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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93)화 (93/129)

93화

“뭐든 하나만 잘 풀리면 좋겠네.”

부산한 분위기의 선착장을 내다보며 에디스가 한숨지었다. 옆에서 타와누카가 차를 따랐다.

“잘 될 겁니다, 주인님.”

“너무 막연해서 답답해.”

“저 많은 노예의 생명을 살리신 자비로운 주인님인걸요. 분명히 하늘이 축복하실 겁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망할 놈의 하늘은 아마 자신을 원래의 세계로 돌려보내고 싶어 할 것이다.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는 자연의 법칙이다.

클라이드와 떨어져 있으니 더 자주 그의 생각이 났다.

보고 싶다. 그립다.

그런 감정이 팍팍 와닿는다기보다 줄곧 가슴속에 그가 머물렀다.

“클라이드와 같이 있어야 하는데.”

그는 늘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에디스는 함께하는 순간을 소중히 여기자는 마음이었다. 서지우로 돌아가게 되더라도 평생 그를 잊지 않도록 좋은 시간을 만들어 두고 싶었다.

별의 엇갈림을 이해하기 전부터, 어쩌다 보니 잘한 일이 한 가지 있었다.

클라이드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

그건 정말 훌륭한 선택이었다.

덜컥 결혼해 버리고 떠나면 어쩔 뻔했어. 그냥 사귀다가 헤어지는 게 백배 낫지. 당시의 마음은 훨씬 유치하고 단순했지만,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대양 너머로 갈라지는 건 너무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직전까지 붙어 있으려고 했는데 이젠 추억조차 만들지 못하게 됐다. 이 상태로는 더 빠른 시일 내에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려나.

에디스로 있으면서, 클라이드를 다시 볼 날이 영영 사라지게 될까.

* * *

닉슨이 귀환하면서 에디스가 쓸 물건을 잔뜩 사 왔다. 몇 박스 분량의 생필품 상자가 선실로 들어왔다. 당장 화장수도 필요했는데 잘됐다. 머지않아 히트 사이클도 오고 생리도 시작할 텐데 페로몬 억제제와 생리대도 없이 먼바다로 나갔으면 된통 곤란할 뻔했다.

활동적인 옷도 넉넉히 준비했다. 그건 선실에 다 두지 못할 만큼 많아서 창고에도 일부 쌓아놨다.

외모를 꾸미는 건 에디스의 공작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 아주 중요했다. 추레한 모습보다는 당연히 고위 귀족다운 외형이 선장이나 선원들에게 잘 먹힐 것이다.

그리고 나중을 대비해 시녀도 고용하고 화려한 드레스도 챙겼다. 드레스는 신대륙에 도착하면 입을 계획이었다. 페이튼의 식민지 농장으로 갈 거랬으니 그곳을 지배하는 총독과 담판 지을 때 필요했다. 복장이 곧 에디스의 갑옷과 같았다.

“닉슨, 쇼핑할 때 별일은 없었어?”

“예, 지시하신 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드레스를 고르는 데 애를 먹었지만요.”

“부티크의 마담에게 추천받은 거 맞지?”

“그렇게 하긴 했지만, 공작님이 예상한 금액보다 싸던데요. 최신 유행이라든가 고가의 액세서리 같은 건 당장 구하기 힘들다더라고요.”

“작은 항구라서 그런가 보네. 어쩔 수 없군.”

“항구에 사흘간 정박하기로 했으니, 그사이에 구할 수 있는 물품은 최대한 구해서 연락하겠다고 했습니다.”

“괜찮은 물건이 오면 좋겠다. 지금 상황에서는 정말 좋은 드레스가 필요해.”

이만큼 한꺼번에 큰 지출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에디스는 그야말로 통 크게 쏘는 중이었다. 화물을 싣기 위해 선장에게 빌려준 자금 말고도 자신에게 투자하는 금액이 만만치 않았다. 앞날이 달린 문제이다 보니 되도록 철저히 대비해야 했다.

계산해 보니 케츠모리스 가의 자금 사정이 아슬아슬했다. 거액의 부채를 벗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상황에서 새로 큰돈이 나가게 되었다.

