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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91)화 (91/129)

91화

에디스의 방은 일등실이었다. 함선을 통틀어 가장 좋은 공간이었다. 작게 트인 창을 통해 신선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반면에 그녀를 위해 특별히 준비된 것은 없었다. 여성용 소지품도 전무했고, 하다못해 갈아입을 옷도 마땅치 않았다. 이런 환경은 선장이 정중하게 그녀를 모시려던 태도와 사뭇 달랐다.

어쩌면 이번 납치극은 급하게 벌어진 일일지도 몰랐다. 속옷 한 장 준비하지 못할 만큼 속전속결로 해치운 느낌이었다.

잠시 숨을 돌리려는데 타와누카가 뛰어들어 왔다.

“주인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지?”

“바로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노예들이 끌려 나와서…….”

말을 잇지 못하고 앞장서는 타와누카를 따라 그녀도 갑판으로 올라갔다.

갑판에는 기묘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노예 한 무리가 끌려 나온 채 공포에 질렸고, 그들을 통제하는 선원이 폭언을 내뱉으며 사납게 매질해 댔다.

어디선가 처절한 비명이 들렸다.

첨벙, 바다에 빠지는 소리가 크지 않은데도 그녀의 귀에 강렬하게 와닿았다. 뒤통수가 쭈뼛 곤두섰다.

“뭐 하는 짓이지?”

아랫사람을 다그치는 건 소용없을 듯했다. 멀리서 지켜보는 선장에게 곧바로 달려갔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별거 아닙니다. 상회의 물건을 처분하는 중입니다.”

“뭐?”

“미리 말씀드렸듯이 공작님께서는 아실 필요 없습니다. 저희 상회 일이니까요.”

에디스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내,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면…….”

선장과의 기 싸움에서 눌리지 말아야 하지만 혀가 굳어서 말이 잘 안 나왔다.

“노예를 바다에, 빠뜨린 것, 같은데 맞나?”

“재고 정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장 상황이 변해서 팔 수는 없고, 신대륙으로 보내자니 식비로 쓰는 돈만큼도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아서 말이지요.”

“재고 정리? 지금, 사람한테 재고 정리라고 했어?”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극도로 감정이 격해지려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마음을 추스를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다음 순간 물에 빠지는 소리가 또 들렸다.

정신이 번쩍 났다.

“내가 식비를 대겠다.”

“공작님께선 가만히 계셔야 합니다.”

“돈을 쓰겠다지 않나. 노예를 돌보는 비용도 내겠어. 수고비 조로 넉넉히 챙겨 주지.”

“하지만 이건 저희 상회 일이라서.”

“페이튼의 지시를 어기면 자네가 곤란해지겠지? 알아. 이해하네. 이건 내가 페이튼에게 서신을 써서 해결하지.”

선장이 손을 들어 잠시 선원들을 멈추게 했다. 다음 차례로 배 후미로 끌려가던 노예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우락부락한 인상의 선원이 노예에게 칼을 겨눴지만 죽이려 들지는 않았다.

급한 불은 끈 상황. 사람이 픽픽 죽어 나가다 말고 일순간 틈이 주어진 것이다.

선장이 약간 망설이고 있었다. 협상을 시작할 기회였다.

에디스는 이마에 핏대가 설 만큼 전력을 다해 궁리했다.

페이튼에게 지시받은 내용은 아마도 노예 밀매의 길이 막혔으니 없애라는 것이었겠지. 한창 반란을 도모하느라고 바쁜 페이튼에겐 그저 이들이 깔끔하게 사라져 주는 게 제일 좋은 일이리라.

재고 정리라는 페이튼의 의도를 파악한 순간, 선장이 노예를 이쪽 배로 옮겨 태운 속셈도 알아챌 수 있었다. 신대륙으로 데려가려는 게 아니라 바다에 나와 몰살시키려는 것이 분명했다.

항구에서 손을 쓰면 시신을 처리하기가 어렵다. 바다로 나와 없애야 흔적이 남지 않겠지.

선장은 갈등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흘끔거렸다. 상회의 지시대로 따를지 말지 결정하지 못한 듯했다.

여기서 에디스가 확신을 심어 줘야 했다. 편지를 써서 페이튼에게 보내면 서로 좋은 방향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선장을 믿게 만들어야 했다.

그녀는 죽음을 목전에 둔 노예를 바라봤다.

그리고 필사의 각오로 입을 열었다.

“선장, 페이튼은 저들을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네. 번거로운 일을 피하려는 의도일 뿐이지. 무사히 팔 수만 있다면 뭐 하러 죽이겠나.”

“판로가 막혔으니 어쩔 수가…….”

“신대륙에 팔면 되지. 늘 그래 왔듯이 말이야. 내가 페이튼에게 편지를 써서 저들을 조용히 신대륙으로 보내겠다고 설득하겠네. 거절할 이유가 없겠지.”

“제가 문책받지 않도록 잘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지!”

거의 다 넘어왔다. 에디스는 위풍당당한 귀족의 모습을 지어내며 어깨를 반듯하게 폈다. 선장은 페이튼에게 단단히 약점 잡힌 게 있는지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한 눈치였다.

“정말……이지요?”

“자네, 혹시 골라 보겠나? 제국에서 페이튼이 더 유명한가, 아니면 나 에디스가 더 명성 높은가?”

“그야 물론 에디스 케츠모리스 공작님이시지요.”

아부가 아니라 진짜로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총사 대회의 여파는 굉장해서, 일반인들 사이에 그녀는 최고의 총잡이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서민을 위한 행사에 얼굴을 내민 적도 잦다 보니 유명세가 꾸준히 상승곡선을 그렸다.

