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우리 군도 바로 움직인다. 양국 군이 마주칠 날짜는 언제쯤 될 것 같나?”
“이틀 뒤 오전쯤일 것 같습니다. 정확한 시각과 교전지는 군 작전 회의를 통해 논의해야 합니다.”
클라이드는 황실 근위대장을 돌아봤다.
“그대는 우두머리를 잡아야 한다. 핵심 인사를 추격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라.”
“예, 전하.”
깍듯이 경례를 붙이는 근위대장과 총사령관을 마주하며 클라이드는 오랜 회한에 사로잡혔다. 지루하게 이어 온 달리기의 결승점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놈들을 없애지 않으면 내가 자결하고 말겠노라 각오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에디스를 만나기 이전에는 그것만이 삶의 목표였다.
최적의 시기가 왔다. 귀족파를 한꺼번에 처치할 절호의 기회였다. 클라이드에게도 출혈은 생기겠지만, 싸움에 어떻게 상처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전하, 명하실 것은 이게 전부입니까?”
“전하라……. 그것참 새삼스럽군.”
황금빛 안광을 번뜩이며 클라이드가 턱을 들었다.
“황제 폐하에게 일어난 일을 밝히기에 가장 좋은 시점인 듯해.”
“전하.”
“나는 수 세기에 걸쳐 제국의 발전을 해쳐 온 귀족파 인사들을 더는 제국민으로 인정하지 않겠다.”
벅찬 호흡을 하는 동안 한자리에 모인 클라이드의 측근이 그를 주목했다.
“왜냐하면, 폐하는 5년 전에 살해당하셨기 때문이다. 주범은 빅토르 백작, 디트리안 백작, 다빌 자작, 제이론 자작, 선대 그레이브즈 공작. 그리고 같은 노선의 귀족파 놈들이다.”
“전하, 어떻게 이런 일이…….”
“나는 이 시간부로 황제의 자리를 채우겠다. 약식으로 대관식을 준비하도록 해라. 이 제국의 황제로서 귀족 놈들을 적으로 돌리고 정면 승부하겠다.”
모두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클라이드를 폐하로 받들었다.
“황제 폐하가 되심을 경축…….”
누군가가 축원의 말을 올리려다가 말았다. 축하할 분위기가 되지 못했다. 조용히 가슴을 치며 격정의 순간을 감내할 뿐이었다.
약식 대관식은 내일 한 시간짜리 행사로 진행하기로 했다. 이런 절차는 클라이드가 황제로 등극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아무리 급해도 꼭 거쳐야 했다.
총사령관과 근위대장을 독려해 각자의 임무를 하러 보낸 후, 그는 항구로 향했다.
에디스와 연락이 닿지 않아 불안했다.
그녀는 똑똑한 사람이니 위험한 일을 스스로 만들어 내진 않겠지. 하지만 마음이 계속 울렁거렸다. 항구에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여러 번 보낸 전령마저 돌아오지 않는지 걱정됐다.
말을 달리는 동안 생각이 많아졌다. 에디스가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결국 연약한 사람에 불과했다. 거친 힘 앞에서 속수무책 당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었다.
클라이드는 근위대를 이끌고 페이튼의 배가 정박해 있다는 대형 선박 선착장으로 직행했다.
“왜 아무것도 없지?”
멀리에서 보는 밤바다가 텅 비어 있었다. 배가 한 척도 없었다.
곧이어 피비린내가 물씬 풍겼다. 달리는 말 아래로 시신이 드문드문 놓여 있었다. 처참한 광경 앞에서 클라이드는 뒤통수를 거세게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선착장 전체에 산 사람의 자취가 끊겼다.
“몰살인가.”
“생존자를 찾아볼까요?”
“에디스부터 찾아야 한다. 그리고 누구든 상황을 아는 자를 데려와라.”
“예, 폐하.”
자신이 보낸 전령도 시신에 섞여 있었다. 황실 제복이 피에 물든 채였다.
항구 관리사무소도 전멸이라는 비보를 듣고 클라이드는 점점 절망의 늪에 빠져들어 갔다.
