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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88)화 (88/129)

88화

무게가 만만치 않을 게 분명했다. 황태자의 방으로 들어오는 저녁 디저트는 실로 악마의 음식이 아닐까 싶을 만큼 입맛에 딱 맞았다. 아침마다 운동해도 살이 빠지지 않는 이유는 요리사가 메인 요리보다 더 심혈을 기울여 만드는 디저트 탓이었다.

하지만 몸무게 걱정이 무색하리만치 클라이드가 가뿐하게 걸음을 옮겼다. 깊이 팬 눈매를 휘어 웃는 얼굴에 만족감이 배어났다.

“그건 곤란해. 에디스가 노력한댔으니까, 나는 더 많이 노력할 셈이거든.”

“무슨……?”

“무슨 노력인지 알고 싶어? 실천에 옮기기 전에 말로 설명부터 해 줄까?”

알 거 다 아는 나이에 모를 리가 있나. 노력을 넘어서서 노오오력을 강조하는 그의 저의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소설과 대중매체에서 이미 마르고 닳도록 노력 실천의 현장을 접해 온 에디스는 구태여 클라이드의 입으로 포부를 밝히는 짓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뇨! 안 들어도 알 것 같아요.”

쿠쿡, 터지는 웃음이 음험하게 들렸다. 맨날 듣는 똑같은 웃음인데 왜 이번만 야한 상상력을 발휘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바로 본경기에 들어가자는 뜻이군.”

보, 본경기라면…… 바로 그것이다!

“아니요, 그것도 아니고.”

“나도 급해. 한시가 아까워서 말이지.”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아니, 솔직히 준비가 되긴 했지만 조금 더 준비하면 좋을 것 같은데.

하지만 시간을 더 가져도 매한가지로 긴장될 것 같았다. ‘그냥 확 질러 버릴까.’ 하는 대담함과 ‘어쩌면 좋지.’ 하는 난감함이 어우러진 채, 그녀는 하염없이 클라이드의 목덜미를 꼼지락꼼지락 만져 댔다.

“일단 내려 주고 얘기하면 안 될까요?”

클라이드는 제 보폭으로 몇 걸음 되지도 않는 별실과 침실 사이를 지나 침대 앞에 선 지 오래였다.

등과 무릎 뒤를 받친 팔뚝이 안정적이었다. 불안한 건 에디스의 마음뿐이었다. 그녀는 누가 뭐라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안절부절못하면서, 무게를 분산하려고 그의 목덜미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클라이드는 그녀를 안은 팔을 접어 올렸다. 부드럽게 풀어진 입매와 오메가 페로몬에 취해 한껏 풀린 눈이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한껏 에디스를 끌어 올린 후, 드러난 목선에 그의 얼굴을 비볐다.

“내려 주기 싫지만, 다음 단계로 가려면 내려야겠지.”

당황해서 굳어진 그녀의 몸을 애지중지 돌보며 침대 위에 살짝 내려놨다. 매트리스의 진동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행동이었다.

안아 들고 있던 자세 그대로 길게 눕혔다. 에디스가 뒤척일 틈을 주지 않고 그 역시 곧바로 옆자리에 올라왔다.

에디스는 온몸에 알파 페로몬이 덕지덕지 발라지는 기분이었다. 짐승 같은 남자에게 푹 절어서 시야가 흐려질 정도였다. 감각은 예민해지고 아련히 풀린 동공은 클라이드로 가득 찼다.

원색의 의미를 품은 속삭임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에디스에게 제일 효과적으로 인력을 발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중이야.”

육신을 한데 얽고 깊은 관계를 나누는 것만큼 강한 인력이 또 있을까. 그가 떠올리는 고민을 에디스도 밤의 향연처럼 떠올렸다.

“몸을 쓰는 건 당연하겠고. 에디스의 몸을 쓰는 것도 물론이겠고.”

이어지는 속삭임이 짜릿한 충동을 안겼다. 그에게 한껏 휘둘리고, 저도 그에게 마음껏 요구하겠지.

그녀는 무척 마음에 드는 와중에도 마지막 남은 이성을 끌어모아 점잔을 떨어 봤다.

“내 몸을 왜 클라이드가 써요?”

“에디스도 날 맘껏 사용해. 기꺼이 응해 줄 테니까.”

