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클라이드는 에디스를 마음에 품었다고 솔직히 털어놓지 않았다. 그러면 서지우는 황태자비가 될 가능성을 점칠 수 있을 테고, 없던 욕심도 생길 수 있었다.
그녀의 손목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영락없는 에디스의 손목이지만, 빼내고 싶어서 쩔쩔매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서지우였다.
“우선은 놔줄 테니까 가만히 있어. 괜히 소란 피우지 말고.”
잡은 손목을 풀어 주자 서지우는 엉덩이 걸음으로 후다닥 물러났다. 서늘하게 멀어진 거리가 지금 클라이드에게 닥친 현실을 새삼 깨닫게 했다.
“에디스와는……. 아, 너 말고 시종으로 있던 그 에디스 말이야. 우리는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였어.”
“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하겠지?”
“네에.”
“에디스는 아주 일을 잘하는 시종이었어. 영리하게 일 처리를 잘했지. 내가 많이 아꼈어.”
그는 일을 잘해서였다는 부분을 특히 강조했다.
마음이 담긴 관계가 아니라 단순히 한 침대에 오르는 사이. 그 정도로 둘러대면 서지우가 이곳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할 듯했다.
클라이드는 일부러 표정도 험악하게 지었다. 기분이 엉망이라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데 더해 눈꼬리도 사납게 세웠다. 그는 에디스가 제 얼굴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지우에게는 얼굴 점수를 높게 받아선 곤란했다.
무섭고 엄한 황태자의 이미지를 지어내자 서지우가 깊이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밤이 늦었지만 몇 가지 더 묻지.”
“예, 말씀하십시오.”
그는 에디스를 되돌아오게 할 방법과 관련해 꼬치꼬치 물었다.
그런데 서지우는 클라이드보다 더 아는 게 적은 듯했다. 그녀는 알 방법이 없었다는 말을 자주 하면서 이 기이한 현상에 대해 아무것도 짐작하지 못했다.
서지우의 말에 의하면 현실 세계는 논리와 과학이 발달했고, 그 외의 분야는 굉장히 범위가 협소하다고 했다. 황실 소관의 천문 부서에서는 기껏해야 날씨나 예측했다. 별을 관측하는 방법도 다르고 점성술의 수준도 형편없었다.
새벽이 다 되어 취조에 가까운 대화를 마쳤다.
서지우에게 침대를 내어 주고 그는 보조 침대로 옮겨 왔다. 그녀가 의아한 눈초리로 쳐다봤지만 당장은 둘러댈 말이 생각나지 않아 못 본 척했다.
그는 내내 뜬눈으로 지새우면서, 휘장이 내려진 침대에서 부스럭 소리가 나는 걸 들었다. 분명히 서지우도 편치 못하겠지.
한참 후에야 소리가 잠잠해졌다.
* * *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상황이 에디스의 눈앞에 펼쳐졌다.
이곳은 클라이드의 침실이 아니었다. 주변에 휘장도 없고 그 너머로 벽난로의 나무 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금사가 수 놓인 실크 이불 대신에 그녀의 몸에 덮인 단색 구스다운 이불은 감촉이 다르면서도 만만치 않게 포근했다.
그녀는 부스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드넓은 우물천장에 길게 둘러진 LED 바가 빛을 은은하게 뿌렸다.
‘여기가 어디지?’
아마도 현실 세계인 것 같았다. 하지만 방은 제 방이 아니었다. 부모님과 함께 살던 자신의 방은 딱 이 침대만 한 크기로 아담하고 소박했다.
우선 드넓은 침대를 빠져나갔다.
근처에 벽 전체를 덮은 흑경이 있었다. 자신이 까만 톤의 거울에 비쳤다. 거울 너머에는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익숙한 느낌은 들지 않는 여성이 망연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오랜만에 되돌아온 육신이 낯설었다.
에디스는 크게 당황해 버렸다. 설마 이렇게 밑도 끝도 없는 순간에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 건가? 그럼 클라이드는? 바뀌는 원리는 대체 뭐지?
두 세계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추측 말고는 별로 알아낸 게 없었다. 그곳으로 돌아갈 방법도 모른다. 이대로 영영 그와 재회하지 못하는 걸까.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부여잡았다. 우선 뭐라도 조사해야 했다.
태블릿이 눈에 띄었다. 이것 역시 자신의 물건이 아니었지만 시험 삼아 켜 봤다. 지문이 인식되어 곧바로 홈 화면으로 넘어갔다.
헉, 소리가 절로 났다.
‘내 것이 맞나 봐.’
