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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86)화 (86/129)

86화

진실의 한복판에 온 듯했다. 담담하게 계속되는 점성술사의 얘기는 점 보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전해 주는 느낌이었다.

“별이 이끄는 무형의 힘에 따라 공작님은 서지우라는 분과 뒤바뀌게 된 겁니다.”

“나……. 서지우의 몸으로 잠깐 돌아간 적이 있었어.”

“그것도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별들 사이의 인력이 아직 강하거든요.”

“그럼 또 그런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는 뜻인가?”

술사가 말로 대답하기 전에 고개부터 끄덕이자, 내내 잠자코 듣고만 있던 클라이드가 성큼 나섰다.

“공작이 가지 않을 방법을 말하라.”

다급한 말투를 듣고 술사가 조금 놀랐다.

“가지 않을 방법이 있을 것 아닌가. 우리는 그걸 알아내기 위해 너를 찾았다.”

“그건…….”

“공작이 귀인이라면서. 그럼 이곳에서 중요한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보내지 말아야 하는 거잖아.”

웬일인지 점성술사가 답변하지 않았다. 느리게 주절거리던 말을 멈추며 입가에 긴 주름을 잡았다.

클라이드가 아직 맞잡고 있는 에디스와 노인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에디스는 이제 잡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점성술사에게 물었다.

“이제 손을 떼도 될까?”

“예, 기운은 다 읽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오신 남자분도 굉장한 분이신가 봅니다.”

“물론 굉장하지.”

“공작님과 함께 이분을 읽어 봐도 되겠습니까?”

“궁합을 보려는 건가?”

“부부의 연이 궁금하시다면 그것도 읽어 보겠습니다.”

클라이드와 에디스가 굳게 맞잡은 손 위로 노인의 손이 얹혔다. 기운을 느끼기 전에 클라이드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거듭 물었다.

“궁합도 알고 싶지만, 더 급한 건 에디스가 이곳에 살게 하는 일이네. 그건 왜 대답하지 않는 건가?”

“…….”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점성술사가 수정구를 별에 비췄다. 이번에는 클라이드도 반짝이는 별의 흐름을 볼 수 있었다.

구슬 속의 빛이 사라지자 술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 분은 거대한 운명을 함께하시는군요.”

“그런가? 함께한다는 건 좋은 의미지?”

점성술사는 묻는 말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긴 침묵 뒤에 뜻밖의 말을 꺼냈다.

“……폐하.”

“흠, 정말 대단한걸. 나를 정확히 맞히다니.”

“몇 년 전 하늘에 이 나라를 지탱하는 옛 별이 지고 신성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신성이라는 뜻인가?”

“예, 맞습니다. 하지만 세간에는 폐하가 연세 많은 분으로 알려져서, 저는 별에서 읽은 진실을 남들에게 말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비밀이네.”

“물론입니다. 절대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점성술사가 수정구를 손에 든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곧이어 클라이드가 궁금해하던 걸 조금씩 풀어내기 시작했다.

“두 분은 더할 수 없이 훌륭한 짝입니다. 특히 폐하께선 공작님이 아니면 일생에 걸쳐 연애운이 전혀 보이지 않으십니다.”

“당연하지. 에디스 외에는 누구도 생각해 본 적 없으니까. 최고의 궁합이라면 우린 아들딸 낳고 잘 살게 되겠지?”

“…….”

“왜 말이 없어.”

“…….”

한숨이 거듭 이어졌다. 느리게 열리는 노인의 입가에 근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별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작님이 이곳에 오신 건, 하늘의 흐름에서 봤을 때 우발적인 상황입니다. 두 별 사이의 인력이 줄어들기 전에 제자리로 돌아갈 가능성이 큽니다.”

클라이드의 얼굴이 파삭 구겨졌다. 잠자코 술사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소매 아래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

“우주는 순리를 좋아하지요. 비뚤어진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그러니 공작님은…….”

“돌려보내지 않을 방법을 물었네.”

“죄송하지만 그런 방법은.”

