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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89)화 (89/129)

89화

<10장. 별보다 강한 이끌림>

에디스는 말을 타고 익숙한 길을 달렸다.

수도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는 에디스의 영지인 긴 초록 뿔 지역에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주 갔던 곳이라 기억에 선명했다. 영혼이 바뀌기 전의 에디스는 항구에서 갈매기를 쫓으며 놀기도 했다.

그녀는 동행하는 호위들과 승마 실력이 비슷했다. 딱히 운동신경이 좋은 건 아니지만 취미로 꾸준히 연습한 덕이었다. 전력 질주하자 개중 몇 명은 에디스보다 뒤처졌다.

항구는 분주했다. 라그란드 제국에서 가장 많은 배가 오가는 항구였다.

그만큼 유동 인구도 많았다. 바닷가를 따라 차려진 상점가는 손님으로 북적였고 커다란 창고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이어졌다.

그녀는 항구 관리소로 직행했다.

관리소장을 불러 어제 입항한 그레이브즈 가의 배에 관해 물었다. 관리소장은 며칠 전부터 황궁에서 내려온 지시를 따르던 참이었다.

“그레이브즈의 배는 지금 동향이 어떤가?”

“별 움직임 없이 잠잠합니다.”

“경찰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배 근처에 세 명을 배치해 놨습니다.”

세 명이라니. 기겁할 노릇이었다. 선원들이 무력 행사를 하고 있으니 이쪽에서도 머릿수를 채워야 했다.

“왜 이리 대처가 늦어지는지 모르겠군.”

“늦은 건 아닌 듯합니다. 지원 요청을 오늘 아침에 했으니까, 인원을 모으고 여기까지 이동하고…… 그러면 내일이면 오겠군요.”

“내일?”

“예, 최우선으로 다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에디스는 입을 동그랗게 벌리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현대의 빠른 속도에 익숙하게 살아오다가 이 세계에 넘어왔을 때도 갑자기 느려진 삶의 속도에 당황했었다. 아카데미의 아날로그식 수업 방식에 자주 속이 터졌다.

이젠 제법 익숙해진 느낌이었건만 여기서 또 충격을 받았다. 진작 황태자의 명이 내려진 상태인데도 내일 도착할 거라니.

이 세계에서는 빡세게 일하는 황태자 궁 인력과, 보고받은 자리에서 즉시 결정을 내리곤 하는 클라이드가 비정상이었다. 오로지 그 환경만이 바쁘게 하루를 살곤 했다.

“하긴 여기는 관공서였지. 그것도 지방의 관공서.”

투덜투덜 혼잣말했더니 관리소장이 못 알아듣고 제 머리를 긁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아닐세. 내가 협조 요청서를 다시 써서 줄 테니 서둘러 달라고 꼭 좀 전하게.”

영지의 주인으로서 처음 쓰는 공문서였다. 이 지역의 경찰력은 도둑 잡는 데만도 어려움을 겪을 만큼 빈약해서 반드시 수도 경시청의 지원을 받아야 했다.

군대에는 손을 벌릴 수가 없었다. 귀족파의 반란 움직임에 주목하며 항시 대기해야 했다.

에디스는 선착장이 내다보이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황궁에 보고하러 다녀온 닉슨을 대신해 타와누카가 배를 감시하고 있었다. 빈 나무상자에 걸터앉아 해안을 바라보다가 에디스가 오자 넙죽 고개를 숙였다. 주변에 아무도 없이 타와누카 혼자였다.

“타와누카, 수고하는군. 경찰은 어디에 갔지?”

“잠시 쉰다고 하고 사라졌습니다.”

“언제 갔는데?”

“아침 먹기 전에요.”

벌써 오후로 넘어가는 시각을 확인하자 에디스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닉슨과 타와누카가 교대하자마자 타와누카에게만 감시 임무가 떠맡겨진 모양이었다. 그가 자유민이라고는 하나 혼혈의 외모를 가져서 경찰에게 만만히 보였나 보다.

그녀는 한숨을 푹 쉬며 타와누카의 옆에 걸터앉았다.