그녀는 마치 최면을 걸듯이 선장과 확고한 시선을 맞췄다.

“내가 그 에디스일세. 그냥 딱 믿어 봐.”

허세를 잔뜩 떨었다. 명성과 신용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지만 번드르르하게 언변을 구사했다. 사기꾼이 흔히 하는 말버릇으로 ‘나 믿지요?’가 있다던데 에디스가 지금 그 짝이었다.

하지만 생사의 기로에 있는 노예를 살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허풍 칠 용의가 있었다.

선장은 모자를 들치며 옆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다른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속 시원히 털어놔 보게.”

에디스는 제가 다 해결해 줄 것처럼 굴었다. 선장이 걱정하는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노예를 살리기 어려울 테니 결국 그녀가 짊어져야 할 짐이지만, 겉모습만은 못 하는 일이 없는 사람처럼 호쾌했다.

“저놈들 몫으로 먹을 게 없습니다. 지금 식량만으로는 바다를 건너기가 힘듭니다.”

“선원이 먹을 음식만 실었다는 건가?”

“맞습니다.”

에디스가 먼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회심의 미소를 선장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럼 가까운 항구에 잠시 들르면 되겠군.”

“하지만 상회의 명령으로는 바로 신대륙으로 직행하라고…….”

“내가 보증하겠다고 하지 않나.”

“그게 쉽지 않은 게.”

“물자만 실으면 돼. 어렵지 않을 텐데.”

선장이 모자를 벗자 축축하게 눌린 머리가 드러났다. 어지간히 긴장한 기색이었다.

“까놓고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공작님이 도망가면 우린 다 죽습니다. 엄벌에 처해진단 말입니다.”

역시 그게 문제구나.

어차피 노예를 두고 에디스 혼자 달아날 수도 없었다. 그녀가 사라지면 저들은 수장될 운명이었다.

탈출은 쉽지 않겠다. 제 발로 달아나는 것 말고 다른 계획을 세워야겠다.

“자네가 이렇게나 편의를 봐주는데 나라고 자넬 외면할 리가 있나. 걱정 말아.”

“정말 믿어도 되겠습니까?”

“배가 항구에 머무는 동안 날 선실에 가두게. 꼼짝하지 않을 테니 말이야. 열쇠를 자네가 가지고, 보초도 믿을 만한 놈으로 세워 둬.”

“……그럼 선실에 가두는 거로. 죄송하지만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에디스는 신용 있는 사람인 척 폼을 재며 미소지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노예들이 도로 갑판 아래로 끌려가는 장면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 치 혀를 놀려 수백 명의 목숨을 구했으니 너무나 다행스러웠다.

선실로 돌아온 에디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작은 침대에 누웠다.

클라이드에게 자신의 상황을 알리는 게 급선무였다. 머지않아 물자 보급을 위해 항구에 정박할 때 반드시 꾀를 내야 할 텐데, 당장은 쓸 만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페이튼이 어떤 목적으로 이런 짓을 저질렀는가를 추측해 봤다. 몇 가지 갈림길이 있었다.

첫째, 클라이드를 정신적 공황에 빠뜨리기. 둘째, 황실과 귀족파의 싸움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이 정도만 의도한다면 그나마 낫겠다. 하지만 더 심한 길도 있었다.

셋째, 페이튼과 강제로 결혼하기. 넷째, 에디스가 없을 때 반란을 일으키기.

‘절망적이야.’

첫 번째 추측부터 제국의 괴멸이 올 정도로 심각했다.

에디스 역시 정신적으로 한계까지 몰릴 만큼 힘들고 지쳤다. 클라이드가 너무 보고 싶었다.

그와 같이 있어야 하는데. 서로 유혹하고 관심을 기울이며 인력을 만들어야 할 텐데. 이렇게 떨어져 있다가는 언제 서지우의 세계로 돌아갈지 모르는데.

너무 멀리 나와 버렸다. 돌아갈 길도 막막한 바다로.

* * *

클라이드는 에디스를 뒤쫓아 항구로 나가지 못했다. 몇 시간 후에 따라가겠다고 말해 놓고선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체르헨에서 돌아온 디트리안 백작의 행보가 극히 불온했다. 자신의 집에 돌아간 듯하더니, 다시 알아보니 행적이 모호했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자들이 많았다. 가장 주목해야 하는 페이튼도 역시 사라졌다.

여기저기에 정보원들을 뿌리고 상황 보고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심정이 답답했다.

항구에는 소수의 근위병을 파견했다. 에디스를 도와줄 일이 있을까 해서 힘쓸 사람을 선택했다. 적당히 정리하고 되돌아오라는 전갈도 함께 보냈다. 그런데 저녁이 다 되어도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추가로 근위병을 보냈다. 아까의 두 배수였다.

그래도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혹시……?’

극도의 불안감이 클라이드를 휩쓸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예감이었다.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으리라는 예감이었다.

“안 되겠군. 내가 직접 나가 보겠다. 채비해라.”

외투를 갈아입자마자 새로운 보고가 도착했다. 상비군 총사령관이 달려들어 왔다.

“전하께 급히 전합니다. 북에서 체르헨의 군대가 막 국경을 넘었다고 합니다.”

“진군인가?”

“예.”

바닥을 딛고 선 발이 안정감 없이 들썩들썩 움직였다. 피가 끓어올랐다.

마침내 귀족파가 공격의 이빨을 드러낸 순간.

솔직히 이때를 기다려 왔다. 놈들을 깡그리 잡아 죽여 버리겠다고 맹세한 지 수년이었다. 점잖게 회의실에서 마주할 때는 할 수 없던 일을 이제는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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