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빅토르 백작이 크게 관심을 보였다. 페이튼이 스스로 황좌에 오르길 바랄 것으로 예상했는데 다른 이를 추천하다니 뜻밖이었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테오도어 공이 황제의 별을 타고난 것 같습니다.”
“테오도어 공이시라면……?”
“폐하의 핏줄을 받은 분이지요. 외부 활동을 뜸하게 하는 분이라 아마 공을 뵙지 못한 분도 많을 겁니다.”
만나 보기는커녕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짓는 자도 있었다. 황제로 거론된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하는 목소리가 컸다.
페이튼은 새로운 인물을 소개하듯이 테오도어에 대해 덧붙여 설명했다.
“그분은 아주 유하셔서 대신의 의견을 잘 수용해 줄 성품이십니다. 정계와 거리가 멀게 지내 왔으니 황태자 클라이드의 그늘에 있지도 않을 테고요.”
“공을 어떻게 뵈면 좋을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테오도어 공은 제국 남부의 한적한 곳에서 살고 계십니다. 수도에는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으시지요.”
“한 번도요?”
“예, 올해 일곱 살이시거든요.”
그제야 좌중의 소란이 잠잠해졌다. 페이튼이 뜬금없이 낯선 자를 황제로 추대하겠다고 나선 속셈을 간파하게 됐다.
페이튼은 화사한 미소를 유지한 채 최대한 우회해서 설명했다.
황제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기 전, 근거 없는 추문이 생긴 적이 있었다. 어떤 시녀와 가까워져 아이가 생겼다는 스캔들이었다.
소문이 돌자마자 시녀는 황궁에서 사라졌다. 아이가 실재하는지조차 확실치 않았다.
황제는 끝까지 소문을 부정했지만 시녀를 찾지 못하고 사건이 미궁으로 빠진 채 종결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페이튼은 그 시녀와 연락이 닿았다. 알고 보니 황제가 아닌 다른 남자와 불장난을 벌인 결과 아이가 생긴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의 비밀스러운 친부가 누구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황제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는 사실이 훨씬 쓸모 있었다. 중병을 앓고 있는 황제가 힘겹게 공석에 나와 다시 친자를 부정한다고 해도 여전히 유효한 카드였다.
“어떻습니까. 테오도어 공에게 관심이 좀 생기십니까?”
여기저기에 수긍하는 기색이 많았다.
“진지하게 고려해 봐야겠군요.”
“혈통이 바뀌는 나라는 아무래도 위험성이 있습니다. 반발할 사람도 적지 않을 테고요. 새 시대를 함께 열 황족분을 우리 쪽으로 모시는 편이 가장 무난할 듯합니다.”
계속해서 페이튼은 입이 마르도록 테오도어를 칭송했다. 물론 듣는 이들은 그게 면피용이라는 걸 알았다. 일곱 살짜리 어린애가 영특하면 얼마나 영특하겠는가. 다 황제 자리를 채울 구실에 불과했다.
밤이 깊도록 논의가 이어졌다.
그런데 긴 공론이 오가는 와중에도 얘기하지 않는 점이 한 가지 있었다.
누구도 현 황제를 끌어내리는 역모를 단행하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괄괄한 성정의 디트리안 백작조차 입도 뻥끗 안 했다.
그런 시도는 무모하다는 걸 암암리에 깨닫고 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황제가 쓰러지던 시절 역모를 일으켰으면 승산이 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어린 황태자를 주무르는 데 심취해 있었다. 귀족파의 세상이 오래 지속될 줄 알았지, 고작 5년 만에 황태자가 이렇게 팽팽한 구도를 이루며 성장하게 될 줄 몰랐다.
황제의 상비군은 굉장히 강력했다. 귀족의 사병이 감히 대적할 바가 아니었다.
군대의 힘이 날이 갈수록 커져서 이젠 정면승부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지난 총사 대회를 훼방 놓으려던 저의도 이런 흐름의 결과였다. 그것조차도 성공하지 못해서 도리어 총사대의 전력이 강화된 상황이었다.
그래서 영지를 분리해서 독립하게 된다면, 이웃 나라의 병력 지원을 받을 예정이었다. 갑작스레 군대를 만들어 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외세의 힘을 끌어 쓸 수밖에 없었다.
