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장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 텐데, 클라이드가 고집스럽게 우겨 대니 그대로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줄거리 중에서 위기가 닥칠 거라는 얘기도 잊지 않고 있어. 요즘 정세를 보면 위태위태하긴 하더군. 그래도 내 나라이고 에디스와 살 곳이니까 망가뜨릴 일은 없을 거야.”
“클라이드는 잘할 수 있을 거예요.”
문제는 자신이지. 불확실하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일개 독자.
에디스는 클라이드에게 안긴 채 이런저런 망상을 거듭했다.
딱딱한 팔베개가 불편해 잠이 오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깨닫지 못한 사이 눈이 감겼다.
* * *
클라이드는 잠귀가 밝았다.
변방의 지휘관을 그만두고 황태자가 되면서부터 늘 편치 않은 잠을 자곤 했다.
아버지와 누님이 그 지경으로 된 사태에 큰 충격을 받았고 수도와 황궁이라는 장소 자체에도 불안감을 품었다. 그에 더해 암살 시도를 여러 번 당하다 보니 숙면을 하는 게 불가능해졌다.
그나마 에디스와 한방을 쓰게 된 이후로는 마음이 느슨해져서인지 제법 오래 눈을 붙였다. 하지만 작은 소음에도 흠칫 놀라 일어나는 버릇은 여전했다.
“으응…….”
에디스가 뒤척이자 그는 곧바로 정신이 맑아졌다.
팔베개가 불편해서 그런가. 깃털 베개보다 딱딱한 제 팔을 빼내고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했다.
그는 업어 가도 모르게 잘 자는 에디스가 참 좋았다. 자신이 도로 잠들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마냥 쳐다보게 될 만큼 부러웠다. 아기처럼 여리고 고른 숨소리도 귀여웠다.
그녀는 클라이드가 갖지 못한 것을 많이 가졌다. 푹 자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필요할 때는 바짝 긴장해 집중력을 발휘하면서도 여유가 생기면 쉽게 누그러지곤 했다. 심신을 풀어놓을 줄 아는 건 아주 큰 장점이다.
“착하지. 자자.”
클라이드는 아이 어르듯이 그녀의 이불 덮은 가슴을 토닥토닥했다.
안 그래도 되는데 자신이 하고 싶어서 했다. 잠자는 모습이 예뻐서 괜히 손을 대 보고 싶었다.
그때 에디스가 불현듯 눈을 떴다.
악몽이라도 꾼 듯 갑자기 턱을 쳐들었다. 등과 어깨에 힘이 들어가며 몸이 곡선으로 휘었다.
“허억!”
숨을 한꺼번에 들이쉬면서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왜 그래. 꿈자리가 안 좋았어?”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처럼 몸을 튕겨 대면서 그녀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클라이드는 걱정됐다. 의사를 불러야 하나 고민하면서 일단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쉬이. 쉬이이.”
에디스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돌연한 반응에 그는 깜짝 놀랐다.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늘 그가 깨울 때까지 꼼짝하지 않았고, 족히 열 번은 흔들어야 간신히 정신을 차리곤 했다. 그나마도 풀잎 위의 애벌레처럼 아주 굼떠서 클라이드가 일어나 앉히고 새벽 훈련에 나가자며 거듭 재촉해야 했다.
“에디스, 왜?”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둘러싸인 휘장과 침구류를 휘휘 둘러보다가 클라이드에게 초점을 맞췄다. 동글동글한 눈에 놀라움이 가득 담겼다.
“누구세요?”
“뭐?”
“여기가 어디죠?”
“에디스, 정신 차려.”
클라이드는 금세 창백해진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에디스가 기겁해서 고개를 뒤로 물렸다.
“앗.”
진짜 놀란 게 분명했다.
이불을 끌어다 가슴 앞으로 꾸깃꾸깃하게 모으며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정상이 아닌 상태였다.
경계심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에디스가 그를 유심히 쳐다봤다.
“혹시…… 클라이드 전하십니까?”
클라이드의 얼굴이 차츰 경악으로 물들었다.
뒤통수에 해머를 맞은 듯했다. 머리가 쾅, 하고 울리며 아찔해졌다.
에디스는 사적인 자리에서 전하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다. 말투가 날이 갈수록 편해져 요즘에는 심지어 당신이라고 부를 때도 있었다. 황족이 아닌 일반인처럼, 연인이나 부부처럼 편히 대하는 게 좋았는데. 그 편안함이 갑자기 사라졌다.
