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비슷한 시기에 클라이드는 적의 동태를 살피느라고 바빴다.
귀족파는 이제 라그란드 제국의 기둥이 아니라 적이었다. 숨겨 왔던 발톱을 드러내며 이 나라에 총칼을 들이밀기로 작정한 놈들이었기 때문이다.
에디스는 더 바빴다.
원래 직속 시종은 윗전의 서너 곱절쯤 일이 많게 마련이었다. 황태자가 ‘그 일의 뒤처리는 에디스에게 맡길게.’라고 무심히 한마디를 던지면, 이후의 장황한 업무는 모조리 그녀의 차지였다.
예를 들면 페이튼의 상선 문제가 그랬다.
노예를 잔뜩 태운 배가 들어오면 현장을 적발해야 했다. 시기를 놓치면 그들이 끌려가는 곳을 찾기 어려워질 테고, 노예 시장을 거쳐 사방으로 팔려 나갈 위험이 있었다.
입항할 날짜를 대략 예상하면서 항구에 다수의 경찰이 상주하도록 조치했다. 경찰만으로 험한 선원들을 상대하지 못할 때를 대비해 군대에도 미리 협조 공문을 띄워 놨다.
“닉슨—.”
이젠 황실 근위대의 총사가 된 닉슨은 꽤 번듯한 옷을 입고 에디스의 손발이 되어 뛰어다녔다.
“넵, 공작님.”
“오늘도 항구에 다녀와 줬으면 해. 배가 들어오면 곧바로 나한테 알려.”
“명심하겠습니다.”
그가 총사 모자를 찾아 쓰고 후다닥 뛰어 별실 밖으로 사라졌다.
별실에 외부인이 있을 때는 침실로 이어지는 문을 닫아 두고 복도로 난 문으로 들락거리곤 했다.
“타와누카—.”
“말씀하십시오, 주인님.”
타와누카는 현재 자유민이었다. 노예를 케츠모리스 저택에 둘 수는 없어서 외부에 집을 구해 줬고, 최대한 빨리 신분을 정리했다.
그에게 에디스의 공무를 돕게 한 건 얼마 전부터였다. 궁에 출입할 신분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지렁이 손이라도 빌려야 한다며 클라이드에게 엄살을 떨었다.
“너는 노예 시장에서 거둬들인 노예들을 관리해야 하잖아.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
“명단을 정리하는 중입니다.”
“숫자 파악만 하면 뭐 해. 먹고 자고 싸는 건 해결해 줘야 할 거 아냐.”
“죄, 죄송합니다.”
“현장에 다녀와. 재까닥 뛰어.”
“넵!”
타와누카는 노예 출신이라 같은 노예의 고충을 잘 알았다.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제국 사람에 비하면 확실히 그들을 잘 챙겼다.
요즘 제국에서는 항구 인근에 갈 곳 없는 노예를 모아 둔 채 숙식을 제공하고 있었다. 고향으로 돌려보낼지 이곳에 정착하게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해서였다. 타와누카는 언어 소통도 잘되고 영리해서 특별히 자유민의 신분을 줬지만, 보통 노예는 아무런 지원 없이 방생하듯이 풀어 주면 또 노예 신세로 되돌아갈 수도 있었다.
“이 문제도 서둘러 결정해야 해. 유지비가 만만치 않은 데다가, 페이튼의 배에서 추가로 쏟아져 나올 테니.”
사람들을 죄다 출장 내보내서 중얼거림을 듣는 이가 없었다.
그녀는 결재 서류를 들고 책상에서 일어났다.
지금쯤 클라이드가 어디에 있을까 헤아려 봤다.
24시간 껌처럼 붙어 있던 그는 요즘 들어 어쩔 수 없이 에디스와 따로 움직였다. 귀족파의 독립운동 탓이었다. 그들은 저희 정보가 노출되지 않았다고 굳게 믿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진행 상황의 상당 부분이 클라이드의 귀에 들려오고 있었다.
궁을 한 바퀴 돌면서 클라이드를 찾았다. 그런데 그가 보이지 않았다.
황태자의 행보는 극비라지만 에디스에게는 예외였다. 황태자 직속 근위병에게 묻자 상비군 병영에 잠깐 다니러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바쁜가 보네. 나한테 말도 안 하고 나간 걸 보면.”