유능한 회계사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를 채고 황실에 연락할 테니, 그때 클라이드에게 어음도 보여 주겠지. 액수가 클수록 회계사의 행동도 빨라질 것이다.

그러면 클라이드는 이 항구에 사람을 보내 지출 내역을 조사하겠지. 에디스가 뭘 하다가 떠났는지도 확인이 이루어지겠다.

그때를 위해 그녀는 메시지가 될 만한 흔적을 사방에 남기는 중이었다.

“그리고 선장은 어때? 내 요구를 잘 따르는 것 같았어?”

“의사 말입니까?”

“응, 의사.”

현재 배에는 치료가 시급한 환자가 아주 많았다. 의사와 약이 필요했다.

타와누카의 경험담에 따르면, 노예무역을 하는 자들은 노예가 아파도 내버려 뒀다. 치료해서 낫게 하지 않고 그냥 버렸다. 신대륙에서는 치료비를 감당하느니 새 노예를 사는 편이 싸다고 했다.

사람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가치관을 에디스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대단한 박애주의자라서가 아니라, 이건 너무 말도 안 됐다.

그래서 의사를 여럿 고용해 달라고 선장에게 청했다. 비용 역시 에디스가 부담하기로 했다.

“선장이 의사를 만나러 갈 때 저도 따라갔습니다. 선장이야 적극적으로 의사를 데려오려고 했지요. 그런데 의사들이 질색하는 눈치였습니다. 노예를 돌보는 게 싫다면서요.”

“흠, 어쩌지. 마음 착한 의사가 나타나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나.”

에디스는 선실에 갇힌 채 불안한 여정을 이것저것 고민했다.

사흘 뒤, 풍요의 요정 호는 화물을 잔뜩 싣고 출항했다. 다행히 의사도 몇 명 구했고 약도 넉넉히 실었다.

목적지는 신대륙이었다. 에디스 일행을 태운 함선이 몇 개월에 걸친 대항해를 시작했다.

* * *

육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문제가 터졌다.

에디스는 의사를 월급 방식으로 고용해 계약 기간 동안 환자 수에 상관없이 진료하기로 했다. 주로 노예를 돌봐야 한다는 점에도 합의했다.

그런데 선실에 짐을 푼 뒤 상황이 달라졌다. 의사들과 에디스 사이에 심각한 의견 차이가 생긴 것이다.

“진료실에 환자가 오게 해 주십시오. 함선 바닥 창고에서는 환자를 보지 않겠습니다.”

노예들이 수용된 창고로 내려갔다가 온 의사들이 입을 모아 주장했다.

선장은 곤란해진 에디스를 나 몰라라 했다. 의사가 노예들을 얼마나 낫게 하든 선장에게 큰 관심은 없었다. 보통의 노예 무역처럼 죽을 놈은 내버려 두고 살아난 놈은 팔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다.

고심하던 에디스는 배 바닥 창고의 열악한 환경을 질색하는 의사들보다 여태 잘 구워삶아 둔 선장을 공략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러는 편이 노예들에게도 나을 것 같았다.

“선장, 의사들의 얘기는 분명히 일리가 있네. 창고는 너무 더러워. 거기에 있다가는 아무리 약을 퍼부어도 낫지 않을걸?”

“하지만 노예를 창고 밖으로 내보내 달라는 조건은 공작님과 제 계약에 없었습니다.”

“그럼 추가로 계약하도록 하지. 살아서 땅을 밟게 될 노예를 예상해서 배분율을 정해야겠어.”

“그런 걸 왜 합니까?”

“노예를 페이튼의 영지에 팔 거잖아. 그 계산도 해야지. 내 돈 들여서 의사를 고용했는데, 설마 자네가 통째로 꿀꺽할 셈인가?”

“하지만 원래는 그런 말씀이 없지 않았습니까.”

“맞아. 순수한 호의로 도움을 주려고 했네. 하지만 선장이 비협조적으로 나오니 나도 셈을 꼼꼼히 따질 수밖에.”

살짝 협박도 곁들였다. 약값이며 의사 인건비를 에디스가 다 쓰고 돈은 선장만 벌게 된다면 소송을 걸겠다고 으름장 놨다.