“나를 못 알아보는 거야?”
에디스가 당황해서 어리바리하게 변명했다.
“죄송합니다. 누구신지 몰라서요. 옛날에 뵈었던 황태자 전하와 아주 닮아서 착각한 것 같습니다.”
“클라이드 맞아.”
“예? 아앗, 그러면…….”
그녀가 화들짝 놀라서 침대를 벗어나려 했다. 명백히 달아나는 자의 모습이었다.
“어딜 가.”
허우적거리는 그녀의 손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겁에 질린 채 원위치로 끌려오는 그녀가 낯설었다. 움츠린 어깨와 흔들리는 눈동자는 그가 아는 에디스와 달랐다.
심지어 그녀는 클라이드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저녁나절만 해도 침대에 올라오지 말라며 그를 째려보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고 여기기 힘든 모습이었다.
“에디스?”
불길한 이질감을 느끼며 의문으로 가득한 질문을 던졌다. 여느 때처럼 이름을 부른 게 아니라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한 거였다.
그녀가 새파랗게 질렸다.
“네, 네.”
믿고 싶지 않지만, 최악의 상황이 닥친 것 같았다.
클라이드의 표정도 돌처럼 굳어 갔다.
둘이 노려보면서 대치 상태를 이뤘다. 에디스가 머지않아 시선을 깔았다. 그의 가까이에 앉은 걸 참지 못하고 쩔쩔맸다.
절망적이었다. 저를 낯설어하는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여기는 내 침실이야.”
“전하의…… 침실이요?”
“우리는 같이 자던 중이었어.”
소스라치게 놀란 에디스가 몸을 뒤로 젖혔다. 그가 등을 받쳐 주지 않았더라면 뒤로 구를 뻔했다.
“나는 네게 비밀스러운 사정을 들었어. 내 예상이 맞다면, 넌 어렸을 때 나와 마주친 적이 있는 에디스일 거야.”
“마, 맞아요. 황궁 정원에서요.”
“확인차 물어보는 건데, 그때 우리는 뭐 했지?”
“소꿉놀이도 하고 산책도 하고……. 윗분들 몰래 몇 번 만나서 어린애들 놀이를 했어요.”
클라이드는 이를 꽉 깨물었다. 그녀가 달라졌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다고 손목을 쥔 그녀를 풀어 주지는 못했다. 다른 영혼이 이 몸에 깃들었다고 해도 에디스는 에디스였다.
두 영혼 중에서 클라이드가 원하는 사람은 오직 지난밤 팔베개하며 잠들었던 에디스였다.
뒤늦게 선택의 혼란은 오지 않았다. 예전에 에디스에게 별 너머에서 왔다는 비밀을 들으며 감정을 정리한 탓이었다. 그때 그녀는 속인 걸 사과하며 떠나려 했고, 그는 자신의 마음이 누구에게 향하고 있는지 확실히 깨달으며 에디스를 붙잡았다.
그러고 보니 낯선 에디스를 경계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는 귀여웠지만 지금은 알 수 없었다. 십수 년 만에 재회한 사람으로 취급해야 옳았다.
심지어 이 사람은 클라이드가 원하는 에디스를 돌려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어떤 행동을 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침대를 썼던 건 이미 에디스에게 노출된 상황이었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제가 보듬고 쓰다듬는 장면을 목격했다.
적당히 둘러대야 하나? 클라이드는 고민스러웠다.
그렇다고 마냥 대화를 아낄 수도 없었다. 그가 원하는 에디스를 돌려받으려면 적극적으로 시도해야 했다.
다행히 아직 당황한 기색을 벗지 못한 에디스에게서 속내가 차츰 읽히기 시작했다. 클라이드가 그녀를 떠보기도 전에 사소한 행동과 얘기로 속마음을 드러냈다.
“어떡하지.”
울상이 되어 혼잣말하는 걸 그에게 들켰다.
“무얼 어떡해?”
“남겨 두고 온 게 있어요. 나를 찾을 텐데.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돼요.”
두서없는 얘기에 떨림이 묻어났다. 에디스는 역력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넌 어디에서 온 거지?”
“네? 아, 그게 집에 있었기는 하지만…….”
“집이라면 어느 집? 케츠모리스 본가가 아닌 건 알아.”
