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클라이드의 웃음소리 끝에 목소리가 떨리는 듯싶었다. 뭐지. 무슨 일이라도 있나? 이만 따뜻한 잠자리를 포기해야겠다고 마음먹을 때쯤 그가 에디스를 원래대로 내려놨다.
“그래, 오늘은 건너뛰자.”
“응? 웬일이래요.”
“아니지. 하루 일정을 취소해야겠어.”
그때쯤에야 에디스도 여느 때와 다른 상황을 깨달았다. 그는 지나치게 감격하는 모습이었다. 다른 건 다 똑같지만 클라이드의 반응이 유난스러워 보였다.
지난밤을 되새겨 봤다. 꿈이 굉장히 생동감 넘쳤다. 마치 실제로 겪었던 일인 양 슬립의 매끄러운 감촉과 태블릿을 잡았던 손의 느낌이 떠올랐다.
허리를 세우고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무슨 일 있었어요?”
“일이 있었지만, 네가 돌아왔으니 우선은 다행이야.”
클라이드는 나갈 채비를 하느라 걸쳤던 외투를 벗어 던졌다. 에디스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집요하게 보듬었다. 유난스럽게 스킨십하면서 온 얼굴에 입맞춤했다.
고개를 엇갈려 끌어안았다가 잠시 뗄 때, 그녀는 클라이드의 표정에서 처음 보는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공포였다.
흔들리는 황금안은 분명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네가 가 버렸을까 봐……. 사라졌을까 봐 얼마나 내가.”
차마 말을 잇지도 못하면서 그가 입술을 떨었다.
요동하는 상태는 에디스가 더 심했다. 고슴도치처럼 옹크린 채 그에게 기댔다. 온전히 안겨 있어도 불안했다.
클라이드의 태도로 지난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됐다.
민준의 집과 슬립 차림의 서지우는 에디스에게 현실이었다. 꿈이 아니라 실제로 벌어진 사건이었다. 그건 재앙이었다.
하지만 이곳으로 돌아온 건 행운이 확실했다.
클라이드를 볼 수 있는 순간에 울컥 감동하고 말았다.
“나도 겁이 났었어요. 아무것도 알아낸 게 없는데 현실로 돌아가 버려서.”
머리가 맑아지고 상황 파악이 되자 두려움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눈꼬리에 물기가 맺혔다. 자신이 우는 줄도 모른 채 뺨이 젖어 들었다.
한번 터진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점점 더 설움이 깊어져 끝내 흐느끼고 말았다. 어깨를 좁히고 목덜미를 들썩이며 훌쩍였다.
자신의 기분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했다.
아니, 알지 못했다.
여태껏 제 상태를 인지하지 못하고 잘난 척만 했던 머리가 이미 불 지펴진 가슴을 외면해 왔다.
그걸 이제야 깨닫는다.
“소설의 내가 완전히 끝나 버릴까 봐.”
마음의 쏠림이 완전히 기울어졌다. 클라이드에게로.
“안 돼. 못 보내, 에디스.”
너무 늦게 깨달은 건 아닐까? 자신의 영혼은 현실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쩌면 마지막 인사를 나눌 시간을 갖고 있는지도.
겁이 순식간에 부풀어 오른다.
누군가가, 미지의 존재가 우리를 강제로 떼어 놓을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에 몸서리쳤다.
“영영 당신과 헤어질까 봐……. 너무나 겁났어요.”
에디스는 있는 힘껏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벼랑에 매달린 사람처럼 간절했다.
잃기 직전이 되어서야 아쉬움을 알다니.
정말 난 바보다.
늘 맞이할 줄 알았던 아침이 새삼스럽게 소중히 와닿았다. 지난밤과 마찬가지로 클라이드를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적인 것을.
내게 주어진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외면해 왔다. 한심해. 바보.
홍수 같은 그의 애정이 너무 거대해서 부담을 느껴 왔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무겁다고 해서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이인데 피할 틈이 있을까.
당장 오늘 밤에 또 현실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리고 다시는 클라이드에게 돌아올 수 없게 된다면.
“흐윽, 클라이드…….”
눈물 젖은 뺨을 중구난방으로 그에게 비벼 댔다.
얼핏 보면 그녀는 잠에서 깨어 울먹이는 어린애와 같은 모습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일어나지 않겠다고 투정하더니, 이젠 무서운 꿈을 꿨다며 바동거리는 꼴이었다.
하지만 클라이드 역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괜찮아. 아직 에디스는 여기에 있으니…… 답을 찾을 수 있어.”