새벽 3시를 넘어가는 시각과 각종 앱 아이콘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옷차림도 점검했다. 입고 있는 건 심플한 슬립 한 장이 전부였다. 자다 깨서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 가느다란 어깨끈이 어수선하게 흘러내렸다.
뭐라도 더 입어야 했다. 당황스러운 김에 제일 가까운 옷을 집어 들었다.
팔을 꿰고 나서야 남성용 드레스 셔츠라는 걸 알아챘다. 길이가 허벅지까지 내려올 만큼 컸다.
침실 밖으로 탐색을 나섰다.
거의 강당 크기의 거실에서 자신 외의 사람과 최초로 맞닥뜨렸다. 소파에 앉은 남자의 뒤통수가 낯익었다. 그가 인기척을 깨닫고 돌아봤다.
“일찍 일어났네.”
“유민준 팀장님!”
경악해 버린 에디스는 그 자리에서 비틀거렸다. 벽 모서리에 어깨를 기대자 민준이 벌떡 일어났다.
“왜 그래?”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그의 모습이 기묘했다. 반질반질한 대리석 바닥 위로 수십 개의 조명과 민준의 늘씬한 실루엣이 반사됐다.
그가 에디스를 살갑게 끌어안았다. 아마도 그의 것일 듯한 셔츠와 얇은 슬립 사이로 팔이 들어왔다.
“꿈꿨어?”
안경을 벗으며 선선히 눈웃음치는 태도는 에디스가 예전에 알던 팀장과 달랐다. 그때 그는 단호하고 쌀쌀맞은 상관이었다.
“팀장님…….”
“몇 년 전 꿈이라도 꿨나 보지? 어느 시절 팀장님이야.”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에디스는 재빨리 상황을 파악했다. 몇 년 전이면 십중팔구 자신이 소설 속으로 빙의한 시점일 것이다. 현실과 소설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문득 수집한 자료 중에서 유민준 팀장과 로맨스를 풀어 나가던 소설이 떠올랐다.
그때 여주인공 서지우가 남주인공 유민준에게 뭐라고 불렀더라.
“……오빠.”
그가 에디스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낯선 접촉이 찝찝했다.
“물 한 잔 갖다줄까?”
“고마워요.”
민준은 소파에 노트북을 내던져 둔 상태로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래프와 글, 숫자가 빽빽한 화면이었다. 일하고 있었구나. 함부로 손대지는 않고 안 보는 척 곁눈질만 했다.
그가 외국 브랜드의 생수를 가져왔다. 아무래도 사귀는 사이가 맞는 듯했다. 병뚜껑을 따는 것부터 해서, 플라스틱병째가 아니라 크리스털 컵에 따라 그녀의 앞에 놓아 주는 과정까지 자연스러운 애정이 엿보였다. 보통 사이라면 이렇게 살가울 리가 없었다.
“새벽까지 일을 하네요. 할 거 많아요?”
“내일 출근하자마자 아버지가 이거 정리해서 올라오라고 하셔서 말이야.”
아버지라니, 대체 누구일까. 설마 소설의 흔한 설정이었던 회장님인가.
“32층에요?”
“응.”
맞구나. 민준은 회장님 아들이었어.
정체를 숨기고 평사원부터 시작하는 로열 패밀리.
서점 거리에서 그 소설을 발견했을 때는 너무 뻔해서 실소가 나왔더랬다. 회장 아들은 우리고 또 우려먹어서 이젠 맑은 물밖에 나오지 않는 사골 같은 설정이었다.
자신이 빙의한 소설 속의 또 다른 소설이니 엉성할 수도 있겠지. 게다가 클라이드의 세계는 중세 배경이라 이런 쉬운 설정이 독자에게 잘 먹힐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현실감 있게 금수저를 만나니 기분이 묘했다.
에디스가 이리저리 눈치 보니, 그는 다른 식으로 오해한 듯했다.
“내 신경은 쓰지 말고 들어가서 쉬어.”
“……네.”
“아, 그리고 짐 챙기는 거 잊지 않았지?”
“짐이요?”
“캘리포니아에 있는 할머니 댁으로 인사드리러 가기로 했잖아.”
지우의 할머니는 군포에 사셨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한 할머니는 민준의 할머니일 것이다. 집안끼리도 얘기가 오가고 있는 모양이다.
그녀는 완벽한 신데렐라 스토리에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 몸에 깃들어 있는 영혼이 또 다른 에디스라면 잘된 일이 아닐까? 그 영혼이 갈 곳을 잃고 헤맨다면 자신도 마음이 편치 않을 테니.
침실로 돌아와 혼자가 되자 다시 황망한 심경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뭐부터 해야 하지?