에디스는 쿵 떨어지는 심장을 느끼며 가늘게 몸을 떨었다.

북받치는 분노를 참지 못하는 클라이드가 돌연 목소리를 키웠다.

“그대는 다 아는 척하면서 정작 중요한 건 왜 모르나. 에디스를 보내지 않을 길을 말해라!”

“저는 별을 읽는 자입니다. 깨달은 만큼 손님들에게 알려 주고 돈을 받지요. 보고 느낀 대로 얘기할 뿐, 정해진 운명을 바꾸는 방법은 모릅니다.”

“안 돼. 그럴 리 없다.”

“저는 거스르고 바꾸는 자가 아닙니다.”

“안 돼……. 안 돼! 뭐라도 대책을 내놓으란 말이다.”

그가 상대의 팔뚝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힘을 이기지 못한 술사가 약간 비틀거렸다. 부스럭거리는 발소리가 스산했다.

격정적으로 클라이드가 술사를 다그칠 동안 에디스는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고 있었다.

비로소 맞이하게 된 진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감내하기가 너무나 벅찼다.

이 얘기가 자신에게 생긴 현상에 관한 제대로 된 분석일 것 같아 더욱 힘겨웠다. 어느 부분을 되새겨 봐도 틀린 구석이 없었다. 반박하기는커녕, 이런 초현상의 원인을 아는 이가 존재한다는 것부터가 대단한 일이었다.

자신은 머지않아 돌아가야 하나. 그 수밖에 없나.

아찔한 기분이 더해졌다.

점성술사는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떨궜다. 탁한 눈을 질끈 감으며 까칠한 목소리를 낮췄다.

“한두 해쯤 남았습니다. 별이 멀어지기까지의 시간이.”

클라이드가 기가 막히다는 듯 대꾸했다.

“하, 그동안 작별 인사나 하라는 뜻?”

“유감입니다. 저도 공작님이 이 땅에 계셔 주길 바라지만…….”

그는 으드득 이를 갈면서 점성술사를 흔들어 댔다. 이 상황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였다.

“돈을 주겠다. 일생 동안 펑펑 써 대도 다 쓰지 못할 만큼 아주 많이.”

“…….”

“성을 한 채 줄까? 뭐든 말만 해. 에디스만 내 곁에 둘 수 있다면 그쯤이야 어렵지 않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뭐든! 말하라 했다!”

클라이드는 절규하고 있었다. 언성을 높여 점성술사에게 대답을 강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역력히 동요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 에디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의 하얀 뺨 가득히 젖어 든 눈물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뺨을 감싼 손길이 경련하고 있었다. 살짝 스치는 손끝은 거대한 산맥만큼 무거운 감흥을 안겨 줬다.

집착적인 습관처럼 그에게 안겼다. 에디스의 귓가에 심장 소리가 들렸다. 늘 안정감을 주던 그의 박동이 이번에는 엉엉 우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가 에디스의 정수리에 턱을 대고 문질렀다. 안 돼. 이럴 순 없어. 작게 중얼거리며 현실을 부정했다.

“폐하, 별의 의지를 한낱 미물인 인간이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푸라기 한 가닥을 던지듯이 술사가 속삭였다.

“하지만 두 세계에 인력이 작용하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끌리는 것이 있지요. 그 힘의 차이는 결코 비할 바가 아니지만, 어쨌든 존재하기는 합니다.”

“사람 사이의 끌림?”

“가능성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지만, 마지막 남은 나날 동안 작은 희망이나마 가져 보시라는 의미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내가 뭘 하면 되나.”

“서로를 이끌어 내야 합니다. 인력을 강하게 만들고 굳게 결속하는 겁니다. 두 분이 함께 힘써야 하는 것이고요.”

“동침하면 도움이 될까? 결혼식은? 아기를 낳는 건?”

“말씀하신 걸 모두 하십시오. 최선을 다하고 나서 보내야 후회가 없지 않겠습니까.”