“나, 아주 돌아가 버리면 어떡해요.”
“꼭 알아낼 거야. 그러니까 그만 울어, 응? 제발.”
말로는 클라이드가 에디스를 위로했지만 실제로는 함께 공포에 질려 있었다. 마른침을 삼키는 목젖이 초조함을 역력히 드러냈다. 언제나 당당하던 그가 손끝을 잘게 경련했다.
한참 만에야 겨우 격렬한 기분이 가라앉았다.
클라이드가 시종을 불러 일정 변경에 대해 지시했다. 아침 식사도 방으로 갖다 달라고 한 후 내보냈다.
두 사람은 지난밤에 각자 겪었던 일을 차근차근 풀어냈다. 작은 부분이라도 놓치지 않도록 절박하게 경험을 떠올렸다.
폭넓게 가능성을 열어 두고 생각해 봤다.
양쪽 세계에서 글로 쓰이는 이야기들이 비슷한 패턴을 보이고 있었다. 딱히 어떤 게 정확하다고 짚어 낼 수는 없지만 대체로 유사성이 엿보이는 것들이 많았다.
또한, 에디스와 서지우의 영혼은 어느 쪽이 손해나 이득을 보지 않고 동등하게 자리를 바꾼 듯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서지우의 육신에 들어간 에디스의 영혼이 더 상황이 좋았다. 속사정은 다를 수 있어도 잠깐 겪어 본 바로는 그랬다.
사고의 폭을 한층 넓혀 봤다.
클라이드는 내내 이곳이 소설 속 세계가 아니라고 강조해 왔다. 하지만 그녀는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캐릭터라는 사실을 그가 받아들이기 힘들어서일 거라고 치부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맞다면?
“클라이드는 왜 이곳이 소설 속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여기는 아주 넓은 세상이거든. 많은 사람이 살고 있고 긴 역사가 있어.”
“그게 근거가 될 수 있을까요?”
“작가가 만든 세계라면 이럴 수 있을까? 이 모든 삶과 환경을 다 구상할 수 있나?”
“…….”
“예를 들어 신대륙에 있는 황실 소유의 영토에서는 목화를 많이 재배해. 노예는 수십만 명 단위이고 총독은 에반스 자작이야. 소설에는 적혀 있지 않은 일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벌어지고 있다고. 작가가 그걸 모조리 짜낼 수 있을까? 황실 영토뿐 아니라 주인공인 나와 연관이 일절 없는 수많은 사건까지 모두?”
“필요할 때마다 설정을 짜내서 글로 쓸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럼 작가가 나보다 더 이곳을 모르겠군. 아직 설정을 떠올리지 않았을 테니.”
“…….”
“그런 세계를 소설 속이라고 과연 단정 지을 수 있나?”
에디스는 곱씹어 생각해 봤다. 아무리 클라이드가 역설한다고 해도 여기가 작가의 소설 속이 아니라는 뜻은 되지 못했다.
조금 놀라기는 했다. 작가가 클라이드보다 더 이 세상을 모르리라는 건 에디스가 생각해 본 적 없는 부분이었다. 무척 일리 있게 들리는 얘기였다.
“클라이드의 생각이 참신하긴 하지만, 근거는 약하다고 생각해요. 세계관이 방대할 수도 있죠.”
그녀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고심을 계속했다.
“단지 양쪽 세계가 대칭하듯이 같은 현상이 벌어지는 건 주목할 만해요.”
“맞아. 상황이 비슷하잖아.”
“클라이드는 여기에 사는 사람이니까 이곳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게 당연할 테죠. 그런데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라도, 뒤집어 생각해 볼 여지가 있어요.”
“뒤집어서?”
“어쩌면…… 여기가 현실이고 내가 살았던 곳이 소설일 수도 있죠.”
클라이드는 귀를 기울이며 그녀가 상상력을 발휘한 추측에 관심을 드러냈다.
“양쪽 다 현실일 수도 있지.”
그게 가장 합리적이겠다.
서로를 가상의 캐릭터로 여기고 싶지 않은 탓도 있었다. 하지만 양 세계가 우열을 가늠하기 힘들어서 동일선상에 두는 편이 맞을 듯했다.
어느새 두 사람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토론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에디스는 클라이드가 우려 주는 차를 받아 천천히 목을 축였다.
원작에 연연하지 않는 편이 나으려나?