기껏 서둘러 왔더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쓸 수 있는 인력이라곤 닉슨, 타와누카, 호위 세 명이 전부였다. 그레이브즈 상회의 선장은 윗사람 데려오라고 큰소리쳤다던데, 윗사람인 자신이 급히 달려왔지만 정작 손발이 되어 줄 사람이 부족했다.

허탕 치는 분위기를 느껴도 이대로 돌아가기엔 아쉬움이 남았다. 혹시나 오늘 내로 넉넉한 수의 경찰이 도착한다면 그녀가 보는 앞에서 배를 수색할 수도 있었다.

“우리가 뒤져야 할 게 어느 함선이지?”

“바로 앞의 제일 큰 배입니다.”

“나란히 선 두 척이 비슷하게 생겼는데.”

“왼쪽 배입니다. 오른쪽도 그레이브즈 함선이라서 비슷해 보이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두 척의 함선 깃대 같은 깃발이 걸려 있었다. 검은 바탕에 덩굴 문양이 확연히 눈에 띄었다. 항구에 정박한 함선 중 제일 큰 두 척이 페이튼의 소유라니. 확실히 부자는 부자다.

“오른쪽 배는 언제 입항한 거래?”

“그건 듣지 못했지만, 지켜보니까 화물을 계속 싣던데요. 출항할 날짜가 얼마 안 남은 것 같습니다.”

“말끔하게 정비한 걸 보면 그렇긴 하겠네.”

갈매기들이 정신 사납게 하늘을 날아다녔다. 에디스의 주위로 경계심 없이 다가와 까만 눈을 번들거렸다.

저만치 먼 배의 난간에도 갈매기가 줄지어 앉아 있었다.

난간에 걸쳐 밧줄 사다리가 길게 늘어졌다. 승하선할 때 쓰는 사다리인 듯한데 안전을 위해 그물처럼 폭이 넓은 형태였다.

“곧 선원이 올라가려나 보네. 저기에 사다리를 설치한 걸 보면.”

타와누카가 별생각 없이 대꾸했다.

“항구에서 배에 들락거릴 때는 사다리를 쓰지 않을 텐데요.”

“그게 무슨 소리야.”

“제가 노예로 끌려올 때는 판자로 만든 경사로로 내려왔습니다. 항구에 비치되어 있는 설비 같았습니다.”

“그럼 그물 사다리는?”

“글쎄요. 아마도 임시용이 아닐까요? 항구가 아닌 곳에 내릴 때 쓰는 용도겠지요.”

잘 모르는 듯 애매한 말투였다.

에디스는 기다리는 것밖에 할 일도 없던 차에 주변에 정박한 다른 배도 관찰했다.

띄엄띄엄하게 떨어진 건너편 함선에는 분명히 튼튼하게 만든 보행용 경사로가 설치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배가 그런 모습이었다.

다시 보니 경사로가 붙지 않은 페이튼의 배가 왠지 모르게 거슬렸다.

절반쯤 올려진 밧줄 사다리가 선착장에 향해 있지 않았다. 사다리로 승하선한다고 해도 저기에서 내려오면 바다로 곧장 빠질 위치였다.

“타와누카, 저 사다리 좀 이상하지 않아?”

“어떻게요?”

“왜 저런 엉뚱한 위치에 드리워져 있을까? 바다에 빠지라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렇군요. 많이 이상하네요.”

께름칙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뭘까? 어떤 점이 이상하지?

그때 에디스의 일행 쪽으로 한 무리의 사내들이 다가왔다. 먼저 나서는 자는 챙이 넓은 모자를 썼다. 햇볕에 바래고 손때가 많이 묻은 모자였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저 앞에 있는 배의 선장입니다. 케츠모리스 공작님 맞으시지요?”

사내가 과장된 포즈로 팔을 접어 인사를 올렸다.

“선장이었군. 그렇지 않아도 배 얘기는 들었네.”

“항구 관리사무소에서 느닷없이 배를 수색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저희도 무척 난감했습니다.”

“황명으로 이루어진 일일세. 따라 주길 바라.”

“하지만 저희는 세금도 꼬박꼬박 내는 사람들입니다. 공무원입네 경찰입네 하면서 무턱대고 덤비는데 깡패 새끼가 따로 없었습니다. 저희는 피해자입니다요.”