나라가 두 쪽 날 위기이니 오죽할까.
하지만 아직 그들의 덜미를 잡지는 못했다. 단번에 숨통을 끊어 놓을 만한 상황과 연출이 필요했다.
* * *
클라이드는 저녁 늦게야 돌아왔다. 찬 바람을 잔뜩 묻히고 온 그는 에디스를 보자마자 기운이 나는지 지쳤던 얼굴을 환하게 폈다.
“에디스, 지금 외출 좀 하자.”
“이 시간에 어딜 가게요?”
“점성술사를 만날 수 있게 됐어.”
“오오, 잘됐네요.”
아무리 일이 바빠도 에디스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 버리면 말짱 헛거다.
냉큼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밤공기의 한기를 막을 망토도 걸쳤다.
방을 나서기 전, 짬을 내어 아까 작성한 결재 서류를 클라이드의 눈앞에 흔들어 댔다.
“이거 빨리 좀 사인해 줘요. 노예를 제국민으로 흡수하는 정책을 만들자는 내용이에요. 경찰이 도시를 단속하면서 찾아내는 노예도 계속 늘고 있고요. 그런데 고향으로 보내는 배를 띄운다고 해도 효과가 미미할 듯해요. 제국의 감시가 없는 곳에서 그들이 또 신대륙 농장으로 끌려가는 사태를 막을 순…….”
“어, 그래.”
“뭐야. 읽지도 않고 사인이에요?”
“에디스 말이 다 맞아. 이제 나가자.”
그는 마지막 장의 빈칸에 황태자의 사인만 채워 놓고 등을 돌렸다. 에디스는 헛웃음이 나왔다.
“너무 날 믿는 거 아니에요? 내가 역적모의하면 클라이드는 홀라당 당하겠네요.”
“황좌가 탐나?”
“네?”
“줄까? 에디스가 황제 하고 내가 대공 하면 딱 맞겠군.”
에디스는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퍽 쳤다. 나란히 걷던 중이라 빗맞았지만, 그가 아파 죽겠다며 엄살떨었다.
지난 며칠간 그는 바쁜 와중에도 점성술사를 구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하여 페이튼의 저택에 심어 놓은 밀정을 움직여 술사를 데리고 나오는 데 성공했다.
에디스와 만날 사람은 다른 점성술사가 아닌 바로 그 술사여야 했다. 허공에 나타난 소설의 내용이 그자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이튼이 찾지 못할 곳에 점성술사가 살 만한 안가를 마련했다. 되도록 별이 잘 보이는 시 외곽을 골랐다.
두 사람이 술사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지난번과 비슷하게 늦은 저녁 시간이었다. 소녀가 냉큼 달려와 고마움의 인사를 했다. 곧이어 인적 없는 들판에서 자그마한 체구의 노인을 만날 수 있었다.
에디스가 술사 앞에 다가갔다.
“봉변을 당했었다지? 몸 건강히 빠져나오게 되어 다행이네.”
“누구십니까?”
“예전에 점을 보러 예약했다가 엇갈린 사람이야. 자네는 나를 모르겠지만, 난 자네를 아주 만나 보고 싶었어.”
허름한 망토를 걸치고 얼굴을 가릴 만큼 후드를 깊이 덮어쓴 술사는 불현듯 고개를 돌렸다. 에디스가 있는 방향을 두리번거리며 인기척을 확인했다.
“혹시 그분이십니까?”
“그분?”
“아주 먼 곳에서 오신 분……. 별을 건너서 오신 분 맞지요?”
그녀는 숨이 멎을 만큼 놀랐다. 단번에 맞히다니. 진짜 용해!
“어떻게 알았지?”
“별이 귀인님을 가리키고 있으니까요.”
“뭘 볼 수 있는지 물어도 될까? 난 이런 쪽은 문외한이라서 말이야.”
점성술사가 후드를 벗었다.
얼굴에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주름이 가득했고 뿌연 눈은 시력을 잃은 게 분명해 보였다. 하얗게 센 백발을 뒤통수에 한 뭉치로 둘둘 말았다.
