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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87)화 (87/129)

87화

두 사람은 점성술사를 만나고 새벽쯤에야 환궁할 수 있었다.

궁에 들자마자 클라이드가 내일 일정을 취소시켰다. 그러면서 귀족파의 동향과 관련해 급한 일이 있으면 침실로 곧장 가져오라는 말을 덧붙였다. 아무리 에디스의 상황이 심각해도 내란 문제는 중점적으로 다뤄야 했다.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는 동안 에디스는 묵묵히 궁인의 시중을 받았다. 피곤한 것도 느끼지 못했다. 목욕통에 몸을 담그니 노곤해지긴 했지만, 생각이 많아서인지 졸음이 오진 않았다.

황태자의 침실에 들자 익숙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클라이드의 알파 페로몬이었다.

“어서 와. 오늘 힘들었지?”

살갑게 맞이하는 그의 태도는 여느 때와 똑같았다.

“왜 페로몬을 푼 거예요?”

“페로몬으로 유혹할 수 있다면, 이런 행위도 너를 나한테 끌어들이는 힘일 테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점성술사에게 에디스의 오메가 기질에 관해 물어본 것도 있었다. 원래는 베타였는데 영혼이 바뀌고 나서 오메가가 된 것 같다고.

해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육체 안에 깃든 영혼이 다르면, 육체도 그에 따라 변화하게 마련이라는 원리였다. 대신에 영혼은 몸에 급격한 영향력을 끼치지 않는 탓에, 바뀐 시점에 달라지지 않고 4년여에 걸쳐 서서히 오메가로 탈바꿈한 듯했다.

그녀는 꾐에 넘어가듯이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피톤치드 같은 알파 페로몬이 전신을 사로잡는 느낌이었다.

“에디스도 해 줘.”

방금 말린 긴 머리칼을 클라이드가 손가락에 감았다.

“오메가 페로몬을 풀어 봐. 양껏 많이 풀수록 좋아. 나도 그럴 테니.”

“그러다가 우리가 이성을 잃으면요?”

“이젠 이성을 내려놔야 할 때야. 감정이 이끄는 대로 널 안고 싶어.”

말로는 클라이드가 안고 싶다고 하면서도 행동은 그녀가 그를 덮치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에디스는 몽롱해지는 기분에 못 이겨 그에게 기대 버렸다.

페로몬이 없었다고 해도 이 상황을 수용했을 것이다. 에디스는 이제 인정하고 있었다. 현실 세계로 돌아가지 않고 클라이드의 곁에 남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서지우의 세계는 이미 몇 년이나 지나 아득해졌다. 거긴 바뀐 영혼이 잘 해내겠지. 가끔 부모님이 보고 싶긴 하지만 향수에 연연해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접하고 얻어 온 인생 모든 것을 통틀어도 클라이드 한 사람만 못했다.

다른 건 다 내려놓고 이 남자만 갖고 싶었다.

순순히 클라이드의 의도를 따랐다. 감정이 이끄는 대로 그의 늘씬한 근육질 허리에 손을 얹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기회만 된다면 에디스가 앞장서서 그를 침대에 눕힐 수도 있었다.

호응하듯이 그가 에디스를 감쌌다. 눈썹 끝에 보드라운 입술이 닿았다.

“잠깐 이쪽으로 와 볼래?”

그가 에디스의 어깨를 둘러 안고 별실로 옮겨갔다.

초상화 뒤에 숨겨진 비밀 금고를 열더니 뭔가를 찾았다. 에디스가 흘끗 보니, 금고 안은 지난번에 그녀가 열었을 때와 달라져 있었다. 빈자리가 없을 만큼 보석함이 부쩍 늘어났다.

클라이드는 그중에서 제일 작은 보석함을 꺼냈다.

아주 진지한 얼굴로 뚜껑을 조금 열어 본 후, 안의 내용물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고는 상자의 방향을 돌렸다. 두 손으로 받쳐 에디스의 앞에 고이 내밀었다.

“청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서…….”

늘 당당하고 거침이 없던 그가 조금 떨고 있었다.

“많이 고민했어. 내 황후가 되어 달라는 말은 너무 멋대가리 없을 것 같았거든.”

