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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90)화 (90/129)

90화

조금 전 만났던 선장과 비슷한 옷차림의 남자가 다가와 에디스의 재갈을 풀어 줬다. 이곳에서 비명을 질러 봤자 항구에 소리가 닿지 않기 때문이었다.

“공작님, 저는 이곳 풍요의 요정 호 선장입니다.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선장이 점잔을 빼며 인사했다.

에디스는 속으로 겁에 질려 있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치아를 세게 물며 자칫 무너지려는 기분을 억눌렀다.

“이게 무슨 짓인가.”

“저희 배 주인님의 명령입니다. 앞으로 공작님을 친절히 모시겠습니다.”

“앞으로?”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치는 가운데 에디스의 일행도 차례로 배에 올랐다.

풍요의 요정 호는 어제 입항한 배 옆에 나란히 정박한 배였다. 난간에 걸쳐져 있던 밧줄 사다리는 이제 사라진 상태였고 갑판 위로는 선원들이 분주히 일하고 있었다.

그녀는 침착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각오를 다졌다.

“나는 이 배에 볼일이 없네. 왜 여기로 데려왔는지 이해할 수 없군. 페이튼에게 무슨 지시를 받았는지 알려 주겠나?”

“잠시만요. 일단 제 할 일부터 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무 데나 편히 계십시오.”

선장도 꽤 바빠 보였다. 선원에게 거친 말투로 소리 지르며 일을 독려했다. 배 위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작업이 무슨 목적인지 에디스로서는 알 수 없었다.

선장의 기운찬 외침이 귀청을 때렸다.

“닻을 올려라!”

드르륵 사슬 긁히는 소리가 한참이나 들렸다. 곧이어 회색의 돛이 펼쳐졌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 * *

배가 움직이는 바람에 에디스는 균형을 잃고 심하게 비틀거렸다.

그녀를 구속하는 자는 없었다. 절대 달아나지 못하는 상황이었던 탓이다.

유일한 탈출로라면 당장 바다에 뛰어드는 것이지만 그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물살을 가르는 배에 휩쓸려 순식간에 몸이 갈가리 찢길지 몰랐다. 게다가 에디스는 수영 실력이 엉망이었다.

항구에서는 출항하는 배 위의 사정을 알 리가 없었고, 선원은 그녀가 허둥거리는 모습을 남의 일처럼 흘끔거릴 뿐이었다.

에디스는 선장이 있는 곳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이게 페이튼이 내린 지시인가?”

“그렇습니다. 공작님을 목적지까지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갑작스럽게 머리가 찡하게 아파 왔다. 현실을 깨달으니 당장 쓰러질 것만 같았다.

거대한 마스트 기둥을 부여잡으며, 머리를 털어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목적지가 어디인가.”

“신대륙에 있는 그레이브즈 영지입니다.”

“내, 내가……. 황명을 받아 이곳까지 왔네. 부디 배를 돌려 주게. 자네는 페이튼에게 받은 지시보다 황제 폐하의 명을 우선해야 해.”

“그건 곤란합니다.”

“페이튼이 보수로 얼마를 주던가? 그보다 세 배를 받도록 조치하겠네.”

선장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말입니다.”

어쩔 수 없다는 말투였다. 돈이 아닌 다른 것에 의해 선장이 움직이는 듯싶었다. 협박이라도 당했나? 하지만 사정이 뭔지 입을 열지 않으니 에디스로서는 그를 회유할 길이 없었다.

항구가 점점 멀어져 가며, 더는 갈매기도 따라오지 않았다. 완만하게 부푼 돛이 배를 먼바다로 줄기차게 밀어냈다.

육지에서 배가 멀어지는 만큼 절망의 깊이가 더해졌다. 클라이드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데 답이 보이지 않았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황궁에 연락을 띄울 방법을 쥐어짜 내 봤지만 단 한 가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당장 주저앉아 통곡해 버리고 싶었다.

어떡해. 클라이드. 난 이제 어쩌지.