“거사는 시일을 오래 끌면 불리하겠지요?”
“암요. 되도록 서둘러야 합니다.”
다들 협조적인 표정을 지으며, 머릿속으로는 각자의 이득을 셈했다.
* * *
케츠모리스 저택이 나날이 달라져 가고 있었다.
어제는 회계사가 왔다 가더니, 오늘은 부족한 일손을 채우기 위해 집사와 고용인이 새로 출근했다.
에디스가 황궁 근처에서 간단한 면접을 보고 합격시킨 자들이었다. 집에 오지 못해도 멀리에서 관리가 이루어졌다.
황폐했던 정원도 달라졌다. 타와누카가 저택 출입구에 심하게 많이 난 잡풀부터 제거했다. 눈에 잘 띄는 곳 순서대로 잔디를 깎으니 한결 사람 사는 집같이 보였다.
편지를 받는 일도 타와누카의 담당이었다. 배달부를 통해 한꺼번에 오는 것들과 인편으로 따로 오는 것을 꼼꼼히 챙겨 주인의 서재 보관함에 차곡차곡 정리했다.
또한, 매번 편지의 봉투를 유심히 살피곤 했다. 기다리는 편지가 언제 오려나 고대하는 마음이었다.
타와누카의 손에 허수아비 표시의 편지가 도착한 날은 정말 뛸 듯이 기뻤다.
「허수아비 타와누카. 며칠 전에는 네가 너무 말라서 안쓰러워 보이더라. 다음에 만날 때는 별명을 뗄 수 있도록 살이 올라 있으면 좋겠어.」
“꼭 그러겠습니다. 주인님 집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튼튼해져야지요.”
「글을 깨쳤다며 네가 큰소리쳤던 거, 조금 귀여웠어. 부디 장담했던 대로 편지를 잘 읽을 수 있길 바라.」
귀여웠다는 단어가 믿기지 않아 눈을 끔벅였다. 손으로 종이를 쿡쿡 찌르며 괴상한 방식으로 현실감을 확인했다.
“내가 귀여운가?”
갑자기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병이 다 낫고 움직이기 수월해지면 집사에게 가벼운 일부터 시켜 달라고 해. 네 처우를 당장 결정하기는 무리일 것 같거든. 일단은 다른 사용인처럼 급여를 받으면서 지내. 네가 강제 노예로 속박되지 않았다는 점을 반드시 명심해 주면 좋겠어.」
「이제부터 하는 얘기를 네가 이해할지는 모르지만, 되도록 쉽게 설명해 볼게. 라그란드 제국은 노예가 없는 나라야. 타와누카가 여기에 있어선 안 돼.」
「네가 꼭 여기에 살고 싶다면, 노예의 신분을 벗고 제국민의 권리를 주는 길밖에 없어. 하지만 그건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옛날에 노예제도를 없애면서 한꺼번에 노예를 해방한 적은 있지만 지금은 그런 제도가 사라졌어.」
「유일한 방법은 황명에 의해 일괄적으로 불법 노예를 제국민으로 받아들이는 것뿐이야. 이것 역시 단시일 내에는 힘들지.」
“뭐라고 하는 건지……. 내가 여기에 있어서 주인님이 곤란하다는 뜻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쫓겨나고 싶지는 않았다. 주인님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애원해서라도 꼭 여기에 살고 싶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 어떻게든 해결해 볼게.」
“…….”
아무리 황궁에 계시는 주인님이라고 해도 쉽게 해결할 리가 있을까.
타와누카는 어려운 대목을 여러 번 곱씹어서 읽었다. 황제가 뭔가를 해 줘야 한다는 뜻 같았다. 그분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분이라던데. 정확히 이해하기 힘든 그 일은 어려울 게 분명했다.
그래도 마냥 좋았다. 여신 같은 주인님이 저를 기억해 주기만 해도 행복한데, 편지도 써서 보내 주고 어려운 일도 힘써 주겠다고 했다.
편지를 소중히 보듬고 제 방으로 돌아간 타와누카는 행여 때가 탈세라 깨끗한 수건으로 싸서 사물함에 넣었다. 사물함에는 주인님이 지난번에 주신 손수건도 담겨 있었다.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자신에게 이런 행운이 찾아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타와누카에게는 주인님 자체가 별이고 행운이었다.