에디스는 멍하니 선 채 표정 관리를 못 했다.

그는 몰라서 고민했다고 하지만, 이 상황을 모르기는 에디스도 마찬가지였다. 청혼받는 걸 대체 어떻게 하는지 알 리가 있나. 하얗게 긴장한 얼굴이 인형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여러 가지 떠올려 봤는데, 무슨 얘기를 해도 마음을 고스란히 전하지는 못하겠더라. 그래서 결국 포기하고…… 이렇게…….”

그는 눈짓으로 보석함 속을 가리키며 에디스가 받아 들 때까지 기다렸다.

“세속적인 물건으로 대신할까 해.”

준비된 것은 목걸이였다.

섬세한 세공이 들어간 황금 체인에 제법 큼직한 로켓이 달려 있었다. 청혼 반지나 액세서리 풀세트같이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녀가 체인 목걸이를 들고 난감해하자 클라이드가 대신 나서서 로켓을 조작했다. 손가락 두 개만 한 굵기의 원반형 로켓 뚜껑을 열자 반지가 나왔다.

클라이드의 인장 반지였다. 제국의 상징인 두 마리의 황금 사자가 새겨진 반지는 황명을 갈음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로켓 반대쪽의 뚜껑을 열자 클라이드의 자필 서명 인증서도 있었다. 돌돌 말린 포스트잇 크기의 종이에 에디스를 인장의 사용자로 인정한다는 내용이 깨알만 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이걸 왜 내게.”

로켓을 원래대로 닫은 후 그가 에디스에게 목걸이를 걸어 줬다. 차르르 떨어지는 황금 체인의 감촉이 묵직했다.

“총사 대회를 겪으면서 진작 준비했던 거야. 그때 내가 에디스에게 메시지를 전달했잖아. 내 인장을 너에게 맡긴다고.”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물건을 목걸이로 만들다니요.”

“반지가 너무 크고 무거워서 에디스의 손가락에는 어울리지 않겠더라. 이건 네 거니까 필요할 때마다 편히 써.”

“그래도 어떻게…….”

“황제의 업무를 대리하는 황후는 흔하디흔해. 황제에게 변고가 없어도 단순히 협력 차원에서 돕는 황후도 많지. 그렇게 수월히 받아들여 주면 좋겠어.”

귀한 보석을 수백 개 박은 목걸이보다는 가볍지만 로켓 목걸이의 막중한 무게가 절실히 와닿았다. 감히 보석에 견줄 수 없을 만큼 큰 선물이었다.

클라이드는 황제로서 그녀를 황후로 맞이하고 싶다고 청혼하고 있었다.

잔뜩 부담감을 느낀 에디스가 로켓을 연신 만지작거렸다. 그러면서도 목걸이를 풀어 내려놓지 않자, 그는 안도했다는 듯이 미간에 힘을 조금 풀었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에디스의 뺨을 덮었다.

알파 향기가 그의 피부에서 훅 끼쳤다. 잠시나마 황제였던 그가 이성으로서 성큼 존재감을 드러냈다.

“점성술사는 우리가 서로 인력을 만들어야 한댔지.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겠지만, 에디스는 어떨지 모르겠어.”

그의 손길이 자석 같았다. 만져지는 대로 에디스의 얼굴이 움직이고, 반듯한 입술이 내려오는 대로 그녀의 턱도 각도를 올렸다.

“부디 나와 함께 있어 줘.”

진한 입맞춤이 대답을 갈구했다.

“이 세계를 떠나지 않으려고 힘써 줘. 내가 널 홀리듯이, 너도 나를 유혹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 클라이드를 유혹……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지금도 아주 강력한 페로몬 공격을 퍼붓는 중인걸.”

간절한 키스가 입가를 지나 그녀의 귓불에 머물렀다. 여리게 살 비비는 소리가 청각을 자극했다.

오메가 페로몬이 많이 나오는 목덜미에 그가 무너지듯이 입술을 뭉갰다.

“우리 미래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아. 절대 놓을 수 없으니.”

고개를 든 클라이드의 눈빛이 술에 취한 듯 잔뜩 풀려 있었다. 페로몬에 절어 넋이 빠진 모습이었다.