선박들은 미리 빼돌린 게 아닌가 싶었다. 배의 주인이 귀족파의 일원이라면 지시를 받았을 수 있다. 파벌이 없는 선박이라도 불온한 분위기를 읽고 배를 다른 항구로 이동했을지 모른다.
에디스는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다.
만약 그녀가 배에 탔다면 목적지를 전혀 종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시신도 없는가?”
“전혀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클라이드는 핏발이 곤두선 눈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수하들이 주변을 수색하는 동안 그 역시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하지만 그녀는 없었다.
에디스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 * *
다음날 에디스는 갑판에 바람을 쐬러 나갔다. 그러다가 선장과 마주쳤다. 어제 선장과 대화가 통한 김에 민감하지 않은 화제를 가볍게 던졌다.
“식사가 생각보다 괜찮게 나오더군.”
“감사합니다. 공작님께 신경 좀 썼습니다.”
“그런데 이번 항해에서는 식량을 조금만 실었다고 했지? 그럼 지금 화물 창고에는 뭐가 있지?”
“거의 비었습니다. 신대륙에 정착한 제국민에게 팔려고 사치품만 약간 있습니다.”
“겨우 그것만으로 어디 벌이가 되겠어?”
“상회의 주인이 그러라고 하시니 저야 따를 수밖에요. 그래서 이번 항해는 일정이 간단합니다. 갈 때는 공작님을 안전하게 모시기만 하면 되고, 돌아올 때는 설탕과 커피를 싣게 될 겁니다.”
“원래 그러기로 한 건가?”
“아닙니다. 급하게 일정이 변경되었습니다.”
선장은 이런 얘기쯤 해도 상관이 없다고 여겼는지 술술 털어놨다. 에디스 역시 이 상황이 자신의 예상 범위 안에 있음을 확인하는 데 그쳤다. 선실에 그녀를 위한 소지품이 없는 걸 봤을 때부터, 그가 긴급하게 지시받아 납치하고 출항했다는 걸 알아챘다.
사실 선장의 역할은 미미했다. 하지만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면서 사이좋게 지내면 긴 항해 기간에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그녀는 선장이 혹할 얘기를 던져 봤다.
“빈 배로 가느니 뭐라도 싣지 그러나.”
“상회에서 별말 없었는데요. 제가 사비로 물건을 사다 채울 수도 없고요.”
페이튼은 배에 무역품을 가득 채우기보다 에디스 한 명에게 더 높은 가치를 매긴 걸까? 그녀만을 태우고 당장 배를 띄우라고 지시한 듯하니 아마도 그렇겠지.
에디스도 제 값어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깟 화물보다 자신이 훨씬 중요한 인물이라고 자부했다. 어느 모로 봐도 페이튼의 선택은 합리적이었다.
“잠시 들를 항구는 결정했나?”
“예, 남쪽으로 며칠 가면 작은 항구가 나옵니다. 제국령도 아니라서 안전하게 식료품을 실을 수 있을 겁니다.”
선장은 항구가 제국 외의 땅이니까 에디스가 탈출할 기회가 없으리라는 걸 돌려 말했다.
그녀도 제 발로 달아날 생각은 일찌감치 접은 탓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군. 이국적인 항구를 구경할 수 있겠어. 비록 객실의 창을 통해서만 볼 수 있겠지만 말이야.”
“공작님이 안전히 계시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그런데 말이야.”
에디스는 밤새워 떠올린 작전을 넌지시 선장에게 흘려 봤다.
“물건값을 내가 빌려주면 어떻겠나?”
“예? 무슨 말씀이신지.”
“창고를 비운 채로 먼바다를 건너면 손해잖아. 뭐라도 사서 채워야지. 안 그래?”
눈치를 보니 선장은 글이나 좀 읽을 줄 알지 그다지 영리한 사람은 아닌 듯했다. 뱃사람으로서 잔꾀는 많을지 몰랐다. 하지만 공적인 업무나 서류, 거래 따위에 밝지는 못해 보였다.
추측에 불과하지만, 부디 그런 성품이기를 바랐다.
에디스는 혀에 침을 바르고 선장을 꼬드길 만한 화제를 계속 꺼냈다.