의사가 창고로 가지 않겠다는 이유가 너무 명확해서 선장을 이해시키기도 쉬웠다. 다만 노예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기본적인 사고방식을 고칠 수는 없었다.

대신에 금전을 이용했다. 선장과 의사에게 두루 쓸모있는 미끼였다.

새 계약서의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방치할 경우 노예가 살아남을 비율―선장의 예측으로 20퍼센트―보다 초과한 인원을 배분 대상으로 삼는다.

둘째, 배분은 그레이브즈 상회에 줄 수수료를 제외하고 선장과 의사―선장이 다 가지는 게 아니라―가 5대 5로 나눈다.

셋째, 에디스는 순수한 호의로 의사 인건비와 약값을 지불한다.

모두가 만족할 만한 계약이 이루어졌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도 선장과 의사는 되도록 많은 노예를 살리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에디스는 노예를 판 돈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지 않겠다는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항해하는 동안 노예에게 약을 주며 돌보겠다던 단순한 발상에서 시작했던 일이 이젠 상당히 큰 사태로 발전해 버렸다.

이후로는 일이 계속 생겼다.

에디스는 먼저 전체적인 가이드 라인을 제시했다. 그에 따라 선장이 선원을 지휘해서 움직였고 의사들도 호흡을 맞춰 진료했다.

“몇 명씩 갑판으로 올라와서 진료하면 좋겠어. 겸사겸사 노예가 햇볕도 쬘 겸 해서 말이지. 날이 궂으면 선실에서 환자를 보고.”

얼마 후 에디스는 갑판에 십여 명의 노예가 올라오는 장면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거의 기다시피 해서 선원들에게 끌려 올라온 노예의 상태는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에디스는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뭐 도울 일은 없나 찾아봤다. 의사 한 명이 너무 더러운 노예에게 손대기를 꺼리면서 눈으로만 보려 하기에, 물수건으로 노예를 닦아 줬다. 그래도 촉진을 거부해서 그녀가 대신 만지고 병증을 전달했다.

상대적으로 제게 씻을 물이 많이 주어진 덕에, 다 끝난 후 선실에 돌아가 비누로 말끔히 씻으면 되리라는 생각이었다.

첫날에는 노예를 닦아 주고 진료 후 약을 처방하는 과정만으로도 해가 저물었다.

진료를 마친 후 의사들에게 심심한 격려의 말을 건넸다. 그리고 뜻밖에 봉변을 당한 것처럼 괴로워하며 일한 선원들도 다독였다. 선장은 선원을 폭력으로 다스리는 듯했지만 에디스는 당근 전략을 썼다. 가장 눈에 띄게 열심히 했던 선원에게 은화 한 닢을 건넸다.

“수고 많았다. 약소하지만 성의로 받아 주렴.”

“우왓, 이게 웬 돈이냐. 감사합니다!”

선원은 신이 나서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액수는 크지 않아도 갑작스러운 보너스가 생겼으니 횡재한 기분인 듯했다.

다음 날은 분위기가 달라졌다.

선원들이 돈을 받으려고 에디스의 말을 아주 잘 들었다. 하루치의 노동자 일당과 맞먹는 은화 한 닢을 다들 어지간히 탐내는 눈치였다.

어차피 선장이 시키면 해야 하는 일이긴 했다. 하지만 억지로 최소한만 하느냐, 노력해서 은화를 버느냐가 달랐다. 아예 포기하고 게으름피우는 선원은 빼고 대부분이 그녀에게 싹싹하게 굴었다.

기운찬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에디스는 선장에게 넌지시 운을 띄웠다.

“배 바닥 창고가 벌써 많이 더러워졌던데, 청소할 때가 되지 않았나?”

“번거로운 일이라서 나중으로 미룰까 합니다.”

“노예들한테 시키면 되잖아. 자기네들이 자는 곳이니 깨끗하게 닦으라고 하면 될 듯한데.”

“감독하기도 까다롭고, 노예들도 말을 잘 안 듣고…….”

“그러지 말고 한번 해 보게.”

노예를 더 많이 살아남게 할 수 있다고 꼬드겼더니 선장은 못 이긴 척하며 선원들에게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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