그는 거의 한계였다.

맞닿은 부위마다 범상치 않은 열기가 느껴졌다. 병에 걸린 듯 후끈후끈한 상태로 몸을 그녀에게 기울였다.

휘청이는 건 에디스도 마찬가지였다.

서로에게 취하고 의지하는 순간, 클라이드의 애절한 음성이 꿈결처럼 아련하게 들렸다.

“에디스 제발……. 가지 말고 내 옆에 살아.”

이제 막 마음을 열었을 뿐이지만 그녀가 깨달은 자신의 욕심은 짐작보다 훨씬 컸다. 단순히 사귀는 사이에 그치지 않고 클라이드의 반려가 되고픈 의욕이 생겼다.

어느새 제 마음이 이렇게나 선명해졌던가. 열렬히 사랑하고 애정을 나누며, 마음과 함께 몸도 완전히 하나가 될 기대에 부풀었다.

클라이드와 헤어지기 싫었다. 자신에게 별보다 강한 인력으로 그를 끌어들일 힘이 있다면, 부디 그렇게 하고 싶었다.

쌍방향의 관계를 지속해도 될락 말락이었다. 클라이드는 알아서 최선을 다할 테니, 관건은 에디스 자신이었다.

사실 헤어짐에 후회가 없기 위해 벌이는 일에 가까웠다. 두 별이 멀어지기까지는 대략 2년이 남았다고 했다. 그때까지 죽을힘을 다해 사랑할 일만 남았다.

“노력할게요.”

이게 저로서는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환희와 감격에 겨워하지 못하는 못돼 처먹은 인성이다. 청혼받아서 행복한 만큼 절망도 불어났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그래도 그는 마냥 좋단다. 야하게 좁혀진 눈매 사이로 황금안이 은근한 빛을 뿜었다.

“정말요. 오래도록 에디스로 있을 수 있도록 열심히 할게요.”

“다행이다……. 고마워, 에디스.”

황태자, 아니 실제로는 황제이면서 그녀에게만은 한없는 을의 모습을 보여 줬다.

대단한 애정 표현을 하지도 않았고 고작해야 노력하겠다고만 답했는데, 너무 기뻐하는 그의 반응을 보니 자신이 도리어 미안했다. 이제 와 벽을 쳐서 무슨 의미가 있으랴. 앞으로는 일부러라도 솔직할 필요가 있었다.

에디스는 입술을 말아 물고 잠시 머뭇거렸다.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좋아하니까요.”

“뭐?”

클라이드는 제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클라이드가 좋아서……. 당신을 유혹하고 싶어요. 이렇게.”

그의 목둘레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셔츠 틈이 벌어지자 그곳으로 고개를 숙였다. 넓은 가슴에 숨은 에디스의 얼굴이 푹 익어 버렸다.

“하.”

급히 들이쉬는 숨결과 함께 두툼한 흉통이 한층 부풀었다.

“별 이야기, 영혼의 엇갈림, 제국과 황실……. 그런 거 말고 당신하고 나만 놓고 하는 말이에요.”

“믿어지지 않는군. 나 지금, 페로몬에 취해 환청을 듣는 건가.”

“용기를 내서 더 많이 좋아해 보려고 해요. 자신은 없지만,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클라이드를 끌어들일 힘을 만들어 볼 거예요.”

그녀는 그의 날렵하게 선이 드러난 빗장뼈에 키스했다.

클라이드의 몸이 휘청 흔들렸다. 목 안으로 짐승의 울음처럼 끓는 소리가 들렸다. 옷 틈으로 입을 맞추는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이해한 탓이었다.

* * *

에디스의 겨드랑이 사이로 탄탄한 팔뚝이 끼어 몸이 번쩍 들렸다. 발끝이 붕 떴다. 그녀는 지탱할 곳을 찾아 클라이드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가 다른 팔뚝으로 에디스의 무릎 뒤를 받쳐 올리자, 쉽사리 안아 들리게 되었다. 의도치 않은 자세가 제법 안정적이라서 흡사 간이침대에 다리를 구부리고 누운 기분이었다.

“앗, 내려 줘요.”

에디스는 당황해서 발을 동동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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