“윗선에서는 나를 서둘러 신대륙으로 보내는 게 목적이라고 했지? 그건 이미 달성했으니 나머지는 알아서 하면 되잖아.”
“하지만 나중에 상회 마스터한테 들키면.”
“상회에는 추후 보고를 해도 상관없어.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더 잘해서 돈을 벌어 오겠다는데 누가 탓하겠나?”
“…….”
선장 이 사람, 귀가 참 얇구나. 그리고 허점을 파악하는 능력도 부족하다.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선장을 지켜보며 에디스는 승기가 자신에게 기울었음을 직감했다.
“공작님께서 돈을 빌려주시겠다고 하면, 어떻게 계산이 되는 겁니까?”
“기왕 거래하는 거, 나도 좀 떼어 주게. 한 10퍼센트면 어때?”
“……5퍼센트.”
“하, 이 사람. 사기꾼 아니야? 대부업을 해도 5퍼센트는 더 받아.”
“7퍼센트. 더는 안 됩니다.”
“8퍼센트.”
에디스는 선장의 거친 손과 성공적으로 악수할 수 있었다.
이윤을 남기려고 흥정한 건 선장의 관심을 엉뚱한 곳에 돌리기 위해서였다. 지금 클라이드와 귀족들이 대판 싸우기 직전인데 고작해야 푼돈 좀 벌겠다고 난리 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선실로 돌아가 선장과의 일대일 계약서를 작성했다.
우선 수익 배분율을 깔끔하게 적었다. 그리고 자금을 빌려주는 건 협박이나 공갈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사업적인 차원이라는 내용도 포함했다. 나중에 에디스가 딴소리하면서 협박받아 돈을 털렸다고 할까 봐 선장이 불안해한 탓이었다.
곧이어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어음도 작성했다. 이 어음은 선장의 손에 의해 항구의 믿을 만한 금고에 맡겨지면서, 무역품을 살 돈을 빌리게 될 것이다.
여기에 에디스의 계략이 숨어 있었다.
어음의 내용은 수도에 있는 케츠모리스 가에 전달될 것이다. 에디스가 어떤 항구에서 돈을 빌렸으니, 상환해 달라고 하겠지.
현재 본가에는 회계사가 자금 관리를 하고 있다. 고용주가 실종됐으면서 어음을 발행했다면 회계사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녀를 찾으려 할 것이다. 경찰에 신고하든, 클라이드에게 고하든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급여는 세지만 무척 현명한 회계사를 고용했으니, 아마 낌새를 알아챌 거야.’
경찰을 거친다 해도 결국은 클라이드의 귀에 들어가게 되어 있다. 황실 시종의 실종 사건은 누가 봐도 중요하니까.
걱정되는 부분이 있기는 했다. 항구의 금고에서 케츠모리스 본가로 연락하는 시기가 언제가 될지는 장담하기 힘들었다. 어음 상환 기간을 최대한 짧게 잡는다고 해도 한두 달은 훌쩍 넘을 것이다.
‘신대륙까지 끌려가야 하는 건 거의 확정적이네.’
항구에서 머무르는 동안 탈출 도움을 받을 방법은 없다. 그 항구가 어딘지도 모르고 심지어 제국 국경을 넘는다고 하니 말 다 했다.
며칠 후, 풍요의 요정 호가 낯선 항구에 정박했다.
선실에 갇힌 에디스는 창을 통해서만 주변 분위기를 파악했다. 긴 초록 뿔 땅의 항구보다 훨씬 작은 곳으로, 겉으로만 봐서는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선장은 어음을 가지고 가면서 무척 흥분한 눈치였다.
이번에 실을 화물로 선장이 제법 많이 벌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상회의 물자가 아니라 에디스와 선장이 구매한 물자라서, 상회에는 수수료만 조금 주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닉슨을 항구로 달려 보내는 데에도 무리가 없었다.
닉슨에게는 에디스가 여행 중 쓸 용품을 구해 달라고 주문했다. 은밀히 기회를 봐서 클라이드에게 편지를 부치라고 했지만 별로 성공할 가능성은 없었다. 닉슨을 감시하는 선원이 따라다닐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