었다.
“그럼 먹을 것과 약은 누가 준 겁니까?”
“이건 내 돈으로 산 거야.”
“당신 같은 분이 어떻게 잡혀 올 수 있지요? 굉장히 부자에다가 대단한 분 같은데.”
“설명하자면 긴데, 날 납치한 사람이 너희들의 주인이야. 그는 처음에 나한테 청혼했었어. 하지만…….”
페이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불쾌함이 치밀어 올랐다. 생각만 해도 욕이 절로 나오려 했다. 노예들은 그녀의 표정만으로도 많이 이해된다는 듯이 공감의 탄성을 터뜨렸다.
에디스는 구구절절한 사정을 하소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까이에 선원들이 있어서 선장에게 얘기를 전할 수도 있었다. 선장은 에디스와 페이튼이 돈과 지위, 영지 때문에 얽혀 있다고 믿으며, 이해관계가 맞으면 사이가 나아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그런 식으로 말발을 세웠기 때문이다.
페이튼이 에디스 한 명만을 위해 함선을 출항시킨 상황도 그녀에게 도움이 됐다. 자신이 굉장히 대단한 인물이고 함부로 대해선 안 되는 존재라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따라서 페이튼이 진짜 썩을 놈의 개쓰레기이며 제국의 반역자라는 진실을 입에 올릴 수는 없었다. 언제든 배의 주인과 자신이 화해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어야 했다.
“하여튼 복잡한 사정이 있어. 나는 너희의 주인이 아니지만, 다들 건강히 육지를 밟게 되길 바라.”
“그렇게만 전하면 됩니까?”
타와누카가 깊은 상념에 잠긴 에디스를 걱정스럽게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