노인은 에디스를 정확히 보는 게 아니라 그 주변의 어딘가에 막연한 시선을 던졌다.
“저도 진작부터 귀인님을 뵙고 싶었습니다. 실례지만 귀인님의 자세한 기운을 느껴 볼 수 있을까요?”
“기운? 가까이 있으면 되나?”
“잠깐만 제 손을 잡아 주십시오.”
에디스는 이 술사가 실마리를 풀 수 있는 열쇠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으며 손을 뻗었다. 처음 만난 사이에 저를 감격스럽게 알은체하는 표정을 마주하며 주름진 손에 제 손을 겹쳤다.
노인의 한 손은 에디스를 잡고 다른 손은 수정구를 쥐었다.
수정구를 높이 치켜들었다.
한 뼘만 한 투명구슬 너머로 밤하늘이 비쳐 보였다. 수정구가 천문을 관찰하는 데 도움이 될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 투과되는 모습은 점 보는 느낌이 확 들게 색달랐다.
그때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고정되어 있어야 할 수정구 속의 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노우볼처럼 별이 흐드러지게 날아다녔다. 눈이 아닌 별이라 더욱 빛이 나고 아름다웠다. 그중 어떤 별은 유난히 밝게 빛나며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듯 독특하게 움직였다.
에디스는 눈을 크게 뜨고 비현실적인 현상에 주목했다. 맨눈으로 하늘을 볼 때는 꼼짝도 하지 않던 별들이 수정구 안에서는 각자의 길을 가는 듯했다.
“와, 신기해.”
그러다가 문득 별들의 빛이 꺼졌다. 나타날 때만큼 사라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보셨습니까?”
점성술사가 수정구를 갈무리했다.
“응, 수정구 속에서 별이 날아다니던걸.”
“보통 분들에게는 보여 드려도 보지 못하십니다. 귀인님이 대단하신 겁니다.”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추어주니 좀 어색하네. 귀인 말고 케츠모리스 공작님이라고 부르게.”
에디스가 자신의 소개를 간단히 하자 점성술사는 잊지 않으려는 듯 입 안으로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공작님이 대단한 분인 건 맞습니다. 별을 건너오셨으니까요.”
“내가 살던 곳이 다른 별인가?”
“저기 하늘에 보이는 별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또 다른 별이지요.”
“또 다른 별…….”
대충 양쪽 세계의 현상을 분석한 결과와 일치하는 듯했다. 추측해 온 것들에 확인을 받은 기분이었다.
“나는 내 세계에 있을 때 이곳 세계를 소설로 읽었어. 그리고 이곳에도 내 세계를 소재로 쓴 소설이 있더군.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줄 수 있나?”
“소설이라니요.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에디스는 태블릿으로 읽은 소설과 서점 거리에서 입수한 소설에 관한 얘기를 늘어놨다. 자초지종을 들은 점성술사가 공감하는 탄성을 여러 번 흘렸다.
“소설로 쓰인 줄은 몰랐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겠군요.”
“그럴 수 있다니?”
“보통 사람 중에도 별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이가 종종 있습니다. 별 너머를 보는 것이지요. 무의식중에 꿈을 꾸든, 갑자기 상상하듯이 떠오르든. 그곳을 엿보는 것입니다.”
“엿본 것으로 소설을 썼다는 의미? 그런데 작품마다 내용이 애매하게 달랐어.”
“하지만 정확히 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과거나 미래, 아니면 다른 별을 겹쳐서 보기도 하지요. 아니면 일부분을 꿈으로 꾸고 나머지는 자신이 지어낼 수도 있겠네요.”
“아하, 그래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외국인 남주와 서지우가 얽히는 소설은 좀 많이 황당했더랬는데.
“그럼 나는 어떻게 여기로 오게 된 걸까?”
“혹시 조금 전에 보셨습니까? 두 별이 엇갈리는 현상을요.”
“맞아. 제일 밝은 별이 교차했었어.”
“최근 몇 년간 공작님이 계셨던 다른 세계의 별과 이 별이 엇갈리는 중입니다. 가장 가까운 교차점을 지나는 때이지요.”
엇갈리는 별 이야기를 듣는 순간 에디스의 심장이 술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