“그 뜻이 아니잖아요.”

“구체적인 방식은 여러 가지 실험을 해 보면 좋겠어. 에디스가 뭘 좋아하는지 골고루 알아보고 싶어.”

더는 받아칠 수가 없었다. 클라이드가 공언했던 대로 곧바로 실행에 옮기기 시작해서였다.

몸을 포갠 둘 사이에 상상했던 것 이상의 사건이 일어났다.

그녀를 휘감은 남자는 깜짝 놀랄 만큼 동물적인 모습을 띤 채 지독히 아름다운 선을 이루어 냈다.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잠시나마 머물렀지만, 에디스를 바라보며 찬탄하는 그의 눈빛에 매몰되고 말았다.

그와 엇갈리는 길목마다 환상적인 이벤트가 벌어졌다.

살갑게 인사할 때 클라이드는 무척이나 친절했다. 이상하게도 그녀보다 뜨끈하게 느껴지는 체온이 첫 만남의 기분을 훈훈하게 했다.

반대로 다툼을 벌일 때는 성을 내고 몰아세우듯이 강하게 툭탁거렸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뻗대며 대들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대를 공격했다.

어느 순간 그녀의 치뜬 눈에 하얀 안개가 번졌다. 자그마한 턱이 저절로 팽팽하게 세워졌다.

그녀는 몰아닥치는 알파 페로몬에 취한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날 봐, 에디스.”

겨우겨우 눈꺼풀을 들어 클라이드와 눈 맞춤했다. 약동하는 그를 마주하니 흥분이 배가됐다.

“클라이드, 페로, 하…… 페로몬이 너무 진해요.”

“에디스가 내 것이라고, 내가 네 것이라고……. 우리가 풍기는 향기만으로도 모든 이가 알 수 있게 만들 거야.”

머지않아 에디스는 알파 페로몬을 의식하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온 침실에 그들의 향이 뒤엉켜서 촉각이고 냄새고 완전히 융화해 버렸다.

에디스는 그의 인력에 무력하게 끌려 들어갔다. 대우주의 인력보다 그가 우세할까 하는 비교는 하지 않았다. 함께하는 순간, 그녀를 이끄는 클라이드의 힘은 절대적이었다.

그의 안에서 별이 반짝였다. 두 세계의 별만큼이나 에디스와 클라이드의 별은 화려한 불꽃을 틔웠다.

“사랑해.”

두 별이 운명으로 만나듯이, 그의 고백은 오롯하고 정직했다.

* * *

클라이드는 정말 끈끈이처럼 딱 붙어 있었다. 화장실 가는 시간만 빼고 그는 에디스의 반경 5미터 내를 떠나지 않았다.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 요즘엔 각자 이리 뛰고 저리 뛰곤 했는데, 다시 2인 1조의 생활로 돌아왔다.

또한, 더이상은 로맨스 소설을 뒤적거리지 않게 되었다.

나중에 한가해지면 에디스 전용 도서관을 취미 생활에 이용할 셈이지만, 한창 바쁜 요즘에 구태여 들를 필요성은 사라졌다. 알아야 할 것은 점성술사를 통해 거의 알았으니 이제부턴 실행에 옮겨야 했다.

황태자의 집무실에서 에디스의 위치도 바뀌었다. 원래 시종은 서 있어야 하고 집기류도 들일 수 없다. 하지만 그녀의 또 다른 책상이 마련되어 클라이드의 책상에 나란히 놓였다.

클라이드는 귀족파의 움직임을 최우선으로 챙겼다. 개인적으로 고용한 정보원이 자주 집무실에 들렀다.

“디트리안 백작이 체르헨에서 돌아왔다고? 정황이 어떤지 자세히 보고하게.”

보고받는 분위기는 무겁고 진지했다. 확실히 믿을만한 사람만 남겨 둔 집무실에서, 외유를 빙자해 이웃 나라에 군사 요청을 하고 온 백작의 동태를 전해 들었다.

에디스의 자리에서는 황태자의 업무에 방해되지 않을 만큼 나직한 목소리로 다른 대화가 오갔다.

“드디어 페이튼의 배가 들어왔단 말이지?”

불법 노예 문제를 전담한 에디스가 닉슨과 소곤거리며 상황을 파악했다.