따지고 보면 두 세계는 다중 우주론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이런 우주론은 에디스가 예전에 과학에 엄청난 관심을 둬서 아는 게 아니었다. 빙의물 소재로 흔하디흔한 게 평행 우주론과 다중 우주론이었다. 모르고 싶어도 장르 소설을 읽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다중 우주론.”
“그게 뭐지?”
클라이드가 묻자 그녀는 순전히 독자의 관점에서 겉핥기로 이해한 과학 이론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자신의 우주와 전혀 상관없는 우주가 존재한다는 이론이에요. 시공간도 다르게 말이죠.”
세계관에 대한 추측은 차츰 정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핵심은 손도 대지 못했다. 에디스가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게 할 방법은 힌트조차도 찾지 못했다.
* * *
논의에 불과했던 제국 독립이 구체적으로 진행됐다.
페이튼은 황제로 추대할 테오도어를 수도 인근으로 데려왔다. 비밀 별장에 얌전히 숨은 소년은 자신의 운명이 어찌 될지 모르고 있었다.
어린 아들을 둔 전직 시녀인 어머니는 페이튼이 제시한 제법 큰 돈에 홀렸다.
시녀의 입장으로도 손해 보는 건 없었다. 평생 놀고먹는 황제 자리를 아들에게 권했으니, 거기에 친부는 황제가 아닌 딴 남자라는 진실을 털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또한, 전면적인 무력 충돌을 대비해 이웃국인 체르헨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외국 군대가 이 땅을 밟을 때의 위험성을 염두에 두면서도 피치 못해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클라이드의 상비군은 귀족 사병보다 압도적으로 강력해서 어쩔 수 없었다. 웬만하면 국지 전투만으로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독립 선언의 날짜를 한 달도 안 되게 가까이 잡았다.
귀족파의 대부분이 빨리 진행하길 바랐고, 페이튼도 시간 끌수록 비밀이 새어 나갈 여지만 많아지리라고 짐작했다.
그는 페릴랜드라는 이름의 신생국에서 황제 아래의 최고 지위인 국무대신이 될 예정이었다.
‘거사 전에 에디스를 깔끔히 정리해야겠지?’
사격 대회 직후만 해도 페이튼은 그녀와의 일대일 만남을 회피하며 더 나은 혼인 조건을 제시할 생각만 했다. 하지만 이젠 그도 양상이 달라졌음을 인정해야 했다. 에디스에게서 풍기던 황태자의 알파 페로몬으로도 추측할 수 있었고, 지나치게 그녀를 싸고도는 클라이드의 태도로도 눈치챌 수 있었다.
지금 시점에서 그녀가 청혼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잃기는 아까워. 좀 찝찝하지만 강제로 취해야겠군.’
에디스가 황태자의 비호 아래에 있지만 허점은 있게 마련이다. 아주 잠깐이라도 호위가 부실해지는 순간이 오겠지.
빈틈이 생기면 재빨리 빼돌려야겠다.
옴짝달싹 못 하게 해 두고 성혼서에 사인하도록 만들 생각이다. 사인이 들어간 종이 쪼가리는 의외로 힘을 발휘할 때가 많다.
그녀를 페릴랜드로 끌고 가든지, 다른 데에 가둬 두든지. 일단 신병을 확보한 후에는 불법과 합법을 따지는 데 긴 시일이 소요될 것이고, 추가로 법정 다툼에 아주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다.
‘정상적인 부부가 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군.’
감금과 협박만이 남은 관계를 평생 이어 가기는 피곤하겠지.
에디스가 고분고분 결혼을 승낙했으면 저도 그녀를 돈과 땅이 주는 이득만큼 예뻐해 줬을 텐데.
* * *
페이튼이 생각을 정리하던 중 시종이 급한 소식을 가져왔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점성술사가 달아났습니다.”
“점쟁이가? 어떻게?”
“무슨 수로 빠져나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단지 그자가 있어야 할 곳은 뒤뜰과 방뿐인데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흠. 달아났다고…….”
페이튼은 매우 언짢아졌다. 그까짓 점쟁이쯤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탈출한 과정이 문제였다.
앞을 보지 못하는 노인이 혼자 도망쳤을 리가 없었다. 저택 내에 탈출을 도운 자가 있다는 뜻이었다.
동조자의 꼬리를 잡지 못하고 점성술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라를 세우는 중대한 일에만 매달리기도 바쁜데 집 안에 숨은 불순분자가 신경에 거슬렸다. 사소한 사건이 손톱 밑의 거스러미처럼 그를 기분 나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