무엇으로 보답하면 좋을지 늘 궁리했다.
주인님이 시키면 당장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진짜로 할 자신이 있었다.
< 9장. 순정의 집착광공 >
“뭐죠? 왜 또 여기로 올라오는 거예요?”
에디스가 제 침대에 나란히 발을 뻗는 클라이드를 째려봤다. 그는 지난밤과는 다르게 당당히 베개도 가져와 그녀의 베개 옆으로 나란히 줄을 세웠다.
“또라니? 난 약속대로 하는 건데.”
“어제 약속을 지켰잖아요.”
“뭔가 오해가 있나 보군. 우리 약속은 앞으로 항상 같이 자자는 거였어.”
에디스는 입을 뻐끔뻐끔 벌렸다.
“누, 누구 맘대로요!”
천연덕스럽게 베개를 두드리는 행동으로 미루어 그는 절대 보조 침대로 돌아갈 기미가 없었다. 두 개의 깃털 베개가 잠자기 좋도록 폭신하게 부풀어 올랐다.
“약속이었잖아.”
“내가 기억하는 약속이랑 다른데요.”
“난 분명히 그렇게 약속했어.”
그는 에디스가 기함하든 말든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돌이켜 기억해 보니 정확히 횟수나 날짜를 정한 적이 없었다. 둘 사이에 오해가 생길 법한 상황이었다.
클라이드는 은근슬쩍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더니 손수 눕혀 줬다. 그의 팔뚝이 목덜미 아래에 깔렸다. 저절로 팔베개가 만들어졌다. 이럴 거면 왜 멀쩡한 베개를 매만지면서 난리였대.
꿋꿋한 태도의 그가 침의와 이불도 가지런히 펼쳐 정리했다.
이 남자를 걷어차서 내쫓을 수도 없고. 그녀는 주둥이를 쭉 내밀어 불만스러운 티를 내며 투덜거렸다.
“팔베개가 딱딱해요.”
근육이 꽉 차서 단단한 팔은 높이도 베개보다 높았다.
“그래? 이게 불편한 거였어?”
그는 과장되게 신경 써 주는 척하면서도 정작 팔을 빼지는 않았다. 도리어 팔꿈치를 접어 그녀의 머리가 가까이 오도록 했다.
툭 튀어나온 그녀의 입술을 보고 피식 웃더니, 새가 모이 쪼듯이 제 입술을 콕 찍었다.
“잠깐만 참아 봐.”
“왜요?”
“이러고 잠시만 있다가 풀어 줄 테니.”
에디스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그가 저를 장난감 다루듯이 물고 빨고 하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팔베개한 상태로 안긴 탓에 그의 두툼한 가슴팍이 코에 닿았다. 알파 페로몬도 전신의 피부를 통해 느껴졌다. 몸이 풀어지니 마음도 점차 느슨해졌다.
살을 맞대고 눕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싱숭생숭한 기분도 더해 갔다.
후각을 자극하는 페로몬과 안정적인 숨소리가 좋았다. 흘끗 올려다보면 늘 제게 고정되어 있는 따사한 눈빛을 만날 수 있었다.
굳었던 마음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를 받아들이고 싶은 욕심이 자꾸 피어나곤 했다.
자신은 클라이드의 반의반만큼도 따라가지 못하는 마음이지만, 그래도 가지겠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결말은 어디로 향할까.
“클라이드.”
그가 대답 대신에 그녀의 귓불을 살살 만졌다.
“내가 이 소설 속 세계에서 평생 살게 된다면…….”
“…….”
“그런 확신이 든다면.”
부족한 자신이라도 상관없겠냐고 물을 뻔했다. 조금만 좋아하고 잘난 얼굴에나 홀린 자신에게 그의 넘치는 감정이 아깝지 않냐고, 목구멍까지 물음이 올라왔다.
“그렇게 되도록 만들 거야.”
“어떻게요?”
“어떻게든 무조건. 정말로 내가 소설 주인공이라 해도 상관없어. 에디스만 이 소설에 남아 있으면 돼.”