“예, 항구에 닻을 내린 건 어젯밤이고 지금 막 입항 신고를 하는 걸 보고 왔습니다.”

“경찰은 넉넉한가?”

“여태까지는 몇 명 없었습니다만, 황명을 담은 공문서를 경시청에 보냈으니 곧 증원될 겁니다.”

닉슨이 곧이어 약간 곤란한 표정으로 얘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어젯밤에 약간의 충돌이 있었습니다.”

“어떤?”

“배가 들어오자마자 제가 경찰과 함께 배를 수색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저지당했습니다. 선장이 강하게 수색을 거부하고 선원들은 몸으로 막더라고요.”

“아무리 우리 쪽 인원수가 적다고 해도 명색이 경찰인데 어떻게 그러지? 놈들 배짱이 대단하군.”

“영장 보여 달라고, 아니면 윗사람이라도 데려오라고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우리가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디스는 펜으로 턱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어수룩한 성격의 닉슨이 꽤 부족하게 대처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근거도 없이 배를 수색하려고 들면 놈들이 순순히 응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몸싸움도 불사했다는 점은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그게 단순히 선원들의 폭력적인 성향 탓이면 그나마 낫겠지만, 페이튼이 지시했기 때문이라면 문제가 커진다.

귀족파가 공권력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에디스가 현 상황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내가 뱃사람들 생리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배가 항구에 들어오면 선원들이 우르르 내려오나?”

“차례차례 하선해서 당일에 거의 다 귀가하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그 배는 비어 있다는 뜻인가? 숨겨 둔 노예들은 어떡하고?”

“노예를 통제할 최소한의 선원만 남겨 두지 않았을까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닉슨이 항구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감시했으니 아마 정확한 보고일 것이다. 그 많은 인원을 하선시키려면 그가 먼저 알아챘을 것이다. 수백 명에 달하는 노예는 배 안에 있을 게 분명했다.

전례로 봤을 때 밀수입된 노예는 항구에 오가는 사람이 적은 시간을 빌려 육지를 밟았다. 따라서 며칠 내로 야음을 틈타 줄줄이 사슬에 엮인 노예가 나타날 예정이었다.

“선착장에 내린 노예가 없는 거 확실하지?”

“확실합니다. 제가 밤새 뜬눈으로 감시했습니다.”

“좋아, 그러면……!”

에디스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에 펼쳐 뒀던 중요한 문서를 대충 쓸어 담아 서랍에 넣어 두고 나갈 채비를 했다.

클라이드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봤다.

“어딜 가게?”

“항구에 나가 보려고요.”

“에디스가 직접?”

“배에 선원 몇 명밖에 없다잖아요. 이건 빈집털이나 다름없죠.”

클라이드가 달려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가지 못하게 말리려는 태도가 강경했다.

“경찰에게 맡기면 되잖아. 구태여 에디스가 갈 필요까지 있을까?”

“경찰이 증원된다고 해도 순순히 수색에 응하리라는 보장이 없어요. 우리가 인원을 늘리는 만큼 저쪽에서도 사람을 더 부를지도 모르죠.”

“그래 봤자 항구에서의 사소한 다툼이야.”

“사소하게 정리되면 좋겠지만…….”

그녀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클라이드를 응시했다. 채 맺지 못한 말속에 숨긴 뜻을 그가 눈치채는 듯했다. 침중한 탄식을 흘리며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직 저들이 반란을 일으킬 시기는 오지 않았어.”

“나도 그렇게 예측해요. 디트리안 백작이 이제 막 귀국했다면, 체르헨 군대가 우리나라를 침략하기에 시일이 좀 더 필요하겠죠. 그러니 공연히 불씨를 댕길 필요는 없어요. 되도록 조용히 노예를 넘겨받고 마무리하는 편이 나아요.”

“정 그렇다면 나와 같이 가. 이따가 오후쯤에 시간이 될 것 같으니까 그때 가자.”

에디스는 클라이드의 손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아무래도 떨어져 있기 싫은 이유가 큰 듯했다. 아까만 해도 드레스룸까지 따라오려는 그를 겨우 말렸다.

“걱정하지 말아요. 나서지 않고 멀리에서 지시만 내릴게요.”

한동안 실랑이한 끝에 겨우 클라이드의 손을 떼어 낼 수 있었다.

나중에 그가 합류할 때까지 몸조심하라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잔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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