“그게…… 좀 말씀드리기가 까다로워요. 집뿐만 아니라 여러모로요.”
클라이드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싸늘한 말투를 내뱉었다.
“그럼 내가 먼저 말할게. 말없이 가는 마차와 하늘 높이 솟은 집. 마법처럼 멀리에 있는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도구……. 그런 세계가 맞나?”
“어, 어떻게 아시는 거죠?”
“이제 너도 털어놓을 차례야. 거기에서 얼마나 오래 있었지?”
“대략 4년쯤이요.”
이 얘기대로라면 두 영혼이 서로 뒤바뀐 게 맞다. 소설 속 세계의 에디스와 현실 세계의 서지우가 정확히 자리를 바꾼 듯했다.
물론 그는 이곳이 소설이 아니라고 여기지만, 에디스와 얘기를 나눌 때는 편의상 두 세계를 그렇게 구분했다.
클라이드는 에디스의 얼굴을 한 다른 여자를 유심히 관찰했다. 지금 상태가 원래대로 돌아온 것이지만 자신의 입장으로는 도리어 잘못 심어진 영혼 같았다.
이 사람을 에디스로 여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이 사람을 다른 세계의 서지우로 치부했다.
“남겨 뒀다는 게 물건일 리는 없고……. 남편이라도 있나?”
서지우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직 식은 올리지 않았어요.”
어렵지 않게 읽히는 표정과 반응을 관찰하며 클라이드는 크게 안도했다. 서지우는 결혼할 사람에게 돌아가고 싶어 했다. 잘하면 우리가 같은 목표를 갖게 될 수도 있겠다.
그는 도서관에서 읽었던 책을 떠올렸다. 그 소설들이 현실 세계를 일부 반영하면서도 스토리 전개는 많이 엇갈렸다.
“상대는 누구지?”
“예? 그건 말씀드려도 모르실 텐데요.”
“유민준 팀장? 박재철? 아니면 제이든?”
서지우가 떡 벌어지려는 제 입을 손으로 막으면서 놀랐다.
“유민준 팀장님이요. 지금은 부장님이긴 하지만요.”
“흠, 같은 회사 사람이랑 잘 풀렸나 보군.”
“어떻게 다 아세요?”
의문이 조금씩 풀리는 듯했다. 여러 소설 중 하나는 다른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다만 어떤 게 맞는지 알 수 없을 뿐이었다.
“에디스에게 일어나는 일을 조사했거든.”
그녀의 사정을 웬만큼 알고 있다는 사실은 밝혀도 될 듯했다.
당장 급한 건 서지우에게서 되도록 많은 정보를 끌어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가 아는 부분은 여기까지만 밝히면서 서지우의 얘기를 많이 들을 수 있도록 유도했다.
차분히 묻고 답하는 와중에도 클라이드는 속이 바짝 탔다.
한시바삐 에디스를 돌아오게 해야 했다.
제일 두려운 건 제약 사항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었다. 이를테면 시간이라든가 주변 환경, 매개체. 이 현상은 원인이나 결과도 알 수 없었다. 현재 파악한 건 두 영혼이 오락가락했다는 것뿐이었다.
자신이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모르고 넘어갈까 봐 두려웠다. 에디스가 올 길을 열어 주지 못할까 봐 겁이 났다.
서지우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궁금한 게 많은 눈초리로 이따금 클라이드를 흘끔거렸다.
“물어봐도 좋아.”
“……?”
“너도 묻고 싶은 게 많을 거 아냐.”
“저, 그러면 제가 왜 여기에 있는지 여쭤도 될까요?”
잠시 엇갈린 시선에 클라이드는 말문이 막혔다. 너무나 낯선 눈빛과 표정이었다.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낄 만큼 달랐다.
그는 빠르게 생각했다. 서지우가 유민준 팀장이 있는 현실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하니 잘된 일이었다. 그러니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계속 유지하도록, 이곳의 환경 중에서 장점은 감추는 편이 나았다.
서지우에게 거짓말까지 할 필요는 없고, 적당히 뭉뚱그려서 애매하게 설명했다.
“에디스는 내 시종이야.”
“시종이면 시종의 방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나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수발 시종이지.”
“아무리 그래도…….”
“왜? 뭐 문제라도 있나?”
“지금 분위기가 좀…….”
그녀가 머뭇거리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두 사람의 너무 가까운 거리에 의문이 든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