주변을 오가는 거친 외모의 뱃사람들 틈에서 근엄한 자태를 유지하는 것 자체에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했다. 에디스는 후끈해지는 눈덩이를 누가 볼세라 고개를 쳐들었다.

부산하던 출항 과정이 마무리되자 선원들이 갑판 여기저기에 모여 휴식을 취했다.

그때, 어떤 선원이 갑작스럽게 타와누카를 공격했다.

“노예 새끼가 어떻게 여기까지 나왔지? 이 옷은 또 뭐야. 어디서 훔쳤어?”

“훔친 거 아닙니다. 내 옷이고, 난 노예도 아니에요.”

“뭐야. 우리 말은 왜 이렇게 잘해.”

주먹질을 피하는 타와누카를 선원이 욕설과 함께 드세게 몰아붙였다. 닉슨이 그사이를 막아섰다. 공작의 일행이라고 강조하며 겨우겨우 두 사람을 떼어 놨다.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꼼짝없이 신대륙까지 납치되어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선장이 에디스를 대우해 주겠다고 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느 수준까지인지는 예상하기 힘들었다. 하다못해 목숨만 붙여서 육지를 밟게 한대도, 잘 모신다는 막연한 표현을 지키지 못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수행원들은 적에게 포위된 듯 저희끼리 등을 맞댄 채 선원들과 대치하는 중이었다. 당장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일행이 험한 꼴을 당하는 건 에디스도 눈 뜨고 볼 수 없거니와, 저들의 무사함이 그녀의 안전과도 직결되어 있었다.

에디스는 배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하는 처지였다. 괜히 분쟁 거리를 만들지 않는 편이 유리했다.

“선장, 저쪽은 전부 내 사람들이네. 선원들과 공연히 실랑이가 벌어진 것 같군.”

자신이 인질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지 않는 느낌을 담아, 귀족으로서 으레 대접받아야 하는 부분을 넌지시 짚어 냈다.

다행히 선장은 눈치가 영 나쁘지 않았다.

“해치려는 뜻은 없습니다. 저 혼혈인을 노예로 착각한 것 같으니, 제가 선원에게 주의를 주겠습니다.”

“노예라니. 이 배에도 노예가 있나?”

방금 출항한 배에 어떻게 노예가 있는지 의아했다.

제국에는 소수의 불법 노예만 존재할 뿐이었다.

노예를 구하려면 보통 남쪽 대륙에서 비윤리적인 방법으로 원주민을 포획하곤 했다. 라그란드를 출발해 남쪽 대륙에서 노예를 싣고 신대륙에 팔아넘기는 게 흔한 패턴이었다.

선장은 에디스의 말을 못 들은 척 외면했다. 그러다가 그녀가 거듭 묻자 마지못해 답했다.

“공작님께선 아실 필요 없습니다. 저 혼혈은 내버려 둘 테니 너무 걱정 마시고요.”

“있군. 있는 게 틀림없어. 대체 어째서?”

제 앞가림하기만도 벅찬 판국에 노예를 묻게 됐다. 입에서 저절로 의문점이 튀어나왔다.

인질의 느낌을 풍기며 약한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세게 나가는 편이 나으리라는 추측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에디스가 강력히 항의하자 선장은 우물우물 말꼬리를 흐렸다.

“공작님 이제 선실로…….”

여세를 몰아 그녀가 다그쳤다.

“이 배는 혹시 남쪽 대륙에 들르나?”

“아닙니다. 목적지는 신대륙입니다. 공작님을 먼저 모셔야 한다고 들었거든요.”

“나만 모시는 게 선장의 임무인가?”

“그건…….”

당장 급한 문제는 배 어딘가에 있을 노예보다 자신의 탈주이지만, 수상한 정황을 눈치챘으면서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선장, 배에서는 내가 아무 데나 편히 있어도 좋다고 했지?”

“위험한 행동만 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그럼 좀 돌아다녀도 상관없겠군.”

“예?”

에디스는 시원치 않은 말만 늘어놓는 선장을 내버려 두고 직접 선창으로 내려갔다.