아까 내버려 둔 태블릿이 눈에 띄었다.
‘아, 원작 소설부터 읽어 보자.’
그런데 웹소설 앱이 깔려 있지 않았다. 다른 영혼은 소설을 읽지 않았던 걸까? 어쩌면 서지우로 4년간 살았던 영혼의 처지가 되게 난감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디스는 앱을 다운받아서 예전의 그 작품을 찾았다.
내용은 라그란드에서 이따금 봤던 것과 같았다. 한 회차당 분량은 훨씬 더 많지만 그중에서 딱히 도움이 될 만한 건 찾지 못했다. 오랫동안 연재 중지되었다가 다시 글이 올라온 탓에 조회 수는 예전보다 적었다.
그런데 놀라운 현상이 있었다.
최근 베스트에 올라온 다른 작품에 라그란드라는 나라 이름이 쓰였다.
‘우와, 이건 저쪽 세계와 비슷한 상황인걸.’
다른 작품을 뒤져 봤다. 에디스를 본뜬 것이라고 의심할 만한 여주인공이 여기저기 등장했다. 대충 헤아려도 시종과 황태자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족히 10개가 넘었다. 어딘가에서는 맹한 캐릭터였고 어딘가에서는 걸크러시였다.
원작 소설처럼 아드리안과 비슷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도 많았다. 알파 미남 공과 오메가 미인 수는 예나 지금이나 메이저 소재였다.
그녀는 최대한 열심히 읽으며 머릿속에 각종 정보를 눌러 담았다.
태블릿에 다른 건 없나 뒤적거려 봤다. 클라이드는 초현상 연구와 함께 별점을 알아보려 했으니 이곳에서도 뭔가 시도를 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특이점도 발견되지 않았다.
거실에서 민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얼른 자.”
공연히 그의 기분을 망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다른 영혼에게는 중요한 사람일 테니 저도 조심하고 싶었다.
“오빠도 그만하고 자요.”
나름대로 상냥히 대꾸한 후 불을 껐다.
옹크리며 눕고 나니 자신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주먹 쥔 손을 억지로 펴자 손끝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에디스는 침착하게 구는 척하면서도 두려웠다.
영영 클라이드를 못 보게 될까 봐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겁이 났다.
이대로 서지우의 몸에 안착하게 되는 걸까.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듯이 소설 속 세계는 마음에 묻어 둬야 하나. 클라이드와 별달리 깨 볶지도 못하고, 세월이 흘러 언젠가 그가 잊히기를 바라야 할까.
주어진 상황에 자신의 의지는 깃들지 못했다. 자신은 너무 미약하고 미생물 같은 힘뿐이었다.
손바닥을 입에 대 끅끅거리는 울음을 삼켰다. 거실에 있는 민준에게 들키면 곤란했다.
오래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 * *
“이봐.”
아침의 자연광이 그녀의 콧잔등 위로 찬란하게 쏟아졌다.
“이봐, 일어나. 많이 늦었어.”
한숨을 푹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투덕투덕 발소리와 함께 커다란 손이 에디스의 어깨를 불친절하게 흔들었다.
“으응…….”
에디스는 뺨을 보드라운 깃털 베개에 비비며 눈을 뜨지 않았다.
이번에는 옆구리에 다른 것이 닿았다. 원통형으로 둘둘 만 서류 뭉치였다. 손을 대기도 싫다는 듯 마뜩지 않게 쿡쿡 찌른다.
“어서.”
실눈을 뜨고 저를 괴롭힌 사람의 정체를 확인했다.
“클라이드. 오늘은 혼자 운동하고 와요.”
“뭐?”
“오늘만. 딱 하루만.”
매일 반복하는 레퍼토리다. 물론 성공한 적은 없었다. 에디스는 한창 비몽사몽이었고 아침은 늘 움직이기 싫은 시간이었다.
그때 후다닥 클라이드가 다가왔다.
“에디스?”
“아아, 나 꿈자리가 사나웠다고요. 정말로요.”
더럭 몸이 들렸다.
그가 에디스를 통째로 들어서 안았다. 어깨가 부서져라 세게 끌어안으면서 뺨을 만지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 전에 나를 뭐라고 불렀지? 다시 한번 말해 봐.”
낮게 울리는 음성에 감동이 역력히 배어 있었다. 에디스를 그의 무릎에 앉힌 후 그네 태우듯이 살금살금 좌우로 흔들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몽롱한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에디스, 여기가 어딘지 알아?”
“지금 이거, 새로운 잠 깨우기 공격인가요?”
허튼 농담에 그가 푸스스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