작은 탄식 소리가 클라이드의 가슴을 통해 그녀에게 들려왔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별과 우주를 어떻게 사람이 이기겠는가. 하도 괴로워하는 클라이드를 보다못해 점성술사가 위로차 꺼낸 방법이 아닐까 싶었다.

음성이 작은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느라 에디스는 소리 죽여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그녀 역시 현실을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이제 막 클라이드를 받아들일 용기를 내던 참인데 헤어져야 한다니.

“왜 하필 나지? 나만 이 세계에 온 이유가 뭘까.”

점성술사는 죄스러운 듯 머뭇거렸다.

“공작님 한 명뿐일 거라고 장담은 못 합니다. 어딘가에 또 영혼이 바뀐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가.”

“물론 극소수인 건 분명합니다. 그중에 하필 공작님이 여기에 계신 까닭은.”

점성술사가 손을 뻗었다.

두 사람을 더듬더듬 만지며 아련한 망상에 잠겼다. 별의 흐름만 볼 수 있는 회색빛의 눈이 느리게 내려갔다.

“순전히 제 짐작이지만, 이곳의 누군가가 공작님을 끌어들이지 않았을까…….”

에디스는 클라이드를 응시했다. 이 세계에서 저에게 인력을 발휘할 만큼 가까운 사람은 이 남자밖에 없었다.

“하지만 클라이드는 처음에 내가 다른 영혼인 거 몰랐어.”

“미리 말씀드렸듯이 짐작일 뿐입니다. 운명은 서로를 깨닫기 전에도 시작되곤 하니까요.”

여전히 찌푸린 미간을 펴지 못한 채 클라이드가 중얼거렸다.

“부디 그 짐작이 맞으면 좋겠군. 그러면 적어도 평범한 사람보다는 에디스를 끌어들이는 힘이 강할 테니.”

그래 봤자 턱없는 인력일 테다. 우주의 순리를 고작해야 두 사람이 바꿀 리가 없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슴만이 제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미래를 거부할 뿐이었다.

사람은 떠나보내고 나서야 빈자리를 깨닫는다고 하던가. 에디스 역시 위기가 닥쳐서야 그의 소중함이 와닿았다. 아직 떠나지 않고 눈앞에 있으면서도 그날이 멀지 않았음에 속이 미어졌다.

클라이드를 향한 제 마음을 인정한 때는 고작해야 지난밤 서지우의 몸에 다녀온 후였다.

시기가 너무 늦었다. 정말 바보같이 한참 늦었어. 외모에만 홀렸다고 믿었던 어리석음이란.

그가 가진 마음속 우물은 여전히 자신의 것보다 깊고 풍부했다. 전해지는 모든 느낌이 크고 선명했다. 그게 인력이라면 제 인력보다 클라이드의 인력이 훨씬 강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상대적으로 비교가 되어서 회피하려 했던 것 같다. 시종직을 그만두겠다고 고집부린 일도 바로 얼마 전이었다. 그를 대하는 에디스의 인력은 대중매체 속 아이돌을 좋아하는 정도라고 생각해 왔으니.

에디스는 훌쩍이면서 입술을 씹고 입 안 벽을 깨물었다.

“입술에 피 나겠다.”

그가 손가락을 그녀의 아랫입술에 가만히 눌렀다.

“예쁜 입술 망가져. 자꾸 씹지 마.”

“클라이드…….”

“괜찮아. 너를 단단히 잡고 있으면 돼. 해석해 보면 인력이란 그거잖아. 끌어들이고, 떨어지지 않도록 붙드는 힘.”

치아 사이에서 톡 튀어나온 입술 위로 클라이드의 친절한 입맞춤이 지나갔다.

“나는 널 놔줄 수 없어. 이 얘기를 백 번쯤 한 것 같은데.”

그가 억지로 표정을 풀었다.

굳은 입가를 무리해서 위로 밀어 올렸다. 괴상한 미소를 띠며 에디스에게 벌겋게 짓무른 눈웃음을 쳤다.

우리의 앞날을 정해진 사실처럼 장담했다.

클라이드는 그녀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우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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