누구에게도 딱히 제재받지는 않았다. 최고급 시종 드레스를 입은 에디스가 황실 근위대 복장을 한 호위를 거느리고 거침없이 돌아다니자, 뱃사람들의 신기해하는 눈초리가 꼬리처럼 따라올 뿐이었다.

선실과 창고를 거쳐 배의 밑바닥으로 내려가자 악취가 코를 찔렀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봐야 하는 구조의 창살 문 아래로, 피골이 상접한 채 죽어 가는 노예 수백 명을 만날 수 있었다. 유일한 통로인 천장 문을 올려다보는 표정이 퀭했다. 그마저도 움직이는 자가 얼마 없었고 나머지는 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못 했다.

하루 이틀 시달린 상태가 아니었다. 긴 시간 갇혀 있었던 게 분명했다.

“어제 입항한 배에 타고 있던 노예가 틀림없어.”

그런데 대체 어떻게 여기로 오게 된 걸까.

밤새 닉슨이 감시하는 동안 육지에 오르는 노예가 없었다고 했다. 수백 명에 달하는 노예가 배에서 내려 옆의 배로 옮겨 탔다면 반드시 들켰을 것이다.

그때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배 난간의 밧줄 사다리는 어제 입항한 배를 향해 걸려 있었다. 양쪽 배의 사이였다.

“옆 배에서 사다리로 건너왔구나!”

그물 형태로 폭이 넓은 사다리여서, 위험하긴 하지만 불가능한 시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왜 이런 짓을 벌였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갔다. 제국에서 불법 노예 단속이 심해졌으니 이들을 내려놓기가 곤란했겠지. 다른 지역에 가서 팔아치울 셈인가? 선장을 닦달하면 계획을 얻어들을 수 있으려나.

에디스는 타와누카가 들고 있던 랜턴을 받아 발밑의 노예 창고를 세심히 살펴봤다.

허리를 깊이 굽히는 동안 코를 쥐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저들은 생사의 기로에 있는데 고작 냄새를 참지 못하는 무례한 행동을 하기는 싫었다. 알아봐 주는 이가 없어도 스스로 예의를 지키고 싶었다.

그들은 누운 자리도 부족할 만큼 빽빽이 채워져 있었다. 가끔 앓는 신음만 들릴 뿐 말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타와누카, 이를 어떡하지?”

“심각하군요.”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좋을까?”

에디스의 옆에 쭈그려 앉은 타와누카가 창살 아래를 내려다봤다.

“이대로는 다 죽을 것 같네요. 큰 바다를 가로지르는 데 몇 달이나 걸릴 텐데 버틸 리가 없습니다.”

“곧바로 대양으로 나가는 건 말도 안 돼. 이들을 어딘가에 팔고 가겠지.”

“아까 선장은 신대륙으로 갈 거라고 했는데요.”

“그래도 중간 기항지가 있지 않을까?”

설마 이 상태로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야. 몰살시킬 게 아니라면 말이야.

그런 참혹한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어서 에디스는 배가 어딘가의 항구에 잠시 들렀다가 신대륙으로 향하겠거니 짐작했다.

“제가 노예로 끌려온 경험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어땠는데?”

“실제로는 지나치게 잔인해서 최대한 약하게 설명하자면요. 처음 탄 인원의 절반만큼이 제국 땅을 밟았습니다. 나머지 절반은 배에서 죽었지요.”

에디스는 하얗게 질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선원들은 우리가 죽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에디스 주인님의 일을 도우면서 알게 되었지만, 반의반만 살려도 노예상에게는 엄청난 이득이더군요.”

“…….”

“아마 여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죽으라고 내버려 둘 수도 있습니다.”

“남쪽 대륙에서 제국을 거쳤다가 다시 신대륙으로……. 그사이 얼마나 죽든 상관하지 않는?”

끔찍한 상상을 하자 저절로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도 위험한 상황이지만, 당장 눈앞에서 수백 명의 사람이 죽어 가고 있었다. 이런 장면을 보는 것 자체가 공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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