선장의 입이 꽤 거칠었다. 뱃사람에게 정중한 태도를 바라는 건 아니라 그녀는 한 귀로 흘렸다.

“머지않아 정식 영장이 도착할 걸세. 그때는 협조해야 할 거야.”

선장은 에디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싶었던지 제 딴에 신경 써서 굽신거렸다. 손바닥을 비비면서 괴상한 얼굴로 웃었다.

뒤에 따르는 자들은 누가 봐도 선원이었다. 우락부락한 덩치들이 큰 짐보따리라든가 그물을 들고 있었다. 아마 어제저녁에 하선한 자들이겠지. 대략 열 명쯤 되는 숫자가 그녀의 일행을 둘러싼 바람에 위협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공작님 말씀이 정 그러시다면, 지금 한번 배를 보시겠습니까?”

“지금?”

“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요.”

“하지만 지금은 나를 도와 일할 사람들이 오지 않았네. 자네는 대기하고 있다가 나중에.”

“당장 가야 한다니까.”

“……?”

다음 순간, 에디스 뒤쪽의 누군가가 목덜미를 무자비하게 낚아챘다.

숨이 턱 막혔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벌렁 나자빠졌다. 하늘과 땅이 거꾸로 뒤집혔다. 시커먼 사내들이 그녀의 몸뚱이를 장난감 갖고 놀듯이 이리저리 뒤집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자신의 몸이 선원들의 거친 손놀림에 이리저리 거칠게 부딪쳤다.

뭉툭한 타격음은 다른 데서도 들려왔다. 어지러운 시야의 끄트머리에 그녀의 호위와 수행원이 살벌하게 퍽, 퍽 얻어맞는 장면이 펼쳐졌다. 저항은 오래가지 못했다. 에디스 일행은 두 배수가 넘는 선원의 급작스러운 공격에 힘없이 무너져 갔다.

입에 재갈이 물린 후 큰 자루에 갇혔다.

주변 상황을 살핀 마지막 순간, 그녀는 범죄 현장을 목격하는 행인을 발견했다. 하지만 선원들을 말리려 드는 이는 없었다. 대형 선박이 세워진 선착장은 넓디넓었고, 아무리 번화한 항구라지만 여기까지 사람이 북적이지는 않았다.

자루째 들린 에디스는 어딘가로 옮겨졌다. 가까이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허튼짓하지 말고 빨리 걸어.”

수행원들을 죽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에디스와 함께 끌고 가는 듯했다.

실력 좋은 황실 근위병 셋이 호위 역할을 하니 어쩌면 탈출 기회가 있으려나. 잠시나마 기대를 했지만, 그녀를 둘러멘 남자의 걸음이 멈출 때까지 전혀 반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페이튼의 배 선장과 선원들은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잠시 후 에디스는 자신이 갇힌 자루가 그물에 감싸이는 느낌을 받았다.

몸이 조이고 공중에 붕 떴다.

그네 타듯이 그물이 좌우로 흔들리고 허공의 바람도 느껴졌다.

‘여기는 어디일까? 나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 걸까?’

마차나 짐수레를 타고 이동한다면 이 근방의 어딘가에 가둬 두겠지. 하지만 그물로 끌어올려지는 상황은 최악이었다.

지독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일말의 예감이 실제가 될 것 같아서 두려웠다.

“읏차, 받았어.”

낯선 사내의 음성과 함께 에디스의 자루가 나무 바닥에 내려졌다.

주저앉은 엉덩이 아래가 일정한 속도로 출렁거렸다.

정황상 여기가 어딘지 알 것 같았지만, 설마 아니겠지 싶은 심정을 버리지 못했다. 하필 이런 곳에 저를 끌고 오는 이유가 걱정됐다. 흔들흔들 움직이는 바닥의 낯선 감각이 불안을 부추겼다.

자루의 입구가 열렸다.

저를 빙 둘러선 사내들이 장벽과 같았다. 굵직한 다리 너머로 항구의 전경이 내려다보였다.

역시 여기는 함선 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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